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 * *
흐흥-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자신의 웃음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프랑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달콤한 기회. 놓쳐선 안 되고 놓칠 수도 없는 소중한 기회. 그렇기에 프랑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방해하는 자는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제 사랑을 방해하는지는 몰라도 그대로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저가 얼마나 열심히 데이트 준비를 하고 잘 해보려 노력하는데 초를 쳐? 첫 데이트부터 아주 그냥……!
“어? 첫 데이트?”
“응? 뭐 짚이는 거라도 찾았니?”
가만히 기다리기가 지겨워 커피 두 잔을 내려온 너스가 느닷없이 터진 프랑의 의문 섞인 음성에 반갑게 운을 띄웠다.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한 번, 두 번 끄덕이던 고개가 세차게 몇 번 더 끄덕여졌다.
“첫 데이트!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자꾸 생겼어. 누군지는 여전히 모르겠는데, 그, 왜 내가 기한 받은 뒤에 처음 한 데이트부터 그런 건 확실해.”
“흠- 사정을 다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희 둘이 이어지는 게 싫은 건 맞는 것 같네.”
너스의 말에 공감한 프랑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손끝으로 입매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니, 그전에.
“고마워 누나. 누나가 아니었으면 쓸데없는 삽질로 아까운 시간만 썼을 거야.”
“별말씀을- 그것보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니?”
“이렇다-하고 생각나는 건 없지만, 누군지를 모르니 스스로 나타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지.”
이번에는 너스가 프랑의 말에 공감해 느릿하게 고갤 끄덕였다. 도움은 필요 없니? 머릴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는 그녀에게 프랑은 필요하면 말하겠다며 마주 씩 웃어주었다.
* * *
룸 카페의 방 하나를 잡은 두 사람 사이는 조용했다. 방음이 잘 된다는 곳을 골라와 편하게 과제 하자는 심산이었으니 정적이 감돌만도 했다. 그나마 생동감을 부여하는 소리라곤 종이가 팔랑거리는 소리, 무언가 쓰느라 나는 소리, 그리고 타자 소리뿐이었다. 연이어 이어지던 타자 소리가 어느 순간 멈추고 프랑이 세럴을 불렀다. 이거 좀 봐 주세요- 그의 부름에 옆으로 간 세럴은 천천히 화면의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흠- 스크롤이 바닥에 닿고 내용이 끝난 뒤에도 둘 사이에 조금 더 침묵이 유지되었다. 음, 수정할 곳이 있어. 네? 프랑의 반문에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봉투 형태의 파일을 꺼내어 그대로 넘겼다. 넘겨받은 파일을 한 번, 세럴을 한 번 보던 프랑이 조심스레 파일을 열어 그 안에 든 종이들을 한 번에 꺼내어 살폈다.
“세…럴씨…? 이…이게…!”
“그것 봐, 수정할 곳이 있지?”
프랑의 말을 자연스럽게 자르고 들어온 그는 노트북을 가까이 끌어당겨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 꺼낸 종이에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 프랑은 글자에서 단어, 단어에서 문장이 되는 것을 읽어가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좀 더 빨리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세럴에 대한 원망 반, 지금껏 일찍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 반으로 속에 열기 같은 것들이 그득히 차올랐다.
“죄송해요. 미안해요.”
“뭐가- 이렇게 봐주려고 일부러 같이 과제 하는 거잖아?”
그 부드러운 음성을 들으며 화면에 적히는, 괜찮으니 조심하자는 문장에 고갤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화면에 띄워진 저가 적은 내용과 손에 들려진 종이가 주는 갑갑함에 결국 크게 숨을 한 번 쉬었다. 과제 대신 데이트마다 일어났던 이상한 일과 그 시작 시기가 정리되어 적힌 창을 두고 새 창을 띄운 프랑은 거기에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적었다. 탁, 타닥, 타닥탁탁- 이상하다는 걸 좀 더 빨리 눈치 챘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그렇게 적히는 문장을 보던 세럴이 고갤 저었다. 타닥, 타다닥- 괜찮다고 했지? 네 잘못이 아니잖아. 후회는 그만하고 방법을 찾자. 그 문장에 프랑은 고갤 두어 번 끄덕인 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핥았다. 프랑의 끄덕임을 본 세럴은 내용 정리가 된 창을 다시 띄운 뒤, 타자를 하느라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바로 하며 팔짱을 끼곤 생각에 빠졌다. 프랑은 화면을 보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들을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종이에는 여러 곳에서 잘라온 글자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고 있었고 그 내용은 명백히 협박을 담고 있었다. 그와 만나지 말아요, 그와 함께 웃고 있지 마요, 그와, 그와, 그와- 그렇게 시작한 내용은 내 손으로 당신을 아프게 만들지 말라는 식으로 끝을 맺었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 가장 최근에 왔다는 종이에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고, 마지막이라는 문장으로 끝이 났다. 최근에 왔다는 그 종이를 보던 그가 노트북으로 다시 타자를 했다.
