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좋은 밤일세, 솔라."
밤이라니. 이곳은 언제나 밤이잖아. 시리우스. 뭘 새삼스레? 솔라는 옅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요즘따라 자주 놀러 오는 듯해 그는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렸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솔라는 그와 몸을 가까이했다. 맨살과 맨살이 맞닿았지만 솔라는 그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업어 키우다시피 한 사이였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때였을까. 시리우스는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솔라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눈치채기조차 어려운 잠깐의 기류에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말게나. 위험하니. 뜻 모를 말을 하며 웃어 보이는 푸른 피부의 미남자에게 솔라는 다시 한 번 무언가가 엇나간 듯한 위화감을 느꼈다.
"위험하다니. 무엇이 위험한 건가? 네 누이를 말하는 겐가? 네가? 그도 아니라면 내가?"
설마 이, 솔라가 위험해진다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나는 네게 아무 해조차 끼치지 않잖아? 솔라는 싱긋, 웃어 보였다. 몇십억의 세월을 살아왔다. 나름대로 강하다면 강한 축에 속했다. 적어도 자신의 안위 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 아니, 겸손이라면 겸손일지언정 거짓은 아니었다. 골디락스가 있는 항성계. 누구나 탐낼만한 자리였다. 노려지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고 그 덕에 자연히 자신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의지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잔인함을, 때로는 친절을 보이며 포용하고 또는 밀어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중에 시리우스는 포용하는 축에 속했다. 언제였더라, 네가 나와 만난 때는.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항성이었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제 누이를 뒤로 한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소중한 이를 지키려 하는 그 바로 향한 시선이 자신의 흥미를 이끌었다. 그, 곧은 시선이라면 절대로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리라. 오랜만이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이는. 손을 뻗어 상냥한 얼굴로 나는 너를 그리 감싸 보였다.


자칫 꺼질 뻔한 별이, 제 손에 의해 다시 불을 밝혔다. 그 느낌은 당시 어리다 하면 어렸을 솔라의 안에서 무언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일순, 몇억 년 동안 술렁임 하나 없던 마음이, 그 잔잔한 호수가 푸른 항성이 던진 돌에 의해 물결을 쳤다. 퐁당. 상냥한 얼굴로 내가 너를 지켜줄게. 라는 상투적인 말을 뇌까렸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다 환히 웃어 보이는 어린아이에게 아,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열기를 처음으로 느꼈다. 고마워요. 수줍게, 그러나 꽃이 피듯 환히 웃어 보이는 그 아이에게 내가 무슨 감정을 품겠다고. 어이가 없다며 설레설레 혼자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은, 글쎄. 어린애의 철없던 감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사랑이었냐고, 연정이었냐고 누군가 되묻는다면 아마 자신은 '아닐 것이다' 라는 대답을 하리라.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물론, 사랑이라는 그 감정은 창조주이자 온 우주의 주인인 그분께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축복이자 저주이다. 약이고 오랜 세월을 버티게 해주는 꿀이었고 감정이 지나치게 되면 죽음마저 초래하는 독이었다. 그 감정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리라. 애초에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제게는 너무도 벅찬 감정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솔라는 코웃음을 치며 이제는 훌쩍 커버린 항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 내가 너를 해치리라고 생각한 걸까. 시리우스?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나는 네게 해를 가하지 않아. 너 역시 알고 있잖니. 나는 여태껏 너를 해치지 않았고, 미래에도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 나는 네가 아직 아이로 보여.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어린아이. 키들, 하고 솔라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우주의 시간은 참 이상도 하지.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길다니. 술이라도 하지 않겠어, 내 어린 친구야? 나름 농담이랍시고 던졌는데도 어쩐지 조금 어색한 기류에 붉은 머리의 사내는 만면에 띤 웃음을 유지하며 술을 마시는 시늉을 취해 보였다. 자신이 자신 있는 이야기를 꺼내서일까, 약간 딱딱하게 굳어있던 시리우스의 얼굴이 풀어졌다.
"술이라, 그거 좋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내 바로 가지 않겠나? 오랜만에 취하도록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니 말일세."
예전처럼, 혹 곯아떨어진다면 언제든지 재워주도록 하지. 머리카락으로 감싸려는 건 아니겠지…? 아, 싫은 것은 아니다만, 조금 불편해서 말일세. 그러니까. 음. 과도한 신체접촉이 말일세. 혹 내 누이가 보면 안 되지 않은가. 횡설수설, 그러나 조금 기쁘다는 듯이 시리우스는 들뜬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술이 고팠던 걸까, 아니면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어색하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면 어쩌랴, 솔라는 그저 웃으며 다시 그를 감싸 안을 뿐이었다.
