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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살인마."

 

  피가 뚝뚝 흐르는 거대한 무기.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를 유지하는 낫. 혈향을 머금은 사신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안구 가운데의 홍채가 번뜩이며 붉은 안광을 흘렸다. 제법 힘을 쓴 탓인지 길게 자라난 머리가 등을 가득 뒤덮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고 느린 숨을 내쉬던 플루토가 이윽고 굳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정말 내가 했다고 생각해?"

 

  나직이 깔리는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훨씬 냉랭했다. 마치 그가 거주하는 궤도의 한기를 그대로 성대에 담아낸 듯, 그토록 차가웠다. 모든 정황증거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나 이미 둘은 맹세했지 않았나. 간절했던 만큼 서로를 믿어주기로. 지켜주기로.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단어에 어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한순간 흐려진 판단으로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후회는 언제나 늦기 때문에 후회라고 했던가. 이미 플루토의 안색은 무섭도록 굳어있었다.

 

  '무어라고 말 좀 해봐, 어스.'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플루토의 낯빛이 미미하게 흐려졌다. 얼핏 보기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어스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괴로워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를 달래줄 사람은 바로 어스 자신이었을 텐데.

 

  '난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제발, 안돼…….'

 

  말라붙은 어스의 입술이 몇 번이고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침묵 속에 우뚝 서 있던 플루토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스를 바라보았다. 심연 속의 루비 같은 눈동자로 어스를 들여다보던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돌아가 버렸다. 아직 선연한 색채를 간직한 핏방울 몇 개가 망토 끝자락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허공에 흩뿌려졌다.

 

 

 

* * *

 

 

 

  언젠가 너에게 접근하는 자를 본 적이 있었다. 처음 볼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본능에 가까운 직감은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죽음과 맞닿은 삶을 살았던 나는 무섭도록 감이 발달해있었고, 특히 피 냄새를 풍기는 자는 거의 즉시 찾아낼 수 있었다. 난 날카로운 눈으로 그자를 노려보다가 곧장 뒤를 밟았다. 그자는 희디흰 두건을 쓰고 너에게 사근사근 말을 붙였다. 조금 난감한 표정이긴 했지만 너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그자의 두건에 새겨진 눈 모양의 표식,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두려웠다. 너를 빼앗길까봐. 영영 잃어버릴까봐. 나는 당연히 너를 지키고자 했고 내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너를 지켰다.

  그게 전부였다. 나를 바라보던 네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날카롭게 박힌 기억의 조각은 생생한 외침으로 이따금씩 통증을 안겨주었다.

 

  '살인마.'

 

  그것은 눈을 뜬 순간부터 내게 주어진 이름이었다. 하데스의 의지를 잇는 자. 죽음 그 자체나 다름없으며, 생명을 앗아가는 자.

 

  '플루토.'

 

  내게 결핍된 무언가를 채워주는 존재. 너의 맑은 울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다정한 목소리를 부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내게만 보여줬던 네 모습은 혼자 숨겨두고 싶었다. 나만 볼 수 있도록. 네가 구속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것조차 너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의 죄를 덮으려 하는 것이겠지. 여기까지다.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할 터다. 작고 푸른 점은 지금도 머나먼 안쪽 궤도를 돌고 있을까. 문득 광막한 이 우주 공간에서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네 생각에 사무쳐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 * *

 

 

 

  '정말 내가 했다고 생각해?'

 

  그건 생명을 직접 앗은 것과는 관계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단지 자신을 지켰을 뿐이었다. 오히려 동기는 스스로 제공하지 않았나. 그토록 모두에게 지켜지면서도 안이하게 행동했고, 방심했다. 그자를 좀 더 경계했더라면 플루토가 자신과 했던 약속을 깰 필요도 없었으리라.

 

  '네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그의 붉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더라도 상관없었다. 감춰진 비밀을 알게 된 이상 이제 와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범인이 누구라는 사실 따위는 정말 사소했다. 결국 자신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걸 인식한 어스의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명백하게 죄책감에 시달리는 표정이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성급하게 믿음을 깨버린 건 자신이었다. 한순간이라도 믿어주려 노력하지 않았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심지어 자신 또한 마냥 깨끗한 존재는 아니지 않았나. 모두에게 상냥하지만 결국 필요할 때는 피 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총칼을 빼 들어 손을 붉게 적실 줄 아는 자였다.

 

  '오히려 위선자는 나야. 거짓으로 점철된 내 껍데기에 속았던 피해자는 다름 아닌 너. 아아,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까.'