[집에 아무 일도 없어요? 설마 도청장치 같은 거라던가]
[응, 없어. 안 그래도 마르스 형이 와서 살펴봐 주시고 가셨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셨어.]
“네?! 언제요? 형은 왜 아무 말도 안 해 주ㅅ……!”
급작스레 외치는 프랑의 입을 급히 막은 세럴이 쉿, 내가 이야기한다고 하지 말라고 했어-하고 나직이 속삭였다. 방음 잘 되는 거 같지만, 혹시 몰라서 조심하자 더니- 작게 한숨 한 번 쉬고는 조심히 손을 떼자 숨을 내쉬며 입을 꾹 다무는 모습에 세럴은 저도 모르게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세럴씨? 작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였으나 용케 잡아내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봐 오는 시선에 화들짝 놀라며 고갤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급하게 노트북에 손을 올리고 타자를 해 나갔다.
[이제 어떻게 할까? 최근에 온 걸 보면 곧 나타날 것 같지?]
궁금증을 해결하고는 싶지만, 급한 일이 먼저니 그대로 넘어가기로 한 그는 화면을 보고 고갤 끄덕였다. 평소보다 더 친근하게 붙어서 데이트하면 알아서 나타 날거라 생각해요. 적힌 글자를 읽고 동의의 뜻으로 끄덕여진 고갤 본 프랑은 곧장 세럴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이거 수정만 하면 되니까, 끝나고 데이트할래요?”
“그게 처음부터 목적이었지?”
“아시면서~”
능글맞게 씩- 웃는 얼굴을 보며 웃고는 짐 정리를 시작해버리니, 프랑도 급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끝난 세럴이 방을 나서버리자 더 마음이 급해진 그는 정리고 뭐고 대충 욱여넣고는 쫓아나갔다. 복도 끝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고 쫓던 프랑은 순간 보이는 장면에 인생 최고로 빠르게 달려가 세럴을 안고 몸을 틀었다. 품에 안긴 세럴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 눈만 끔뻑거리다 프랑을 떼어내곤 상황을 살폈다. 등과 다리가 라면 국물로 흥건히 젖은 프랑과 쏟아진 라면의 주인이 쩔쩔매는 상황. 사고? 그렇게 넘기기에는 프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주변을 날 선 눈으로 빠르게 훑고 나서야 다정한 눈으로 돌아와 저를 보는 시선을 당혹과 의문이 뒤섞인 시선으로 마주 봤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요? 그렇게 묻는 걱정이 묻어나는 다정한 음성에 우선 고개를 저은 세럴은 어떻게 된 거냐고 조용히 물었다.
“잠시만, 저기 옷이 두께가 있어서 다치진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혹시 누가 밀거나 치고 지나가지 않았나요?”
“네, 네! 맞아요. 가져가는데 갑자기 확 밀듯이 치고 가서…… 너무 갑작스러워서 누군지 보지도 못했어요.”
라면 주인이 더듬더듬 건네는 말에 세럴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프랑은 대충 일을 마무리 짓고 급히 세럴을 데리고 카페를 나왔다. 프랑, 이거- 세럴씨 쫓아가는데 누군가 치고 지나갈 것처럼 확 지나가서. 세럴씨 다칠까 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괜찮아서 다행이라며 웃는 프랑의 얼굴에 세럴의 표정이 더욱 나빠졌다.
“그럼 너는? 오늘 나보다 네 옷이 더 얇다고. 난 코트지만 넌 카디건이잖아.”
“두꺼운 카디건이라 괜찮아요. 저보다 세럴씨가 다치는 게 더 아파요. 좋아하는 사람인 걸요. 아, 이건 고백한 건 아니에요!”
혹시라도 한 번뿐인 고백의 기회를 날릴까, 다급히 외치는 프랑에 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세럴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먼저 프랑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옷 사러 가자- 그 상태로 돌아다니는 건 그렇잖아?”
