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플루토는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싶어 잔뜩 힘을 줘 주먹을 쥐었다. 전투형으로 바뀐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면서 찌릿한 작은 통증을 가져 왔다. 통증. 통증이 있다. 그렇다면…. 꿈이 아니다.
눈앞의 상황이.
"저기…."
저가 온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 중인 것인지 -아마도 후자일- 가지각색의 표정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자신에게 시선을 준 이는 단 한 명. 그의 상냥하고 착한 친우였다.
[플루토. 어서 와 :) 놀랐지?]
방독면에 가려졌지만 웃고 있는 듯한 그가 작은 칠판으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기 시작하자 대치 중인 듯 보였던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는 게 조금, 아니 많이 무서웠다. 분위기와 지닌 색이 틀릴 뿐 모두 같은 얼굴이 어쩐지 적대적인 눈빛으로 노려보다시피 보는게 뭔가 잘 못 했나 싶어지기도 하고 그에게 약하기만 한 자신의 본능도 겸해져 작아지는 기분.
"으응, 어스 안녕…."
어설프게 건넨 인사에 어째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 그 언젠가 보았던 꿈과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상황에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꿈에서는 정말 좋았는데 왜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울적한 기분이 들어 제 앞으로 온 어스를 끌어안기 위해 손을 뻗자 온갖 방해 공작이 들어왔다. 뻗은 제 팔을 제지하듯 잡은 손과 목에 겨눠진 익숙한 무기들의 서늘한 기운. 그리고 보호하듯 어스를 뒤로 끌어 제 품으로 가두는 이까지. 평소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표정들에 눈은 즐거웠지만, 상황이 즐겁지 않다. 어째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위험은 배제한다."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바보 균 옮아."
항의하듯 내뱉은 말에 즉각 돌아오는 대답들이 겨눠진 무기가 차례로 몸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파! 냉정해! 어스는 저렇지 않다고!!! 울컥한 마음에 목에 겨눠진 죽음의 기운을 뿌리는 긴 낫을 손으로 밀어내며 아까보다 가까워진 그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우선은 방금 밀어낸 무기의 주인. 자신이 쓰는 무기와 일치하듯 똑같은 데다가 양 볼에 그려진 무늬까지 같았다. 그것도 힘을 억제하고 있을 때가 아닌 형태. 무엇보다도 풍기는 기운 역시 자신과 같았다. 그 옆에서 일자의 긴 테라스틱을 겨누고 있는 이는 마치 모든 색이 날아가 버린 듯 온통 새하얀 색에 별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은빛 눈동자와 구름이 아닌 냉기가 느껴지는 흰 안개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반전 시켜 놓은 듯 온통 새카만 색에 눈동자가 피처럼 붉은 이가 바로 옆에서 제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색과 풍기는 기운, 분위기가 틀릴 뿐 모두 같은 얼굴.
어스였다.
저 뒤에 떨어져 제가 아는 어스를 보호하듯 품에 안은 이들 역시 화려한 핑크빛의 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어스와 그리우면서도 떠올리기 꺼려지는 과거의 앳된 모습보다 더 어려 보이는 어스. 어스가, 제가 좋아하는 어스가 한가득-. 꿈이 재현된 것 같은 현실에 바로 전의 상황도 잊고는 헤벌쭉 얼굴이 풀려 버리는 게 느껴졌고 무기를 겨누고 있던 세 어스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 빠악!
"---!!"
흡사 뼈가 부러진 듯한 살벌한 소리와 함께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 정강이에서 올라왔다. 주저앉아 차인 곳을 부여잡고 끙끙대자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흑과 백의 어스가 등을 돌려 가 버리고 저와 같은 기운을 뿌리고 있는 어스가 혀를 차며 낫을 세워 바닥을 내려찍었다.
"같은 명왕성의 주인이라니. 거짓말 같군."
"…뭐…?"
기운이 같았지만 저처럼 죽음의 별로 태어난 이겠지 했던 플루토가 깜짝 놀라 통증도 잊고 고개를 들자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붉은 동공과 마주했다. 분명 '같은 명왕성'이라고 했다. 어스의 모습인데 지구가 아닌 명왕성의 주인이라고…?
갑작스레 꿈속에서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에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얼굴만 같을 뿐인 어스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인가. 지금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를 제외하고는 색만 틀릴 뿐 모두 왼쪽 눈에는 어스를 짓누르고 있는 족쇄. 골디락스의 문양을 품고 있었다. 한 은하계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 한 골디락스의 주인이 다섯이나 모여 있다? 이 무슨 비이상적인 현상이란 말인가.