 

  결국 악인은 없었다. 모두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 발버둥 칠 뿐이었다. 플루토의 행동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일 터. 둘은 이미 만남과 이별을 수없이 반복했다. 허나 또 한 번의 실수로 서로를 상처입혔고, 아득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말았다. 어스는 깊게 숨을 토해내었다.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기 위해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득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스는 홀린 듯이 책을 집어 들었다. 파라락 넘기던 와중 그의 시선이 한 페이지에 고정되었다. 어스는 급히 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삐죽 머리인 아이는 사랑받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들었어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누군가가 없었다고. 그래서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지지 못했다고.'

 

  아…… 그랬다. 단지 그는 불안했을 뿐이었다. 저에게 받는 것과 그가 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서 허둥댄 거였다. 둘 사이에 오가는, 처음 느껴봤을 감정이 낯설어서 경계한 거였다. 조금 더 따스하게 알려줄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어쩌자고 플루토를 그렇게 몰아세우고 만 걸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온전히 지키고자 했던 그에게 어쩌자고 그렇게 심한 말을 하고 만 걸까. 자신을 잃게 될까봐 불안해서 죽음을 손에 쥐었을 뿐인 플루토에게, 어쩌자고 그리도 모질게 대했단 말인가. 어스는 가시넝쿨 사이에 얽혀든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죄책감에 여기저기 찔리고 목을 졸리는 느낌이었다. 목구멍에 턱 틀어막힌 텁텁한 감정도, 플루토도,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지금은 너무나도 버거웠다.

 

 

 

* * *

 

 

 

  그날 이후로 의미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귀찮게 덤벼드는 놈들은 평소와 달리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베어버렸다. 그 외에는 멍하니 네가 있을 공간을 바라보았다. 네 목소리는 여전히 내게 아픔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크게 실망했을 터다. 다시는 만나려 하지 않겠지. 내게 관심을 끊은 채 타오르는 별 주위에서 행복한 듯 푸르게 빛나겠지. 마치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는 듯. 내가 없어도 잘 지내고 있을 터다. 넌 드넓은 우주에서도 특별한, 그래서 더욱 사랑받는 행성이니까.

  나는 내 작은 보금자리에 그 어떠한 감상도 가진 적 없었다. 생명을 가득 품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는 나의 관념 속에 없던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름다움, 존중, 가치. 갖가지 핏빛으로 가득하던 내 세상을, 네가 녹청의 빛깔로 조금씩 물들였다. 그렇게 무언가를 하나 배울 때마다 너와 나 사이의 대비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토록 다른 우리 둘에게 공통점은 존재할까. 나는 물끄러미 나의 행성을 내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하고 일그러진 표면. 차갑기 짝이 없는 온도. 어느 것 하나 너를 닮은 구석이 없었다. 나는 조금 흐려진 눈빛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우주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문득 시야에 무언가 아른거리는 것이 잡혔다. 나는 눈매를 좁히면서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썼다. 이윽고 무엇인지를 깨달은 내가 숨을 홉 들이켰다. 나의 행성을 둘러싸고 있는 옅은 대기는 너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스. 찾았어."

 

  너무 오랜만에 낸 목소리는 깊게 잠겨있었다. 허나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로소 너와 같은 것을 발견했으니까. 누가 이 먼 곳에서 그토록 귀한 골디락스와 같은 빛깔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까. 문득 지구에서 올려다봤던 푸른 하늘이 보고 싶었다. 내 것이 아닌데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너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너라면 웃어주겠지. 수줍은 무지갯빛 구름을 띄우며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겠지. '정말 멋져, 플루토!' 네 목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했다. 다시금 울리는 고동이 귓가를 둔중하게 때렸다. 무엇일까. 이 느낌은. 나에게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이것은.

 

  아아, 그랬던 거였다. 살아있음, 생명. 네가 그토록 내게 가르치려 애썼던 첫 번째 개념. 그리고 내가 끝자락에 도달해서야 겨우 깨달은 것. 내가 너무나도 손쉽게 앗아가는 것. 그리고 그런 날 말리려고 애쓰고, 각자 숨 쉬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도록 무던히도 애썼던 네가 상징하는 가치.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나에게 화냈던 이유. 다그치고, 눈물 흘렸던 이유.

 

  하나의 깨달음은 잇따른 통찰력을 주었다. 죽음으로 점철된 생애를 통째로 부정당하면서도 내가 너를 따랐던 이유. 그랬다. 이제서야 알아차린 내 깊은 곳의 외침. 어스, 난 네가 좋았다. 나와는 정반대의 존재, 필연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으면서도 결코 겹치지 않을 평행선을 그리는 너. 생명의 씨앗. 죽음의 요람. 널 좋아하게 된 내 감정은 나를 죽이고 온전히 너를 위해 행동했다. 네가 했던 말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겼고, 약속한 것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애썼다. 널 알게 된 이후로 내 모든 일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휴면에 들 때도 네 생각을 하며 잠들었고, 꿈속에서조차 너를 떠올렸다. 눈물나도록 네가 보고 싶었다. 너무 늦었을까. 그러면서도 나는 뒤늦게 깨달아버린 이 감정이 흘러넘쳐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라도 다가가면 너는 웃으면서 반겨줄까. 우리가 서로에게 입혔던 상처는 치유되고 아물 수 있는 자국일까.