“쇼핑부터인가요? 좋아요!”
금세 저가 앞서나가며 손을 잡아오는 프랑을 바라보며 세럴은 미소 지은 얼굴을 하고서 뒤따라갔다.
* * *
세럴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 사이로 노을빛이 내려앉았다. 오늘 하루 뭘 했지. 지쳐버린 심신을 달래며 겨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상시 프랑이라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길 하며 쉼 없이 떠들고 분위기를 띄웠을 텐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 세럴은 흘끗 프랑을 쳐다봤다. 적어도 자신의 앞에서는 텐션이 높은 편이라 웃음기가 사라졌을 정도의 지친 얼굴은 처음이었다. 새벽 촬영이 있는 날에도 웃는 얼굴이었건만. 그래서인지 조금 신기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룸카페를 나오기 전에 있었던 사고는 별거 아닌 것처럼 반나절, 아니 서너 시간 동안 시달린 게 너무 많았다. 옷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더니 마네킹이 눈앞에서 쓰러지질 않나, 장 보러 갔더니 쌓여있던 물건들이 쓰러 지지 않나, 가게에서 나오는 순간 자전거가 지나가질 않나, 등등. 대체 얼마나 많은 일을 당했는지 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빠르고 불시에 당하는 일에 저지른 이의 그림자조차 확인하기 어려워 결국 남은 건 놀란 마음과 긴장으로 인한 피로였다. 거기에 거의 모든 일이 두 사람에게 일어나는 척하면서 세럴을 향해있었던 탓에 그의 정신은 너덜너덜할 정도로 피곤에 절여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미안하기는 얼마나 또 미안한지. 저에게 향한 일들을 프랑이 죄 막아준 덕에 상처 하나 없는 자신과 달리, 그의 얼굴과 손엔 반창고가 붙어있고 팔에는 잘못 찢어진 상처를 꿰맨 덕에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미안. 내가 좀 둔해서."
"네? 아- 괜찮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세럴씨가 그러면 난 더 아파요- 그냥 고맙다고 해주면 안 되나? 반하면 더 좋고."
기운 없이 이미 몇 번이고 한 사과를 또 건네는 그에게 프랑이 능청스레 대답했다. 하여간-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진 세럴이 마찬가지로 능청스레 맞받아 쳐줬다. 그건 안 되겠는걸? 어째서! 너무해요! 그 말은 마냥 장난으로 넘기지 못하겠는지 금세 울상이 되어버린 얼굴에 결국 그는 말간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만 말고요! 전 진지한데!”
“그거 대답해달라는 뜻이야?”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니 그래도 그게-”
아, 다 왔네? 쩔쩔매던 프랑은 세럴의 타이밍 좋은 한 마디에 팔을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한 번 폭 쉬었다. 저 놀리는 거 재밌죠? 너야말로 나한테 장난치는 거 재밌지? 잠시 시선을 맞춘 둘은 결국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내가 너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먼저 가-”
“전 괜찮아요! 세럴씨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아냐. 내가 데려다주겠다고 한 것도 거절했잖아. 이건 받아줘.”
그의 단호한 말에 결국 물러선 프랑이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돌아서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한 걸음 걷고 돌아보고 다음 한 걸음 걷고 돌아보고, 그다음 한 걸음 걷고 돌아보고.
“프랑, 어서 가. 해 다 지고도 내가 집에 못 들어갈 거 같잖아-”
영- 가지 못하는 그 모습에 결국 세럴이 팔짱까지 끼고서 한소릴 했다. 차마 웃음을 숨기진 못했지만, 효과는 있었는지 점점 프랑의 모습이 멀어졌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금발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그제야 세럴도 발걸음을 돌렸다. 아파트 입구를 통과하고 천천히 늘 걷는 길을 따라 1층 현관에 도착한 그는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맞게 들어간 비밀번호에 자동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편함에 우편물이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이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면 평소와 다름없을 귀갓길이었을 터였다. 우편함에 어렴풋이 반사되어 보이는 자신의 뒤쪽에, 무언가 검은 것이 일렁인다고 여긴 순간 누군가가 세럴을 덮쳐왔다. 곧장 목을 조르기 위해 뻗어온 손에 소리칠 틈도 없이 겨우 손목을 붙잡아 조르는 것을 저지시켰다. 한 번은 막았지만, 저보다 키도 크고 힘도 좋은 사람을 상대로 오래 버티기엔 무리가 있었다.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 검은 옷. 온통 검은 남자가 드러낸 곳이라곤 마주하고 있는 눈뿐이었다.
