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찌는 듯한 더위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더운 날씨에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의 신분을 저주스러웠다. 땀으로 이마에 들러붙는 머리를 넘겼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 공기 중에 꽉 들어찬 눅눅한 습기가 몸을 조였다. 단추 두어 개를 풀어헤친 교복 셔츠를 펄럭거려도, 시시콜콜한 잡담을 계속 이어가도 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녀석은 평소처럼 실실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빨리 와! 늦겠어! 정말, 느려 터졌다니까!”
“선, 천천히 가자…. 응?”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니 보인 것은 앳된 얼굴의 중학생 둘이었다.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활발한 모습을 보이며 재촉하는 여자아이의 머리가 햇빛과 만나 밝게 빛났다. 화사한 얼굴빛에 이끌리듯, 남자아이가 손을 뻗었다. 수줍게 뻗은 손이 여자아이의 손을 스쳤다.
“캬, 아주 청춘이구먼?”
“뭐?”
“여긴 여름인데, 저 둘만 봄이잖아?”
누군 이렇게 더워 죽겠는데 말이지. 어느새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며 녀석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청춘 만만세다!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실실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시선을 옮겼다. 습하기 짝이 없는 날씨. 손을 맞잡고 있는 중학생 둘. 밝은 주홍빛의 머리와 부드러운 갈색빛의 머리가 마치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는 양 나란히 맞붙는다. 청춘. 녀석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듯했다.
“청춘이라.”
“아이고, 저 때가 좋을 때야. 좋을 때지.”
시시콜콜한 말만 내뱉는 녀석의 입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쳐주며 사이좋게 큰길로 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겹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상처가 되어버린 날들 속에서 저 나이 때의 내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의 내가 그놈과 같이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혹시나, 그 모든 기억과 관계가 악몽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저러고 있을 수 있었을까.
“말도 안 되지.”
“뭐?”
이미 끝난 일이다. 그것은 악몽이었고, 미련 따윈 조금도 없다. 전부 끝난 일이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녀석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그 얼빠진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때의 기억들은 분명 악몽이었고, 상처였다. 그럼 지금은?
“왜, 이 형님이 그렇게 잘생겼냐?”
“아니.”
저놈의 능청은 언제쯤 사라질는지. 아마 평생 저러고 살지 않을까.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지금은, 그래,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다. 꽤나 즐거웠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게 만든 데에는 이 녀석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나를 보며 투덜거리는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햇빛을 잔뜩 받아 빛나는 얼굴이 꽤나 잘생기기는 했다.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줄곧 잊고 있었던 그 일. 꽤나 큰 충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잊어버렸던 그 일. 녀석은, 마르스는 나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더워서 맛이 갔냐?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을까?”
왜? 이유가 뭐지? 그때의 나는 이유조차도 묻지 못했다.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해서, 같이 있으면 즐거웠던 녀석이 순식간에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변하려고 하는 그 상황이 끔찍해서,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후로, 저 녀석이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제 고백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움직였던 녀석의 행동을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너, 왜 그때 나랑 사귀자고 한 거냐?”
생각보다 쉽게 나온 질문에 걸음을 재촉했다. 1년이 지난 일이었다. 녀석도 이미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궁금했다. 고백한 이유, 그리고 그 후로 한 번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 그저 궁금했을 뿐, 깊은 생각은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마르스?”
옆에서 걷고 있던 녀석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건 몇 걸음 지나지 않아서였다. 녀석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대로 멈춰버린 녀석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평소와는 달랐다. 녀석은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뱉어낸 말은 나를 굳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 * *
플루토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고백하고, 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 내가 본 표정은 고백을 받은 사람의 일반적인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결코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플루토와 멀어졌다. 고백을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건 머릿속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못 견디게 싫었다. 버티기가 힘들었다. 플루토가 그 모든 일을 잊어버리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플루토와 함께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저, 옆에 남고 싶었다. 변하는 것은 그다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상태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다. 앞으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네가 좋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네가 먼저 나에게 그 일에 대해 물어보기를 기대해왔었는데. 정작 지금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너는 분명 아무런 생각 없이 나에게 그 질문을 했겠지.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당황한 네 얼굴은 귀엽기만 했다.
“네가 좋아서, 좋아서 고백했어.”
“어?”
“네가 시원하게 웃는 게 좋았어. 체육 시간에 뛰고, 나는 게 빛나 보였어. 어스 옆에서 부드럽게 미소 짓는 네가 예뻤고, 그 미소가 날 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 시시콜콜한 말 하나하나에 반응해주면서 웃는 네가 좋았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것도 못 견디게 귀여웠어. 너랑 하는 대화 하나하나가 즐거웠고, 그냥 너랑 있으면 좋았어. 너랑 있으면 즐겁고, 너랑 있으면 행복해서, 그냥 너랑 같이 있을 때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어서,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
꼴사납게 떨리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분명 멋있게 다시 고백하겠다고 생각해왔다. 네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난 다시는 네 옆에 있을 수 없겠지. 그게 정말 무서워서. 목소리가 떨리고, 손끝이 떨려왔다. 그래도 너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내가, 고백했을 때, 네 표정을 보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네가 날 피할 때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까봐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없던 일로 한 거야. 친구로라도 옆에 있고 싶어서. 그런데 도저히, 도저히 널 좋아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어.”
마지막이다. 이 말을 하면 다시는 플루토의 친구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나는, 아직도 널 좋아해. 네가 정말 좋아.”
살짝 벌려진 플루토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끝났구나. 더 이상 플루토의 얼굴을 마주 보기 힘들었다. 눈물이 안 나오게 하는 데에도 필사적이었다. 아, 아아, 정말.
“아, 나 완전 꼴사나워….”
플루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 솔직히 무서웠다. 끝났다. 전부 끝나버렸다. 제대로 망했다.
“나, 갈게. 내일 보자.”
플루토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 *
물밀듯이 쏟아 부어진 마르스의 감정은 너무 컸다. 그 모든 것이 진심이라는 게 눈에 보이고 가슴에 와 닿았다. 마르스가 떠난 길가가, 휑하게 보였다. 마르스는 저렇게 말하는 놈이 아니었다. 마르스의 말에는 항상 장난이 섞여 있다. 그게 녀석의 방식이다. 그런데, 녀석이 단어 하나하나에 힘주어,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진지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붉게 물들었던 마르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르스의 말 하나하나가 귓가에 맴돌았다. 뭐야, 나, 어떻게 해야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