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깨고 싶지 않아
* * *
나른한 오후에 내리쬐는 햇살이 아래, 플루토와 어스는 서로 등을 맞대고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플루토가 살고 있는 카이퍼대는 온 우주의 원념과 악의가 응축되어 있는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위험이 도사린다. 카이퍼대에 정막이 내려앉으면 혼란의 도화선, 전쟁의 전조. 항상 떠들썩하던 카이퍼대에 정적이 찾아오면 소란을 피우던 이라도 몸을 숨겨 숨을 죽이고, 이때만큼은 어떤 이도 접근하지 않는다. 혼란은 누군가의 비명으로 시작하고, 곧이어 파괴와 혼돈을 부르며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렇듯, 그곳, 카이퍼대는 항상 위태롭고 불안한, 위험한 곳이다. 생존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플루토에게 그의 유일한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편하고, 평화롭다.
눈부신 햇살, 시원한 바람, 드넓은 들판과 그 위에 가득 피어난 꽃, 바람에 실려오는 풀내음, 서로 의지한 등, 맞잡은 손, 살며시 잡은 손으로 전해오는 온기. 모든 것이, 이 순간이 플루토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
"플루토."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졸던 플루토는 자신을 부르는 어스의 목소리에, 피곤이 무겁게 내려앉은 눈을 채 뜨지 못하고 겨우 고개만 돌렸다.
"나 이제 가봐야 해"
"…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놀기로 했잖아."
플루토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목소리는 아직도 잠에 취한 건지, 약속을 어긴 어스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깊게 잠겼으나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갈 채비를 했다. 온기를 쥐고 있던 플루토의 손 위를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그나마 남아있던 온기마저 사라졌다.
어지간해선 자신과 한 약속을 어기지 않는 어스였다. 오늘따라 이상해. 오늘? 비단 오늘뿐이었을까?
플루토는 직감적으로 기이함을 느꼈다.
어제는 무얼 했었지? 오늘은 무얼 하기로 했었지? 언제 지구에 온 걸까?
나는 분명 카이퍼대에 가서….
플루토의 손끝에서부터 냉기가 타고 올라와 온몸이 서늘해졌다.
"어디로 가는 건데?"
플루토는 어스의 팔을 붙잡고 올려다보았다. 어스는 대답을 요구하는 플루토의 시선을 외면했다. 어스가 질문을 답하지 않자 플루토는 심장이 푹 꺼지는 느낌에 대답을 재촉했다.
"어디로? 또 사라지는 건 아니지?"
또? 막연한 의구심과 불안함이 함께 고개를 치켜들고일어났지만 입술과 함께 짓물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플루토는 무엇이 두려운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 어느새 눈가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어스의 팔을 꽉 잡은 플루토의 손은 이제는 붙잡았다기 보다 매달린 것에 가까웠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깐 날 버리고 가지 마!"
잘못된 습관, 플루토는 무얼 잘못했는지 그 자신도 모르면서 우선 사과부터 하는 습관이 있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무작정 용서를 빌었다. 다만 지금의 플루토는 다급한 나머지 절박하게 용서를 구했다.
어스는 자신을 막는 플루토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옴짝달싹, 몇 번을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플루토, 이제 일어나."
플루토는 여전히 어스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말 없이 어스를 올려다 보았다.
"일어나야 해. 이제 나는 없어."
"무슨…."
어스의 말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건 꿈이니 허상에 지나치지 않는다는 걸일까. 아님 이젠 정말로 어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외면하지 마. 받아들여, 내 죽음을."
* * *
나는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그러니깐 언제쯤이었을까, 어스가 나를 위해 소개해주고 자주 데려가 주었던, 우리 둘만의 추억을 간직한 숲이 사라진 날이었을 터다. 나는 실망했고 어스는 미안함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허리가 잘려나간 밑동과 부러진 잔가지들과 같은 잔해들, 이 주변에 남아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곳에 숲이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아.
지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신기했던 내가 자랑스럽게 작은 새를 죽여버렸을 때, 어스는 숨이 멎은 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슬프지만 그러나 차분하게, 절제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어스가 슬퍼하는 모습이 싫어 그 후로 지구의 생명체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을 배웠으나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섭리가 당연했던 나로선 작고 약한 것을 다루기 어려웠고 한 번씩 어스가 그런 것들에게 관심과 애정를 쏟아부을 때마다 치기 어린 질투심으로 실수인 척 죽여버리곤 했다.