“흐읍……!”
등줄기를 타고 지나가는 오싹함에 순간 숨을 멈춘 세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주하고 있는 눈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정말로 저를 죽이려는 거구나. 몸서리치게 느껴진 순간 바르르 떨리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프…프라앙!!!!!”
정말로 살고자 외쳤다. 닿을지 말지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절실히, 지금 당장 생각나는 한 사람만을 줄기차게 외쳤다. 그의 외침에 검은 남자가 동요해 흔들린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빠르게 시야로 들어오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빠르게 들어온 무언가가 주먹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저를 죽이려 달려든 남자가 쓰러진 뒤였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리는 시선을 옮기자, 거기엔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금발이 있었다. 안도감이 몰려와 그 이름을 불러 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소릴 내보려 해도 영 나오질 않으니 답답함에 마른 침을 삼키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고갤 돌린 프랑과 시선이 마주쳤다.
"다친 곳은 없어요?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남자를 볼 때의 살벌한 얼굴은 어디 가고 걱정과 다정함이 가득한 얼굴로 이리저리 살피더니, 여전히 몸을 잘게 떨고 있는 세럴을 끌어당겨 조심스레 안고서 다독였다. 쉬-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 다정한 음성과 따뜻한 온기에 서서히 떨림이 잦아들어 갔다. 너무 놀랐고 너무 무서웠고, 그래서, 그래서, 몸이 너무 떨리고, 혼자서 서 있으려니 힘들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프랑의 품으로 파고들며 세럴은 스스로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평소와 다른 저의 행동을 합리화해버렸다. 프랑은 점점 더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세럴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품을 내어주며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다친 곳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데-
"ㄴ…너…!!"
겨우 주먹의 충격에서 벗어난 남자가 짧은 외침과 함께 비틀대며 일어났다. 살의와 분노에 가득 찬 눈이 두 사람을 향하자, 프랑이 세럴을 숨기 듯 머리까지 팔로 감싸 안았다. 프, 프랑…! 자연스럽게 감싸는 행동에 이대로는 또 프랑만 다치는 상황이 될 거란 판단이 선 세럴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그렇다고 놓아줄 프랑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단단하게 끌어안고 바쁘게 머릴 굴렸다. 무슨 영화나 만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남자와 힘 차이가 뚜렷할 만큼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상태가 좋지 않은 세럴을 지키며 버텨야 하는 상황. 상대가 몸 사리지 않고 죽이려 달려드는 이상 적당히 피하고 막으며 시간 끌기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싸우는 척 밖으로 끌어낼까?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프랑이 머릴 굴리는 사이, 두 사람의 모습에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던 남자가 막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ㅇ, 어? 악!!"
"와, 역시 피터야. 틈도 없이 깔끔한 걸★"
"잔말 말고 신고부터 해."
적당히 봐주는 것도 없이 벽으로 내쳐지듯 몰아붙여 져 제압당한 남자가 소릴 지르며 발버둥을 치든 말든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에 프랑이 허-하고 다소 김빠지는 소릴 내뱉었다. 도리어 태연하게 신고나 하라며 새턴을 타박하는 모습이 걱정할 필요조차 없어 보여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아슬했지만 때마침 등장한 두 형님에 프랑의 입에서 크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와 함께 프랑의 품에서 벗어난 세럴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끝났다는 생각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부러 평소보다 더 다정히,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데이트해서 자극하면 나타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뒤 프랑이 집으로 가는 척 다시 돌아와 숨었다가 나타나면 잡겠다는 계획. 거기에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때맞춰 집에서 대기해주기로 한 형들께 프랑이 저가 집으로 향했다는 연락을 한 후 들어오지 않으면 바로 내려와 달라고 부탁까지 해두었다. 이렇게 끌어내 잡겠다는 단순한 계획이었지만 그게 지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될 줄이야. 여전히 바르르 떨리는 손을 맞잡고 제 형이 얼굴이나 보자며, 남자의 모자며 마스크를 벗기고 응징 아닌 응징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차게 식은 손에 온기가 닿아왔다. 온기의 주인을 보니 씩 웃으며 따뜻하죠? 그런다. 그 웃음에 남은 불안마저 싹 날아가 버린 세럴은 미소를 슬며시 띄웠다. 응, 그러네-
"너네 뭐하니? 그러고 있지 말고 세럴, 너는 집으로 들어가고 프랑은 병원부터 가. 이 뒷일은 일단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다가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새턴의 말에 세럴이 의아한 표정을 띄웠다. 병원? 더군다나 의아한 표정을 지은 건 프랑도 마찬가지인지라 둘은 말을 꺼낸 새턴만 맹하니 쳐다봤다. 이상한 곳에서 닮은 둘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그는 프랑의 팔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팔을 보니 피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자리를 보니 꿰매고 온 팔의 상처가 터져버린 듯했다. 눈에 들어오고 나니 그제야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한 프랑이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했다. 아픈 걸 알면 지금 굳어져 버린 얼굴보다 더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을 것을 뻔했고, 프랑은 그런 세럴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불편하답시고 숨어있는 동안 새로 산 코트를 벗어 던졌던 몇 분 전의 자신에게 주먹을 날려버린 그는 급히 세럴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자자, 세럴씨는 집에 들어가세요! 알아서 병원 갈 테니까!"
