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지구를 한 바퀴 둘러보고 각자의 용건으로 찾아온 요일들과 짧거나 긴 대화를 나누고 티타임을 가졌다가 모두 돌아간 후, 속에 차오른 오염물을 뱉어내고 뒤집힌 속을 가라앉히며 쉬고 있을 때였다. 저의 공간으로 누가 포탈을 연결하는 느낌에 고개를 들자 툭-하고 콧잔등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액체. 손으로 문질러 닦아 보니 갈색빛이 흰 피부 위로 옅게 번졌다.
액체의 정체를 짐작도 하기 전에 몇 방울이 더 투둑 떨어지더니 머리 위로 큰 그림자가 지고 재차 고개를 들기 무섭게 제 위로 떨어지고 있는 형체를 목격했다. 피할 틈도 없이 저를 덮쳐오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뒤로 넘어졌다.
"윽?!"
다행이게도 바닥이 모두 구름으로 이루어져 있어 넘어진 충격을 흡수해 내 아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저를 덮친 것이 부피에 비해 느껴지는 중량감이 의아할 정도로 가벼운 감도 있었다. 일어나기 위해 떨어져 내린 것을 잡자 온기를 가진 액체에 질척하게 젖은 천이 들러 붙어왔다. 물이나 기름 등의 그것과는 다른 기분 나쁜 느낌에 슬쩍 인상을 쓰며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확인하는 순간. 다시금 툭-하고 한 방울의 액체가 떨어졌다.
손바닥에 묻은 붉은빛을 띤 갈색 액체가 무엇인지 파악한 순간 급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며 다급하지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저를 누르고 있는 것이 굴러떨어지지 않게 두 팔로 꼭 안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 잠깐에도 닿은 곳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끔찍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가. 상처 따윈 입지 않는다는 듯 굴어놓고. 이렇게 피에 젖어서 나타난 거야.
"주피터."
제 행성처럼 덩치와 비교하면 한없이 가벼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신음처럼 새어 나온 이름에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늘 뒤집어쓰고 다니는 줄무늬 망토가 반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채로 점점 색이 짙어짐에 아직도 상처가 피를 토해내고 있을 것이 분명해 바닥에 눕히고 빠르게 벗겨내자 그때까지 맡지 못했던 짙은 혈향이 그제야 물씬 풍겨왔다. 피가 군데군데 묻긴 했지만 말짱한 앞쪽을 확인하고 몸을 돌리기 위해 어깨를 잡자 손끝으로 우둘투둘한 감촉이 느껴졌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헤집는 꼴이 되어 당황하며 손의 위치를 옮기려 할 때 손목을 잡아 움직임을 저지해 왔다.
"윽, 보지, 않는 게… 좋다."
"주피터?! 정신이 들었어?"
"아아-. 덕분에."
"미안, 상처가 등에 있는지 몰랐어. 치료하게 돌아눕ㄴ"
"놔둬라. 한숨 자고 일어나면…, 말끔하게 나을 테니."
말 허리를 잘라 먹으며 시큰둥하게 잡은 손을 밀어내는 주피터는 마치 말짱하다는 듯 굴었지만, 고통으로 인해 구겨진 미간과 몸의 떨림은 숨기지는 못했다. 상처를 보지 않아도 계속해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며 고이고 있는 범위를 넓혀가고 있어 상태가 심각해 보이건만 고집스레 등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그와 실랑이하다 다쳤다고 자신이 힘으로 이길 수 없음에 한숨을 쉬며 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그건 왜."
"머큐리 불러야지."
"부르지 마."
"주피터!"
"그 녀석이 오면 상처의 통증보다 잔소리로 인 한 두통이 더, …심할 거다."
좀 더 미간의 골을 깊게 만들고 폰을 빼앗으려 뻗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말하는 중간중간에도 연락을 방해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상처가 벌어지는 것인지 말을 멈추며 숨을 고르는 모습이 상처의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알려왔다.
"그럼 나에게라도 보여 줘."
"괜찮다니깐…."
"아직도 피가 흘러! 어차피 내 힘으로 완벽한 치유가 불가능한 건 아니깐 출혈이라도 멈춰야지!"
"아서라… 환자가 또, 늘어난다…."
"지혈 정도에 몸에 부담 가는 것이 아닌, 주피터?!"
숨을 고르는 정도가 잦아지고 말끝이 늘어진다 했더니 결국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리는 주피터. 그러면서도 폰을 쥔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의 힘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 고집스러움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가 다칠 일이야 뻔했고.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미칠 듯이 싫었다.