사라진 것에 대한 허망한 마음은 없을 줄 알았다. 이 손으로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죽여왔는데 고작 숲 하나 없어졌다고 허망할 줄 알았으나 숲에는 어스와 관련된 많은 추억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숲이 사라졌다. 산이 깎여나가고 바다가 없어졌고 들판 위에는 어느새 공장들이 들어서고 하늘은 푸르지 않았으며 어스는 자주 아팠다. 사라진 것들로 인해 어스는 슬퍼했고 인간은 계속해서 제거해나갔다. 이미 많은 것이 없어졌지만 작고 미약한 존재들의 욕심은 끝도 없었다. 어스라면 인간 말고도 다른 생명을 품을 수 있을 터였다. 사라진 것들이 이다지도 많은데도 계속 이들을 지켜나가는 어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알까? 모르겠지. 모르니깐 사라진 것에 대한 소중함도 미안함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겠지.
"어스, 난 역시 인간이 싫어. 이런 짓을 서슴지도 않고 하는 인간들을 죽이고 싶어."
인간을 말살시키려는 계획은 이전에도 몇 번이고 시도한 일이지만 헛된 일이라는 건 이미 체득한 바이다. 설령 자신이 망가질지 언정 어스는 인간을 사랑으로 보듬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인간만 없으면 어스도 아프지 않을 테고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나와 어울릴 수 있을 터이다.
"플루토."
또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는듯한 말투. 때때로 조곤조곤한 말투는 짜증 나게 만들었다. 단지 지금은 내 말에 공감을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화가 나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그 골디락스라는 지위가 나보다 더 중요한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결국,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 채 불만을 삼켜버렸다.
"됐어. 카이퍼대로 돌아갈래."
어스의 변명을 듣기도 전에 도망치 듯 자리를 피했다. 이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지겹지도 않게 인간을 옹호하는 어스가 미웠고 나는 또 한층 더, 인간에 대한 혐오를 쌓아올렸다.
골디락스. 생명의 요람. 생명을 품은 행성. 지구.
어스를 아우르는 모든 지칭을 하나하나 읊으며 날아오는 혜성과 운석들을 파괴했다. 낫을 꼭 움켜쥐어 크게, 그러나 날렵하게 휘둘렀다. 손쉽고 빠르게 카이퍼대로 갈 수 있었지만 응어리진 화를 풀기 위해 멀리서부터 돌아와 괜한 곳에 화를 풀고 있었다.
다시는 어스와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인간에 대한 불신이 다시 머리를 들고일어났다.
모든 건 그것들 탓이니깐.
평소에 악의를 가졌던 여러 소행성들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이때다 싶어 덤벼들었다.
골디락스라는 지위도 인간도 빌어먹을 이름 모를 소행성도 짜증 났다. 나는 평소에 억압해두었던 힘을 조금씩 풀어나갔다.
억제해둔 힘은 파도가 몰려오듯 금방 터져 나왔고, 꽤나 오랫동안 쓰지 않았음에도 무리 없이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단시간 내에 많은 힘을 쓴 탓인지 의식이 희미해지고 무엇 하나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저 수족과 같던 낫손잡이의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고 따뜻하고 끈적한 피는 역했으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고 의식은 아득히 멀어져 깊숙이 가라앉았다. 거역할 수 없는 밀도 높은 무언가, 내면에 끊임없이 차올랐다. 힘에 삼켜버렸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힘이 몸을 지배한 이상 누군가 말리거나 지칠 때까지 무의미한 살생을 해야 했다.
힘에 밀려 삼켜진 의식. 의식의 가장 밑바닥은 캄캄하다. 꿈을 꾸지 않는 잠처럼 잠잠하나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내세울 빛조차 없어 어둠은 아득하게 짙었다. 지구의 밤하늘처럼 별 하나 없는, 숨 막히도록, 짙은 암흑이었다. 어리숙하고 미숙하던, 어린 시절에는 오르쿠스가 곧잘 구렁텅이같은 암흑에서 꺼내주었고 다시는 지독하게 펼쳐진 어둠이 보기 싫어 힘을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한 후에는 없었던 일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라도 꺼내주길 바랐다. 어스가 읽어준 동화책에서는 북극성이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다고 했다. 나에게 북극성과 같은 안내자는, 없었다.
없었을 터였다.
어둠 끝에서 몇 번이고 나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길잡이가 되어 나를 이끌어, 헛디디면 끝없이 떨어질 것만 같은 암흑에서, 꺼내주었다.
흐릿한 초점에 한 인영이 잡혔다. 익숙한, 녹빛과 아우른 푸른 머리의 주인, 하나뿐인 친구가, 어스가 있었다.