당황해 저를 부르는 음성을 무시하고 그대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밀어 보낸 프랑은 잽싸게 도망치듯 그 자릴 벗어났다.
* * *
천천히 걷는 두 사람 사이로 어제처럼 노을빛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다만 어제와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의 공기가 감돌았다. 약간 무거우면서도 어딘가 어색하기도 한 침묵. 부러 공원을 둘러가는 길을 골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지만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간만이 흘렀다. 그래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할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분명 조금 전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이겠지.
어제 일 이후로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쉬고 있던 두 사람은 조피터의 연락에 새턴과 함께 경찰서로 찾아갔다. 가자마자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흥분해서 소리치듯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오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보고 싶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중얼거렸다고 했던 남자는 함께 들어오는 둘을 보며 세럴에게는 욕이며 악담을 프랑에게는 애원의 고백을 정신없이 하기 시작했다. 숨넘어갈 듯 발악하는 남자에 둘은 결국 서 밖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와 버렸다. 근처 카페에서 정신을 수습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새턴에게서 연락이 왔다. 진상은 간단했다. 프랑의 스토커였던 남자는 자신의 경고에도 세럴이 프랑과 멀어지지 않자 세럴을 죽이기로 했다는 것. 세상에 이상한 사람 참 많다며 한숨 쉬는 세럴과 달리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고갤 푹 숙이며 사과를 건넨 프랑의 입은 그 뒤로 꾹 다물렸다. 지금도 그게 신경이 쓰이는 지, 내내 기운 없는 모습으로 생각에만 빠져있는 그를 흘끗흘끗 보던 세럴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프랑? 나 정말 괜찮아. 네 탓 아니잖아- 그 사람이 이상한 거야."
"네? 아, 네. 그래도, 제 일에 세럴씨가 피해를 본 거니까 죄송해요."
저도 좀 전에 말했던 위로를 건넸다지만 똑같은 말로 다시 사과하는 프랑에 세럴의 머릿속이 급해졌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하면 기분이 풀릴까- 세럴이 항상 끌려다니긴 했으나, 알고 보면 프랑이 세럴에게 최대한 맞춰주었다. 반대로 세럴이 프랑의 기분을 풀게 해준다든가 맞춰준다든가 한 적은 없었으니, 처음 하는 일에 그는 머리가 아파져오는 것을 느꼈다. 프랑은 잘도 저에게 맞춰줬네- 싶었다.
"주말에 시간 있어? 어디든 놀러 가자. 음, 1박도 괜찮고."
저와 1박으로 여행 가는 것을 프랑이 절대 싫어 할 리가 없다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오만한 그 생각을 믿고 넌지시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놀라면서도 점점 상기되는 얼굴로 연신 정말요? 하고 물어오는 그에 세럴의 고개가 몇 번이고 끄덕여졌다. 응, 정말- 괜찮지? 네! 물론! 무조건 괜찮아요! 신나서 대답하던 프랑이 세럴의 작은 웃음에 잠시 멈칫했다. 왜 그래? 어색하게 뚝 멈춰버려서 이상함을 바로 알아차리곤 묻자, 입을 꾹 다물곤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멈춰서 가만히 마주 보니 언젠가 본 적 있는 진지한 얼굴이 프랑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세럴씨는 참 다정해요. 제가 세럴씨와 그냥 친구였으면, 어쩌면 그 정도의 관계였으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때 제가 친구 하자고 받아들였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원망 하나 없고-"
"아니,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친구였어도 겪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긴 하지만- 아니, 이런 일을 겪고도 연말까지, 제가 고백할 때까지 싫을지도 모르는 데이트를 먼저 하자고 말도 해주니까 그래요."