"설마, 또 마르스 짓인가?"
"화성주를 말하는 거라면 아니라고 해 두지."
"그럼 대체 누가…."
"모른다 우리도."
"뭐?"
플루토의 분위기가 바뀌자 그는 쥐고 있던 무기를 없애고는 살짝 몸을 틀어 뒤에 모여 있는 어스'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각자 나름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한자리에 모인 채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잠이 들었던 것도 의식을 잃었던 것도 아니었단다. 그저 갑자기 눈앞에서 나타난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들에 당황하다 서로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현 상황이 어찌 된 일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중이었던 참에 자신이 나타난 것이라 했다.
"원인을 모른다고?"
"정확히는. 다만 짐작 하는 것은 하나 있지."
"그게 뭔데?"
"…우리가 다른 은하계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을 아무런 징조 없이 순식간에 벌일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설마…."
머릿속을 스치는 한 존재에 침음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저를 내려다보고는 완전히 몸을 돌려 모여있는 이들에게 걸어갔다. 과거 제가 입었던 것과 흡사한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메마른 바람을 만들어내 제 얼굴을 훑고 사라졌다. 입 밖으로 낸 대답은 아니었지만, 긍정과도 다름없는 그 시선이 어스의 새로운 고통을 암시하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뚫린듯한 통증이 일었다. 어째서. 왜. 늘 어스에게만….
"플루토."
어스는 '자신'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플루토가 혼자가 됐음에도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일어나지 않은 채 충격을 받은 것 같이 얼굴이 점점 흉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플루토에게 무기를 겨눴던 셋을 질책하듯 바라보았다가 방독면을 벗고 그를 불렀다.
"어스…."
"이리와 플루토. 나 괜찮아. 아무 이상 없는걸."
"…."
달래듯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며 저를 부르는 어스의 모습에 천천히 일어서 걸음을 내디뎠다. 한 발자국씩 좁혀지는 거리만큼 통증은 사라지고 불안정해진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간다. 지척으로 다가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내밀어 진 흰 손 위로 조심스럽게 제 손을 겹치자 어스가 손끝을 굽혀 살짝 잡고 끌어당겼다.
"진짜 괜찮은 거야?"
"괜찮다고 말하기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어."
"다행이다아…."


그제야 잔뜩 굳어졌던 얼굴이 풀리고 힘이 쭉 빠진 몸으로 비척비척 걸어가 어스를 끌어안자 어리광부리기에는 너무 큰 거 아냐? 하고 웃으며 제 등을 도닥도닥 두드려주었다. 그 손길에 눈을 감고 품 안의 온기로 안정감에 젖어들 때쯤 따끔거릴 정도의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로도, 뒤통수로도 느껴지는 게 그제야 어스와 단둘만이 아니었음을 상기하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스의 가슴팍에 못 미치는 높이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녹청의 눈동자가 저와 딱 마주치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둥글게 휘었다. 그리고-
"이제 좀 떨어지세요."
검지로 제 이마를 꾹 밀며 말했다. 어스를 안고 있는 게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듯 손끝에 온 힘을 실어 꾹꾹 누르는 게 은근 아팠다. 자신을 찾아왔을 때 보다도 앳된 모습이 아마도 골디락스로 선택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적 같은 데다 낯선 이를 만나 잔뜩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웃는 낯으로 경계하는 게 제가 아는 어스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 따위 무시하며 마주 웃어주자 찌푸려지는 미간까지 새로웠다. 어린 그는 표정의 변화가 다채롭구나.
"계속 그러고 있겠다면 네 별로 직접 쫓아내 주지."
"동감, 우린 아직 나눠야 할 대화가 많으니 좀 빠져 주시죠."
어스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일까 아까와 같이 무기가 턱 아래로 바로 겨눠지진 않았지만 당장에라도 목덜미를 낚아챌 수 있다는 듯 잔뜩 살기를 담은 탁한 목소리와 정중하지만, 억양의 변화가 없는 평온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주춤주춤 어스에게서 떨어지게 하였다. 손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슬쩍 손을 뻗자 찰싹. 하고 허공에서 저지당해 버렸다. 핑크빛의 화려한 머리카락 색을 지닌 이가 난감한 표정의 어스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생긋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
상냥하게 말하지만 역시나 저를 떼어 놓으려 한다. 자신이 어스를 헤치기라도 할 것 마냥 구는 게 억울하고 서럽다. 어스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더욱더. 조르듯 어스를 바라보니 얼굴에 서린 난처함이 짙어지더니 포위하듯 둘러싼 이들을 한 번씩 쳐다보고 부탁했다.