몸이 후들거렸다. 두 다리는 지친 몸을 지탱하기도 힘들었으나 힘없이 넘어가는 어스를 품 안에 받아들었다. 안긴 어스의 머리카락에는 매캐한화약냄새땀냄새피비린내와 같은, 역한 냄새가 뒤섞여 났고 양복은 헤져서 엉망이었다. 어스가 잘못될까 덜컥 겁이 나 축 늘어진 어스를 안아 울었다. 참회와 힘을 억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비관 섞인 눈물, 이었으리라. 그러나 참회의 눈물은 공포에 질려 터져 나왔다. 어스는 손끝에서부터, 아스러져갔다. 바람에 실려가는 민들레 씨앗처럼. 솜털 같은 흰 씨앗은 바람에 실려 또 다른 곳에서 새롭게 피어난다고 했다. 이것이, 민들레 씨앗처럼, 새로운 만남을 위한, 잠깐에 불과한 헤어짐이라면 견딜 수 있었으나 이건 휴면처럼 단순한 것이 아닌, 영원한 이별이었다.
사라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어스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마 폭주에 휘말린 나를 말리다 핵이 깨졌을 것이다.
골디락스가 죽었다. 태양계의 자부심이 한낱 왜소행성이 일으킨 행패로 덧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나에게 보낼 야유와 손가락질은 참을 수 있다. 어스가 없었다면 일찍이 사라질 운명이었다. 어스가 있었기에 살 수 있었고, 인간들 사이에서, 134340과 같은 무기질적으로 나열된, 잊어질 이름 또한 유지될 수 있었다.
어스가 사라진 이상, 인간들이 밀어버린 산바다들판처럼 내 존재와 이름이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 것.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어스처럼 사라진 존재가 되고 싶었다. 될 수만 있다면 어스가 아닌 내가 사라지고 싶었다. 불필요한 존재. 악질적이고 추악한 것, 은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어스는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가 없다고 했으나 불필요한 것은 있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고 어스가 없는 내 세상이 그랬다.
그래서 어스가 존재하는 유일한 곳, 꿈속에 숨어들었다. 나무꽃나비하늘개울이 있고 죽지 않은 어스가 있는, 깨지지 않는 세상. 현실을 잊어버리고 그곳이 현실이 되었다.
* * *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그는 눈 앞에 있는 어스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스야?"
그의 물음은 확인과 확신를 요구했다. 어스는 대답 대신 눈을 고요히 감았다. 플루토는 빠르게 숨을 들이키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어스의 손을 잡았다. 어스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다시 한 번 이 손을 잡고 지구에 가고 싶었다. 어스와의 만남추억이별 모든 게 플래시 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플루토는 눈을 꾹 감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말하지 못한, 묻어두었던 말들을 전할 기회였다.
"죽여서 미안해… 살아서 미안해… 나를 원망해도 좋아."
"원망 따윈 한 적 없고 하고 싶지 않아."
어스를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잔상에 불구할 터인 어스의 소매가 플루토가 쏟아내는 눈물로 젖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위해 살아줘.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
자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 낸 멍청하고 한심한 연기에 무대를 끝내고 어스를 보내야 했다. 그가 바랬던,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거짓된 무대는 끝을 맞이해야 했다. 진실마저 부정하고 만들어 낸 꿈. 그리워하던 이를 보고싶다는 일념 하나로 만들어낸 거짓된 세계. 그의 세상은 끝을 향해 도달해야 했고 하늘도 그를 알려주듯, 푸르던 하늘은 어느새 노을이 저간다.
플루토가 움켜잡은 어스의 소매는 흐릿해지다 곧 바스러졌다. 말조차 되지 못하고 플루토의 입에서 나오는 애원과 비명은 덧없이 사라지는 어스를 막지 못 했다.
들판의 꽃잎과 어스와 꼭 닮은 파란 꽃잎은 바람이 내민 손에 이끌려 하늘거린다. 눈에 쏟아지는 빛은 여느 날에 보았던 햇살보다, 비현실적으로 밝아서 플루토 눈을 감았다.
빛 다음에는 어둠.
어둠 끝에는 어둠이었다.
뜬 눈앞에는 플루토가 그토록 싫어하던 어둠이었다. 새카만, 암흑.
달콤한 악몽은 잔혹한 현실을 가지고 왔다. 사방에 짙게 깔린 어둠. 꽃이 핀 들판과 풀내음과 그를 맞이할 친구는 이제, 없었다.
플루토는, 그의 모든 것이 있는,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었다.
깨고 싶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