 

  너는 나에게 무엇이든 베풀어주었다. 하지만 네가 주는 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 나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감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왜 그런 걸까. 왜 너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또 모두에게 일정 거리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는 걸까. 나는 너의 맑은 미소를 떠올렸다. 동시에 네가 나 때문에 흘렸던 눈물을 기억했다. 나는 그 모습마저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다. 허나 네가 눈물을 흘리게끔 한 나의 심정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진심으로 너를 아꼈기에 그 고통은 더욱 컸다. 나는 그림자 같은 존재, 내 일에 얽혀든 너마저 진창에 빠뜨리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널 감싸려고 한 일이 오히려 네 눈가를 적시는 결과를 가져왔고, 네 주변의 위험을 제거하려던 일은 널 절망에 잠식되게끔 한 꼴이 되었다. 문득 머릿속에 하나의 가정이 스쳤다. 네가 알려준 골디락스의 의무, 제 품에 거둔 것을 모두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하는 자리. 어쩌면 너는 생명에 온 마음을 쏟느라 정작 타인을 돌아볼 수 없는 게 아닐까. 네게 씌워진 굴레가 너를 옥죄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것을 내던져 생명만을 사랑해야 하는 자리가 네 자리라면, 정작 너를 보듬어줄 존재는 누구일까. 보답 받을 수 없는 외로운 여정, 네게로 향하는 험난한 길. 이제야 결심이 섰다. 황금빛 안대에 눈이 가려져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없는 너, 아무에게도 깊은 마음을 줄 수 없는 너, 그런 너를 내가 사랑하겠어.

 

 

 

* * *

 

 

 

  플루토가 있을 곳을 바라보는 어스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구름 위 보금자리에서는 좀 더 밤하늘이 맑았으나 카이퍼대의 천체를 대기권 안쪽에서 관측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스는 잠시 방독면을 벗어들고 아득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어스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입 모양만으로 말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플루토. 헤아릴 수 없는 천체들 사이에서 발견한 보석.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 들리지 않을 내 목소리를 실어 보낼 게. 네 귓가에 내 속삭임이 가 닿도록. 가장 먼 곳에 자리한 너에게 닿을 때까지 이름을 부를 게. 플루토…….'

 

  닿았을까. 어스는 깊은 밤하늘의 끝자락을 들여다보았다. 저 수많은 빛, 많고 많은 천체 중에 플루토 또한 빛나고 있겠지. 자그마한 그의 행성도 이 태양계를 돌고 있겠지. 어스 자신이 아끼는 지구 또한 그러하듯이.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체가 보내는 빛을 헤아리며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희게 두드러지는 손가락이 무수한 천체를 하나씩 훑었다. 이쯤에, 아니면 저기쯤에. 어스는 자그마한 빛을 하나하나 짚어보다가 구름 위에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고요한 하늘에 흩어졌다.

 

 

 

* * *

 

 

 

  찾아가도 괜찮을까. 플루토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결심이 서기까지 몇 번이고 망설였다. 적어도 마음속에 품은 이 불꽃을 전하고 싶었다. 황금빛 족쇄에 발이 묶여 자유롭지 못한 골디락스에게. 지구 밖에서는 오랫동안 머물 수 없는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갈피를 못 잡던 마음이 일단 안정되자 움직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행동력이 강한 플루토는 순식간에 푸른 행성의 궤도에 다다랐다. 어디에 있을까. 대기권을 내려다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렸던 장소. 무지갯빛 음색이 울려 퍼지던 곳. 플루토는 어스의 보금자리인 구름을 향해 날아갔다.

  어스는 잔잔한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중이었다. 건반을 매끄럽게 훑는 하얀 손에는 파르스름한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부드러운 성품에 비하면 훨씬 강인한 손이었다.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소드 스틱을 빼 들고, 묵직한 중화기도 얼마든지 겨눌 수 있었다. 허나 단 하나뿐인 친구에게 총칼보다 더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깊은 상처를 내었다. 진상을 알고 난 이후로 어스의 구름은 내내 먹빛이었다.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그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용서받지 못하겠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스는 연주하던 곡을 쓸쓸한 가락으로 바꾸었다. 애절한 멜로디가 하늘 위로 흩어졌다. 죄책감, 자기혐오, 그리움.

 

  '보고 싶어, 플루토.'