"옆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괜찮잖아."
"…."
다들 못마땅한 표정을 짓지만, 거부의 말이 나오지 않아 엄청난 차별대우라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안도했다. 어스의 시선을 비켜 노려보고 있는 흑과 백의 페어에 울컥하긴 했지만 정말 얌전히 있겠다는 걸 보여 주듯 입을 꾹 닫고 어스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하나가 안 보이는군."
오가는 눈빛들이 교차하며 불꽃이 튀는 듯한 허상이 보일쯤 무심하게 저와 같은 명왕성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들 말고도 또 있다고? 절로 드는 거부감에 인상이 구겨졌다. 실컷 푸대접을 받는 중이라 이젠 같은 얼굴이라도 싫어지는 기분.
"이곳의 방어 시스템을 궁금해하더니 결국 못 참고 보러 가버렸나 보네."
"프로텍터라지만 내가 알고 있는 셋과는 판이하게 틀린 데."
"여기 없는 게 다행일지도. 널 보고도 그렇게 날을 세웠는데 저 녀석까지 온 걸 알면 가만히 있었겠나."
잠시 주제가 이동된다 싶더니 다시 모두의 시선이 두 명왕성으로 집중되었다. 무슨 소린지 몰라서 플루토는 어리둥절했고 다른 한 명은 관심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짝 다리를 짚었다. 벽에 있다면 아마 기대서지 않았을까. 묻고 싶지만, 얌전히 있기로 한지라 눈만 데굴데굴 굴리자 어스가 키득 웃으며 궁금해? 하고 물어왔다. 어찌 알았나 싶어 바라보니 반대편 손으로 제가 잡고 있는 소맷자락을 가리켰다.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소맷자락을 당겼었나 보다. 창피함에 얼굴로 열이 몰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목성의 주인이래."
"…!"
어스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목성의 주인…? 순간 줄무늬 놈에게서 얼굴만 어스로 바뀐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소름이 돋았다. 우락부락한 어스라니.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저들의 말에 따르면 있다는 거잖아? 붉어졌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보고 싶지 않아!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에 없는 이를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논하던 그들은 지금 불러와 봤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두자고 하고는 다시 한 번 이곳에 모이기 전 각자 하던 일과 상황을 비교하고 겹치는 것도 특이한 징후도 발견하지 못해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지구를 오랜 시간 벗어나질 못하는 골디락스가 어스를 제외하고도 총 넷이나 되는 상황이니 겉은 담담해 하면서도 눈동자에 서린 불안감은 숨기지 못했다. 그들이 예상한 존재로 인해 벌어진 상황이라면 그가 바라는 것이 있거나 단순한 장난일 것이다. 그는 그런 존재이니깐.
그분의 목적이 있든 없든 중심이 되는 것은 이곳의 어스임이 확실했기에 시선은 결국 그에게 쏠렸고 침묵이 내려앉은 그들 사이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어스는 옷자락을 잡고 있던 플루토의 손을 감싸 쥐고 눈을 떴다.
"나 역시 짐작 가는 건 없어. 이렇게 된 거 방어라인을 보러 간 그처럼 다들 그냥 관광차 온 거라 생각하고 쉬는 게 어떨까?"
부드럽게 웃으며 하는 말치고는 무책임했지만, 정답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초조해 하고 걱정해 봤자 부질없이 시간만 흐를 테니 차라리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나, 나나나나! 사실 아까부터 지구를 둘러보고 싶었어!!"
어스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소년은 손을 번쩍 치켜들고 눈을 빛냈다. 그런 소년이 귀여웠던지 핑크빛 머리 위의 구름을 옅은 무지갯빛으로 물들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 사내는 흑과 백의 페어에게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계속해서 한데 묶인 취급을 받던 둘은 잠시 서로를 불만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흑의 그가 한숨을 내 쉬고 고개를 끄덕이고 백의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공간을 갈랐다.
"보아하니 좌표도 같은듯하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하나, 둘 차례로 열린 공간 너머로 사라지고 포탈이 닫히자 어스와 플루토, 또 다른 명왕성의 주인만이 남았다. 내심 그도 포탈 너머로 사라져 주길 바랐던 플루토는 어스가 그에게 신경을 쓸까봐 제 손을 감싸 쥔 손을 마주 잡고 말을 걸려던 찰라
"나도 둘러보겠다."
라며 망토 자락을 잡아당기는 그로 인해 휘청였다가 중심을 잡고 그럼 저들과 같이 갈 것이지 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버럭 화를 내자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녀석때문에 울컥했다.


"아, 왜! 왜 그렇게 보는데!!"