정신을 잃은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울고 있는 걸 봤다면 한층 더 짜증 내면서 여기 오는 게 아니었다며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겠지. 어째서 목성이 아닌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 대충 훔쳐내고는 주피터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 힘을 사용했다. 자주 쓰지 않는 데다가 제 몸 안에 차오르는 오염물을 내리누르는 데 사용하는 치유력인지라 이렇게 다른 곳으로 사용하면 아슬하게 유지되던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그도 그것을 알기에 자신을 막은 것이다. 정말 자신도 쓰러져 환자가 둘이 된다 하더라도 그건 그때 일. 자연적인 회복으로도 멈추지 않는 출혈을 막는 게 우선이었다. 루나의 달빛을 닮은 온화한 백색 빛이 두 손에 맺히자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금니를 꽉 물고 구토감을 내리누르며 힘을 끌어 올렸다. 제발, 지혈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 * *
서서히 깨어나는 의식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방심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었지만, 자신의 치유력으로 금방 아물 것으로 생각했던 상처는 변종 윔프 중에서도 특이한 유형에게 당한 것인지 회복은 더뎠고 비이상적으로 출혈이 컸었다. 그대로 목성으로 돌아간다면 위성들이 난리 칠 것이 분명해 조용하게 쉴 만한 곳을 물색하다 어스 녀석이라면 반대하더라도 자신의 부탁이라면 마지못해 들어줄 것이 확실하기에 지구로 포탈을 열었고 역시나 약간의 실랑이는 있었지만, 결국엔 요구한 대로 머큐리에게 연락을 포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억지로 울음을 참는 기색이었는데 아마 자신이 의식을 잃은 동안 한바탕 울었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또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눈물을 뽑아냈겠지. 어쩌면 힘까지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 벅차면서도 제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지나치기 힘들어하는 녀석이니, 자신이 다친 모습을 본 적이 극히 드문 데다 두 번이나 정신을 잃는 것을 보여 줬으니 쓰고도 남았음이라. 지극히 어스답다는 생각과 함께 의도하지 않았건만 올라가고 있는 입꼬리를 저지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 *
"…."
"…."
"…?"
"…."
"…!"
눈을 뜨자 익숙한 옆모습이 보여 멍하니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해 왔다. 이상하게 거리가 가깝다는 의문이 들어 의아해하다 자세가 조금 불편하네. 하며 뒤척이려다 번개를 맞은 듯 번쩍 정신이 들었다.
"주, 주피터!"
"왜."
"왜, 왜…왜…."
"왜 뭐?"
"자, 자세가!!"
"자세가 뭐 어때서?"
"아으, 어째서 내가 안겨있는 거야!"
주피터에게 치유력을 한계까지 쓰고 차오른 오염물을 힘겹게 토해낸 뒤 체력의 한계로 기절하듯 그 옆에 쓰러져 잠들었었는데 왜 바닥에서 깨지 않고 그의 품에서 깬단 말인가. 양반다리를 한 채 아기를 안듯 저를 다리 위에 눕혀 한쪽 팔로 등을 감싸 안고 있으니 거리가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허둥대며 자세를 바로 하려 하자 등을 지탱하던 팔이 위로 올라와 제 눈을 덮어 버렸다.
"주피터?"
"그냥 좀 더 쉬어라."
"이, 이대로?"
"그래."
"아니 그, 안 불편해?"
"별로."
"무거울 텐데…."
"치유력 좀 사용했다고 픽픽 쓰러진 허약한 녀석의 무계 따위가 무겁게 느껴질 리 없으니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마라."
"그래도…. 아직 상처가 다 나은 게 아닐 텐데…."
"알면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덧난다."
그렇다면 더욱 자신을 내려놓고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재차 항의의 말을 내뱉으려 하자 한마디만 더 한다면 눈이 아닌 입을 막아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으며 눈을 가린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져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정신을 잃기 전 지혈이 되는 것을 확인했지만,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 리는 없을 것이다. 얼마만큼 회복했는지, 머큐리는 부르지 않아도 괜찮은지, 도대체 언제 깨어난 것인지, 왜 굳이 저를 안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려진 시야로 인해 예민해지기 시작하는 다른 감각들로 전해지는 온기와 고른 숨소리가 나른하게 늘어지게 만들었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몸이 계속해서 휴식을 요구해 왔고 어쩐지 즐거운 것 같은 주피터는 저를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여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조금 더 자고 물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잠에 덜 깬 상태로 봤지만, 정신을 잃기 전보다 상태는 좋아 보였고 오염물과 상관없이 제 속을 울렁거리게 하였던 혈향도 더는 나지 않으니 당장은 괜찮을 것이리라. 그러니 그도 이런 장난을 치는 거겠지. 또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무리한다면 쉬고 난 다음 다시 치유력을 쓰면 되는 것이다. 못 쓰게 한다면 머큐리를 부른다 하자.
"…조금…, 있다가… 보여…줘야…, ㅎ…."
* * *
빠르게 잠에 빠져드는 어스를 내려다보다 호흡이 느려짐을 확인한 후 눈을 가린 손을 떼어내 다시 등을 감싸 안고 뒤로 넘어가는 머리에 좀 더 품으로 끌어당겨 자신에게 기대어 잘 수 있도록 자세를 추슬렀다. 턱으로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칼과 함께 맡아지는 어스 특유의 체향이 마음에 들어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등의 상처가 아직 욱신거리긴 했지만 어스가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는 멀쩡해질 것이다.
"지구로 오길 잘했군."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몸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품 안을 따뜻하게 데우는 온기와 어디 가서도 맡을 수 없는 향, 그의 공간이 가진 안온함은 좋았다. 깨어나면 분명 상처를 보여 달라 호들갑 떨 테니 말짱해진 등을 보여주며 그냥 두면 나을 것을 괜스레 힘까지 써서 쓰러지느냐고 핀잔이나 줘 볼까 하고 잠든 어스가 불길함에 몸을 떨 만한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