 

  그가 행했던 모든 것, 이번 일도 결국 어스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플루토 본인은 그 근본에 깔린 감정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제 몸에 깃든 불꽃이 무엇인지 좀 더 빨리 알려줬어야 했다. 차가운 행성의 주인, 뜨겁게 타오르는 핵을 가진 그에게. 사실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어스가 끝내 알려주지 않은 개념이 있었다. 사랑. 누군가를 좋아하고 간절히 원하는 마음. 아껴주고 지켜주고 싶은 감정. 열렬히 타오르는, 그래서 핵이 요동치게 만드는 것. 상대에게 끊임없이 이끌리며 정반대의 존재일지라도 갈망하게 되는 것. 눈앞에 없으면 그리워서 애달파하는 감정. 어스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 방독면을 벗었다. 그리고 희디흰 손마디로 얼굴을 감쌌다. 미묘하게 오가는 서로의 감정이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이라도 그 순간을 유지하고 싶었다. 진짜 감정으로 플루토를 마주하는 것이 아쉬웠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이 설레는 마음을 잃어버릴까봐, 한 걸음 떨어진 그 거리를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했다. 그것마저 잘못된 선택이었는데도. 어스는 뒤늦게 후회에 사로잡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얼굴을 가리던 손은 떨어져 나왔지만 어느새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먹구름이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어스."

  "……!"

 

  저를 부르는 음성에 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낮게 긁힌 쇳소리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였다. 떨리는 녹청의 눈동자가 방문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플루토."

 

  어스는 긴 의자를 뒤로 당기며 홀연히 일어섰다. 포근한 구름이 그의 발걸음 소리를 감춰주었다. 이윽고 거리를 좁힌 어스가 그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뻗은 플루토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다시 짧게 다듬어져 있었다. 길게 펄럭이는 까만 망토에도 붉은 액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늘 자신만을 향해 맑은 웃음을 보이는 명왕성의 주인,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저기… 어스. 내가 잘못……."

  "어서 와, 플루토."

  "……!"

 

  어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자그마한 미소는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만면을 가득 메웠다. 무채색의 구름에 조금씩, 오색 찬란한 빛이 찾아와 깃들었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는 플루토가 눈을 크게 떴다.

 

  "화 안 낼 거야……?"

  "물론. 아니, 오히려 사과할 사람은 나야. 내가 경솔했어. 넌 아무 잘못도 없어. 미안. 정말 미안해, 플루토."

 

  투명한 것이 하나, 어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길게 뻗어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을 따라 예쁜 호선을 그렸다. 다신 못 볼 거라 생각했던 그가 찾아오자 어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무지갯빛 구름은 여전히 어스의 머리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행복함에 젖어 있었다. 플루토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결심하고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어스."

 

  그는 기꺼이 그 말에 따랐다. 피아노를 치는 동안 편하게 풀어헤친 정장 자락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아름다운 행성주가 죽음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었다. 손을 맞잡으려 했는데 어스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게 다가오자 플루토가 놀란 표정을 했다. 이내 벅찬 감정에 물든 플루토가 힘껏 어스를 껴안았다. 행여나 놓칠세라 그토록 제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어스 역시 자신을 휘감는 팔힘을 느끼며 옅은 홍조로 얼굴을 물들였다. 그의 불안감을 읽어냈는지 어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작은 한숨을 폭 내쉰 어스가 플루토의 뾰족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평온한 하늘 위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체온을 교환하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따스한 숨소리가 갈피를 못 잡던 플루토를 안심시켰다. 오래도록 갇혀있다가 풀려난 감정이 이제야 깃털을 활짝 펼치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스."

 

  다시금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어스가 머리를 기울였다.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돌려 최대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자 플루토가 말을 이었다.

 

  "나 말이야, 그동안 계속 네 생각을 했어. 그러다가 내 행성에서 너를 발견했어."

  "나를?"

  "명왕성에도 있었어. 너와 닮은 것. 옅지만 푸른 대기층이."

  "아아……."

 

  어스는 탄성을 올리며 플루토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수줍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자그마한 뿌듯함이 엿보였다. 지구의 대기와 같은 빛깔에 감싸진 제 행성을 바라보면서 플루토가 얼마나 행복했을지 그대로 느껴졌다. 어스는 조금 더 힘껏 플루토를 껴안았다.

 

  "정말 멋지겠다, 플루토! 나중에 가봐도 될까?"

  "응! 얼마든지!"

 

  기쁨에 찬 둘의 음성이 한데 섞여들었다. 긴 수명을 지닌 만큼 둘은 앞으로도 난관에 부딪힐 터다. 살아가면서 다투기도 하고, 오해를 빚으며 서로를 밀어낼 때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는가를 간직한다면 다시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잊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애틋했던 마음을 기억해낼 수만 있다면.

다라두버

영광의 1등 제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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