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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12월에는 우리 모두가  뭔가 조용히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듯 사고 없이 평화롭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시끌시끌하지 않아서, 조용히 우리는 그저 따뜻한 장판에 몸을 지지며 그 위에 이불을 덮고, 투스가 쥔 티비 리모콘이 눌려지는 대로 멍하니 티비를 보았다. 7명이 옹기종기 모여 한 이불을 덮고 있는 동안 나와 선은 가장 멀리 떨어져있었다. 흘낏 선이 있는 쪽을 돌아다보니, 선은 프라이와 으르렁대며 세럴에게 찰싹 붙어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세럴은 모든 걸 포기한 듯 빠르게 바뀌는 티비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이 장난기 있게 킬킬대며 프라이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느껴지는 감정은 세럴에 대한 질투보다는 선이 귀엽다고 느끼는 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너가 있으면 세상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다. 프라이는 그게 사랑이라고 말했었다. 간질간질한 어감에 입을 다물었지만 곧 내 볼에 붉은 꽃이 피어났었다.

 

 선에 관련된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아마 불가항력으로 일어나는 나의 본능 인 것 같다. 너로 인해서 생각이 이루어지고 머리가 채워지고 감정이 생성되고. 시야도 한정되고, 보면 가슴이 뛰고,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해서 가슴에 손을 얹으면 가벼운 진동이 느껴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너를 보아온 시간이 벌써 몇 백년 몇 세기인데. 하지만 언제나 처음처럼 미소가 지어진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새롭게 하루하루가 시작되는 것처럼 너를 그리는 마음도 새롭게 하루마다 태어나는 것 같았다. 그 수 많은 해들을 하루같이. 새롭게 좋아하고 있었다.

 

 일 년이 가기 전 마지막 한 달을 남기고 나는 여전히 순수하게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

 

 밤의 달이 반달을 그렸다. 상현달은 벌써 한참을 흘러버린 시간을 나에게 자각시켜주었다.

 

 고백하겠다고 생각한 건 올해 초였다. 오랜 시간을 잠잠히 혼자 좋아하기만 하다가, 결국 고백을 결심하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이었던 것이다. 올해 초에 여느 때처럼 프라이와 선과 세럴이 새해 쇼핑을 갔었다. 그리고 그 셋을 중심으로 프라이의 성화에 못 이겨 투스, 웬즈, 덜스, 나도 다 같이 결국 쇼핑을 가고 말았다. 그리고 문득 다정하게 서서 그 날의 점심거리를 사고 있는 세럴과 선을 보았을 때 짜증이 치밀었다. 와락 화가 나서 결국 둘 사이에 끼어들어가 오늘 저녁은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좋겠다고 훼방을 놓고 말았지만, 그걸로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잠자코 살아온 수백 년인데 괜히 요즘 들어 선의 옆자리가 탐이 났고, 선과 함께 오랫동안 있고 싶었다. 수백 년을 잠자코 살았는데! 이게 뭐지? 하고 떠올림과 거의 동시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질투하는 건가? 내 오래된 생활은 질투라는 단어와는 정말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는데. 물론 당연히 평소에는 선이 귀엽고, 그녀의 환한 빛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나는 한참 달라졌다. 소심하게 시작된 감정이 결국 몸을 비집고나와 행동으로 발했다. 하나 둘 너의 행동과 너의 시간이 탐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너를 탐내기 시작하며, 언제나 너의 곁을 그리게 되었다. 처음엔 망설였다가, 다시 네 손이 그리워졌고, 또 다시 망설이다가, 네 웃음이 그리워졌고, 다시 망설였다가,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그리고 이제 당당하게 너의 곁에 설 수 있도록, 나는 고백을 결심하게 되었다.

 둥근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달이 두근거리는 먼의 마음을 대신했다. 먼은 아주 오랫동안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상징하고, 그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달을 배경으로 선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티끌 없이 하얗게 빛나는 달은 완벽한 고백을 만들어주기에 최고의 매체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를 향한 마음이 종지부를 찍을 오늘을 마음에 품고 먼은 해바라기를 준비했다. 이번 여름 어느 날 놀러갔던 해바라기 밭을 거닐던 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양을 곧게 바라보며 피어나는 해바라기는 태양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활짝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곳에 있던 모든 해바라기는 저 하늘에서 강한 빛을 뿜어내던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지막 해바라기는 태양보다도 환하게 빛나던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만의 태양이었다. 옆에서 무엇이 빛나고 있다 해도 그녀보다 환하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태양이 없으면 꽃이 지고 생명을 다해야만 하는 운명에 순응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양에게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원한다면 별도, 달도, 그리고 자신의 심장까지 바칠 수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오늘의 프로포즈는 그에 비하면 조금 소박했다. 해바라기 한 송이가 노란 베일과 갈색 구김지로 멋스럽게 싸여 그의 품에 안겨있었고, 그의 앞에는 그녀가 며칠 전 백화점에서 눈독을 들였다가 결국 가격문제로 포기하고 만 귀걸이 한 쌍이 가지런히 담긴 작은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주머니에 그가 며칠 전부터 애지중지 아끼고 아껴온 작은 반지상자가 있었다. 아직 사귀거나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라서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미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런 마음으로 그는 성급하더라도 이 반지를 샀다. 비싼 다이아몬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태어난 생일이나 별자리에 맞춰서 보석을 살 수도 없는 것이 태어 난지도 너무 오래되어 언제 태어났는지, 무슨 별자리인지 그들의 수호성들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거치는 8월을 골랐다. 가장 해가 높게 떠있기도 해서 실제로 선이 가장 좋아하는 달이었다. 8월의 탄생석은 페리도트. 이 보석의 뜻이 부부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얼굴이 화닥닥 뜨거워졌지만 결국 그는 페리도트가 작게 박힌 반지를 샀다. 보석을 은이 화염처럼 감싸 오르고 있었다. 태양이 내린 보석이라. 실제로 그녀는 태양이 내린 보석이 맞으니까. 바닥에 선물들을 늘어놓고 그는 무릎을 꿇어보았다. 하나하나 뜻과 추억을 생각하며 소중히 고른 선물. 내일은 그녀와 데이트라는 이름으로 쇼핑갈 수 있을까?