"어스, 이곳의 카이퍼대는 어떤가."
"무법지대야."
"이런 녀석이 외각을 맡고 있는데 방어 라인은 괜찮은 거냐."
"뭐?!"
"아하하하. 그렇게 보여도 믿음직해."
"정말인가."
"응."
"무슨 뜻이냐고오…."
다시 대화에서 소외당하자 의기소침해진 저의 등을 어스가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명왕성과 그 일대를 보여주라 했다. 그제야 그의 목적지가 명왕성임을 알고 포탈을 열고는 가버리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저와 같은 명왕성주면 약하진 않을 테니 알아서 보라는 뜻이었다.
"아니. 너도 같이 간다."
"아아아악!! 난 어스랑 놀 거야!! 방해하지 마!"
가지 않으려 바둥거리며 버티는 플루토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며 포탈 안으로 발을 내딛던 그는 잠시 어스를 돌아보고 웬만하면 빨리 돌려보내라고 전해주길 바란다. 하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어스는 그가 눈치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다른 차원의 그는 감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플루토를 제외하고 다들 눈치채고 부러 자리를 비워줬을지도. 계속 플루토와 잡고 있어 서로의 온기로 따뜻했던 손이 식어가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져서 일까 평소보다 더 서늘해 지는 것 같은 손 끝을 쥐었다 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 그래, 다들 만나본 소감이 어떠하더냐.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을 파고드는 울림. 골디락스의 선택을 받았던 그때와 같았다. 허공이 일그러지며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나타난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짓눌려 굽혀지려는 무릎에 힘을 주어 버텼다.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 네 하는 짓이 탐탁지 않아서 그렇다.
힐책하는 듯한 어조에 어스는 쓰게 웃었다.
- 골디락스가 가지는 생명력에 대한 사랑은 내가 그리 만든 것이기에 잘 알고 있다만 넌 그것을 넘어서 저 자신을 돌보는 것 까지 포기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라고 보느냐. 골디락스는 생명을 품는 별. 그것은 한없이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유지하며 그들의 진화를 돕는 것. 그것이 네가 할 일이었다.
"..."
- 그들 중 너와 같은 몸 상태를 지닌 이가 있더냐.
"다들 건강해 보이더군요."
- 너 역시 그리 살 수 있다.
절로 마음이 혹할 정도의 달큰한 유혹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스럽게 차오르는 오염물을 더는 뱉지 않고 예전의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건강한 제 모습을 떠올려보던 어스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사합니다만 제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어째서더냐.
"이게 저니까요.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들과 저는 다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 의사도 전달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분이 미간을 짚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을 것 같아 작게 웃으며 납치하다시피 이곳에 모이게 된 이들은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느냐 여쭈었다.
- 그들의 호기심이 풀린다면 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 * *
일주일 후.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그들은 갑자기 사라졌다. 지구뿐만 아니라 태양계 모두와 카이퍼대까지 살펴본 후 다시 어스의 곁으로 모여 서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살아왔던 시간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균형을 맞추라는 언질까지. 그분에게 그랬듯 어스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소란스러웠던 일주일이지?"
일상으로 돌아와 드디어 단둘이 있게 되었다고 찰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플루토에게 말을 건네자 얼굴이 핼쑥해졌다. 다른 명왕성의 주인인 그는 태양계 외곽을 둘러보더니 변화 없던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이딴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후계를 만들어 핵을 넘기라며 발길질을 했다고 한다. 죽음의 상징인 그를 보고도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구경났다는 듯 모여드는 소행성들과 윔프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고.
대뜸 발에 차인 플루토가 그 성격을 누르지 못하고 욱해서 한바탕 전투가 이루어졌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두 가지 죽음의 기운이 부딪힌 여파에 소멸이란 자각도 없이 쓸려 가 버렸다고 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듯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투에 휩쓸려 소멸하고 다치기 시작한 소행성들이 급하게 태양계 안까지 와서 침입을 감지하고 나타난 프로텍터들에게 둘을 말려달라 애원하고 난 뒤에야 싸움을 멈출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소식을 접한 다른 행성주들이 구경한다고 지구로 몰려왔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신기해하는 가족들과 그들을 경계하던 다른 차원의 어스들이 어느새 합심해서 플루토를 갈구기 시작할 때는 그만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 버려 그를 울상짓게 하였다.
"또 오진 않겠지?"
"아마도."
"으윽. 두 번 다시 보기 싫어."
끔찍하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치를 떠는 플루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긴 했지만, 자신에겐 나쁘지 않은 일주일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난 다시 만나고 싶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