* * *
유난히 칵테일이 잘 넘어갔다. 부드럽게, 또 달콤하게. 예전에 조금이나마 쓰게 느꼈던 맛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마치 자신의 취향에 꼭 맞춰 만든 것 같았다. 착각도 가지가지지. 솔라는 다시 한 번 칵테일을 들이켰다. 불그스름한 색이 꼭 노을 같아 시각마저 충족시켜주었다.
"맛이 어떤가? 내가 자네를 위해 특별히 만든 칵테일이라네."
달아. 맛이 아주 좋은걸? 고마워, 시리우스. 솔라는 살짝 웃어 보이며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목 넘김이 부드럽길래 순한 줄만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취기가 돌았다. 어쩐지 멍하고, 감각이 느려졌다. 내가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몇 잔을 내가 마셨더라. 시리우스는 여전히 빙긋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 너는, 너는 어릴 때와 같이 나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있구나. 시리우스. 솔라는 의미 없이 자신의 길고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를 늘어뜨렸다. 술잔을 다시 한 번 기울이자 조금은 끈적한 액체가 제 턱을 타고,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단 향이 온몸에 가득했다. 달아. 달콤하구나. 어릴 적을 기억한다. 너를 안았을 때 너는 답삭 나를 잡고 헤헤, 수줍게 웃어 보였더랬다. 어린애 특유의 열기가 제 살과 맞닿자, 치밀어오르는 그것은…. 정의내리기 어려운 무엇인가에 대한 욕구였다. 포동한 살을 잘근잘근 씹는다면 분명 입안 가득 단내가 퍼지리라. 어떡할까. 두근거리는 박동 소리는 제 몸을 가득 채웠고, 입맛을 다시며 용기를 내어 살짝 핥아보는 것이 다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달콤함이 끈적하게 물리지 않고 마치, 산들바람같이 부드럽게 제 혀에 안겨진 그 감촉이란. 아아. 나는 탐욕과도 같은 눈으로 너를 보았는데도 너는 다시 나에게 끝없이 웃어 보였더랬다. 깊고 깊은 어둠에 휩싸여있던 붉은 별은 푸르디푸른 빛에 의해 구원받은 듯했다.
"-라? 솔라?!"
다급하게 자신을 흔들어 보이는 시리우스가 시야에 가득 찼다. 꿈에서도 네가 나왔는데, 지금에서도 너는 내 곁에 있구나. 취기에 뇌가 미친 건지, 아니면 술에 약이라도 탄 것인지 끊임없이 졸음이 몰아치고, 몸에 힘이 빠졌다. 쉴 새 없이 나른함과 몸 안부터 끓어오르는 열기에 입맛을 다셨다. 머릿속이 눅진눅진한 것 같았다.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정신 차리게나, 많이 취한 것 같다만. 낮은 목소리로 나긋하게 속삭이며 찬 손으로 제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솔라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몸이 무거워 평소 주사조차 할 힘이 들지 않았다.
"...자나? 자는 건가. ...솔라, 좋아한다네. 내게 손을 뻗었던 그때부터 쭉 자네를 좋아해 왔다네……. 하하.. 술기운을 빌려서 고백하는 거. 조금은 어리석다고 생각해왔다만, 그 멍청이가 나인 듯하군. 바보 같게도."
서늘한 손이 제 눈을 덮었다. 술에 취한 듯 조금 어눌한 발음이, 낮은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자신을 울렸다. 네가 좋아한다고? 나를? 한동안 잠잠했던 호수가 다시 물결이 일었다. 영원히 그대로 잠잠할 줄만 알았다만, 착각이었나 보다. 이젠 그저 어린 감정이라 정의내렸었는데 나는 그것이 아닌 듯했다. 난데없는 고백에 술이 확 깬 듯 정신이 단숨에 맑아졌다.
"나 아직 깨어있는데, 시리우스."
솔라는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그의 손에 팔랑이자 시리우스는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드득 놀라 손을 치웠다. 아 얼굴이 가까웠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코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쪽.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누가 먼저 입술을 가까이하고 멀리한 건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술에 젖은 채로 맛본 서로의 입술은 달콤했으나, 한없이 쓴맛이 돌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너는. 솔라는 붉어진 제 눈가를 어루만지며 웃어 보였다.
"너는 내가 해야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그렇지, 응? 너도나도 예상하고 있는 그 말 말이야. 하지만 조금. 변덕이 생겼어, 예상외로 행동하고 싶어졌거든."
있지. 우리 한 번 궤도를 벗어나 살아보자. 시리우스.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거야. 솔라는 시리우스와 눈을 마주치며 씩 웃어 보였다. 다시 한 번 두 사내는 아까의 입맞춤보다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시리우스가 준 술은 독한 술인 듯 했다. 이렇게 감정을 불붙게 하는 것을 보면. 아아. 솔라는 마치, 죽지 않는 달콤한 독을 들이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 창조주가 피조물들에게 내린 축복이자 저주, 꿀이자 독과도 같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