 

 현관 종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세럴과 쇼핑을 나갔던 그녀가 돌아왔다. 먼이 급하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지금 막 현관문에서 들어오는 둘이 보였다. 세럴 역시 추워하는 것이 보였지만 먼의 눈에는 추위에 빨갛게 언 선의 코와 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급하게 부엌에서 따뜻한 수건을 가져다가 선의 손을 감쌌다. 선의 손 역시 하얗게 질려있었다. 하지만 얼굴만은 행복함을 가득 품고 있었다. 고마워 먼충아! 하지만 이미 먼의 행동은 멈춰있었다. 두 손을 수건으로 감싸며 보았던, 선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그것. 그것이 세럴의 똑같은 손가락에도 끼워져 있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페리도트를 화염처럼 휘감은 반지가 형광등 빛을 반사해 날카롭게 먼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분명 나에게 싫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좋아하는 마음도아니라는 걸 납득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납득하는 과정에서 나는 쓴 고백의 실패를 맛본 것일 뿐이었다. 결혼을 거창하게 올리기보다는 앞으로 얼마를 더 살아갈지 모르기에, 그저 사랑이 변하지만 말자고 언약하며 나눈 상징이라고 했다. 그리고 선은 그 이야기를 나에게 달려와 자랑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네 말보다는 내 옆에 너가 달려와 앉은 것에 더 정신을 빼앗겨 있었다. 넌 네 왼손을 쫙 펴서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한 때 내가 골랐던 디자인의 반지가 네 손가락에서 그 자태를 뽐냈다. 적어도 내가 주려고 했던 것 역시 네 손가락에는 잘 어울렸겠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다.

 창 밖에서 묵직하게 내려앉은 하현달이 하늘의 끝자락으로 떨어져가고 있었다.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눈도 올대로 왔고, 시간도 많이 흘렀다. 내 고백은 나의 마음속에 잠겨 평생 동안 한 켠에 쌓일 예정이었다. 네 환한 웃음에 잘 어울리던 해바라기도, 네 탐스러운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던 귀걸이 한 쌍도, 네 하얀 손가락에 잘 어울리는 반지 하나도 같이 쌓아두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중 그 누구의 발치도 닿지 못할 먼 곳에 해바라기를 으깨어 놓고 귀걸이를 부숴버렸지만. 하지만 나의 주머니에는 반지 하나가 남아있었다. 고백하고 싶었던 그 날부터, 너가 세럴의 고백을 받은 그날에도, 그리고 세럴과의 약속을 자랑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마지막 미련을 어떻게 놓아주어야 할 지 답답했다. 이것이 나한텐 너였으니까, 너를 놓으면 나도 놓아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반지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크게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사라진 달의 절반 이상은 지구에서 바라보기엔 텅 비어있었고, 그날 밤 텅 빈 건 지구의 밤하늘만이 아니었다. 멍하니 달을 바라보는 먼의 마음은 베어 물었다기보단 누가 들어낸 듯 한 아픔이었다. 남아있는 잔해의 뜯겨나간 절단면이 마치 쥐가 갉아먹은 듯 너덜너덜하게 되어버렸다. 기분 나쁘게 움켜쥐고 배려 없이 무자비하게 뜯어낸 반 이상의 마음의 조각은 아마 스스로 자신의 자리인 그녀의 옆으로 돌아갔으리라. 강에 비춰진 그믐달이 한 달의, 그리고 일 년의 마지막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다리 위에 올라선 먼의 그림자는 달빛을 받아 노랗게 발했다. 노란색으로 도로위에 번져나가는 그림자가 먼을 삼켜 그는 어둠에 몸을 숨겼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한때 태양에게 주고자 했던 작은 반지. 반지는 그의 손 안에 힘없이 놓여있었다. 먼은 팔을 뻗어 손을 뒤집었다. 중력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금속덩어리가 물에 떠오른 그믐달을 흔들어버렸다. 그리고 곧 갈색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휘날리다가, 그가 자초한 바람에 굴복해 얌전히 눕히고 말았다. 세상을 수직으로 바라보게 된 먼이 마지막으로 보고 만 것은 검은 밤하늘에 그려진 그믐, 그믐달과 흩날리는 올해의 마지막 눈. 수면의 달이 일렁이는 파도에 질식해 사라졌다. 물과 둔탁한 몸이 부딪혀 나는 소리는 잔인할 정도로 빠르게 어둠에 먹히고 말았다. 눈을 감은 달이 강으로 가라앉는 순간에, 달은 마지막으로 태양을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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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가 가기 전에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게 11개월 전 올해 1월 이었다.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은 딱히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고백하고 싶었다. 그 시간들은 흘러서 12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올해의 마지막 달이었다.

 

 고백하고 싶었다.

마지막 시간

*북반구 기준

초승달 : 순결한 푸르름

상현달 : 날카로운 불굴의 의지

보름달 : 완벽

하현달 : 녹록지 않은 무상함

그믐달 : 애절한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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