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날씨가 좋다. 하늘은 푸르렀고, 적당하게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주위를 맴돌았다. 기분이 썩 괜찮다. 문득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11시 52분, 시간이 남아도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무엇을 해야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냥 책이나 읽기로 했다. 북카페나 가야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것저것 챙겨 밖으로 나가는 길에 만났다. 그러니까, 덜스를 말이다.

 

 

 

* * *

 

 

 

 조잘조잘, 대답도 제대로 안 해주는데 잘도 떠드는구나 싶다. 아,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하면 그렇다. 덜스와 같이 북카페에 가고 있는 중이다. 원래라면 현재 이 길을 혼자서 조용하고 느긋하게 걷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는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귓가에 울렸다. 특별히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신난 듯 발랄한 말투에 덩달아 텐션이 높아지는 기분이다. 뭐,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느낌상 그렇다는 말이다.


  조금 오래 걸었다고 생각할 무렵 시간이 날 때 마다 자주 가는 편인 작고 아담하지만 분위기가 근사한 북카페가 나왔다. 아마 나무일 것이라 생각되는 문을 조심스럽게 밀자 딸랑, 하고 경쾌한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풍기는 오래된 책과 새 책들의 향이 조화롭게 뒤섞여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 같다. 대충 구석에 위치하여 있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분위기가 좋네요, 라는 덜스의 말에 나름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마실 것을 먼저 주문하기로 했다. 메뉴판을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훑다가 간단하게 커피를 마셔야지 생각하며 앞에 있는 덜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의 끝에는 허브티들의 종류가 좌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이름들이 상당히 많아서 집중해서 쳐다보자 흠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세럴도 허브티를 마시려는 겁니까?"


  아니, 아닌데. 부정하고 싶었지만 저 밝은 표정을 보니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아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괜찮지. 그런데 아는 게 있어야지 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허브티들을 살폈다. 책으로 읽은 건 많은데 마셔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맛이 가늠이 되질 않는다. 추천하는 게 뭐야?, 하고 묻자 눈에 띄게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이것저것 짚어가며 설명을 해준다. 정말 알려줄 필요 없는 것 까지 자세히 이야기 하는 탓에 물어보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기는 한 것 같다. 

 

  "오, 그럼 저도 그걸로 하겠습니다."
  "음… 난, 레몬 그라스." 

 

 

 그렇게 시켜놓고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여러 가지 단어들이 조합되어 있는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집중하여 읽다 보니 시켰던 차가 도착해있더라.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댄 뒤에 살짝 기울였다. 약간 씁쓸한 레몬 맛이 입 안을 감싸돌았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온기가 포근하다. 아, 향이 너무 좋아서 괜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색도 곱고… 뭔가 말을 길게 늘어놓은 느낌인데 내 말을 짧게 줄이자면 그거다. 차가 마음에 든다고. 탁월한 선택에 뿌듯해하며 앞을 바라보자 덜스 또한 기쁘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덜스가 읽는 중인 책을 힐끔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꽃과 나무 같은 것들의 그림이 한 가득이다. 식물 사전이라도 읽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수 많은 그림들이지만 뭐, 확실히 예쁘기는 하다. 푸르고, 알록달록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아름답고. 그렇게 구경하고 있는데 내 시선을 눈치 챈 건지 덜스가 책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를 너무 뚫어져라 쳐다 본 탓일까. 어쩐지 뻘쭘해서 왜, 라며 이상한 질문을 뱉었다. 왜라니. 내가 쳐다봐 놓고 왜라니. 옳지 못 한 단어 선택에 민망함이 더욱 더 커질 무렵 덜스가 고개를 그저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냥요. 아, 이 꽃 참 예쁘죠?"

 

  어? 어, 응.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성의 없는 긍정 뒤에 이어진 설명들… 저 정도면 대단하다. 애매하게 시선을 돌려 뒤늦게 사진을 바라보자 여러 가지 색이지만 한 종류의 꽃으로 보이는 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다. 그러니까 저 꽃이… 페튜니아라고? 그렇게 중얼거리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 얼굴이 눈 앞에 가득 찬다.

 

  "세럴, 혹시 페튜니아의 꽃말을 아십니까?"

 

  꽃말?, 글쎄 들어본 적은 있는데. 흐음, 하고 가느다란 소리를 흘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니까… 뭐였더라.

 

  "마음의 평화, 당신과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아. 푸스스, 바람이 빠지는 듯 한 웃음소리를 그렇게 흘리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었다. 다정한 꽃말이네. 그리 말하자 덜스도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접어 미소를 지었다. 채 다 마시지 못 한 차가 천천히 식고 있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작은 미소만 있는 조용한 공간을 째깍거리는 시계소리만이 채우고 있다.
 

 

 

* * *

 

 

 

  즐거웠습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길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응, 하고 대답을 했다. 시간은 약 세 시. 슬슬 돌아가야 한다.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도 있고,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고 예상했던 것보다 적은 양의 책을 읽었지만 그래도 만족할 만큼은 읽었고, 예상 외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책을 읽는 것 만큼 즐거웠다.

 

  "다음에 또 오자."

  "음? 아. 네, 그래요."

 

  날씨가 여전히 좋다.

 

Contact Us via TWITTER @kcs91139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