딱히 데이트라고 생각하고서 한 말은 아니었으나 프랑은 당연하게도 데이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데이트든 뭐든 세럴은 프랑을 만나는 거 자체가 절대 싫지 않았다. 싫은데 만날 리가. 프랑과의 인연은 이 정도의 일로 타격 받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로 그에게 있어 소중하고 계속 이어가고 싶은 좋은 인연이었다. 그래서 세럴은 지난여름, 프랑이 고백하기도 전에 친구 하자고 했던 것이었다. 고백한 뒤 저가 거절하면 프랑이 친구의 관계마저 정리할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그게 싫어서 냉큼 그렇게 말했던 거였다. 그런데도 제안을 받아들인 건 프랑의 얼굴이 본 적 없던 진지한 얼굴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절실해 보여서. 지금처럼. 그래, 지금이 딱 그런 얼굴이라, 세럴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 잠시 시선을 내리며 괜스레 목도리를 두어 번 매만졌다.
"고마워요, 세럴씨. 좀 갑작스럽지만, 더 시간 끄는 것도 무의미할 것 같고. 거창하게 준비한 것도 없고 흔한 꽃다발에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준비한 게 없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요. 세럴씨가 받아 주지 않아도 친구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거 걱정했죠?“
세럴이 가장 신경 쓰는 것과 긴장하고 있는 걸 전부 알아차리고는 더 긴장했음에도 씩 웃으며 분위기를 유연하게 바꿔버렸다. 그 재주에 새삼 감탄한 그는 조심스레 다시 프랑과 시선을 맞췄다. 여기서 저가 고백을 거절해도 괜찮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였다. 여름 때처럼 걱정할 필요가 없어져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왜 입은 안 떨어질까. 프랑과 계속 이대로 친구일 수가 있는데 왜 망설이고 있는 거지? 자신에게 계속해서 그런 질문을 던지다가, 눈을 감으며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거로 질문을 멈췄다. 몇 번을 해도 결국 같은 답이 나올 질문을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답이 뭔지는 아는데, 받아들이는 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이번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한 번 던진 그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하고 있던 목도릴 조금 풀어냈다. 프랑이 고갤 숙이면 이마가 맞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풀어낸 부분을 프랑의 목에 감아주었다. 꽤 긴 목도리라 무사히 감긴 것을 확인한 세럴은 고개를 살짝 숙인 그대로 의아해하는 프랑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이 정리된 말을 건넸다.
“이렇게 이어져도 괜찮을 거 같아.”
그 조용한 대답에 프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그러니까, 바, 받아, 주신다고요? 헛것을 들었나 싶어 더듬더듬 물으니 눈앞에서 그 작은 머리가 약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서서히 노을빛이 번지듯, 프랑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너무 기쁜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네 표정에 다 나왔으니까 괜찮아.”
저를 좋아함에서는 꾸밈 하나 없이 솔직한 그 모습에 결국 세럴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맞닿은 이마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노을의 빛깔만큼 따스했다.
연애 좀 하자.
*현대버전에 맞춰 우공 이름을 따왔습니다!
ex)비너스-보너스/프라이-보프랑
몇 번의 마찰음과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발소리와 함께 프랑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렴- 잘 발려진 네일을 뿌듯하게 쳐다보던 너스가 프랑의 등장에 곧장 시선을 그에게로 옮기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의 인사에 평소처럼 밝게 인사하는 대신, 프랑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그대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아- 깊은 한숨 소리가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오고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하자, 너스는 웃으며 흔들던 손을 조심스럽게 내리고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음- 조심스레 운을 뗀 그녀는 그것보다 더 조심스럽게 사랑스러운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프… 랑…? 무슨 일… 있는 거니?"
그 조심스러운 말에 들썩거리던 어깨와 떨리던 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게… 그게… 그렇게 말을 꺼내며 점점 몸을 숙이던 프랑이 어느 시점에서 다시 멈추더니, 천천히 숙이던 것과는 달리 빠르게 고갤 홱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그녀가 나타난 프랑의 얼굴을 살피니, 행동과는 다르게 울지는 않았다. 울 것만 같은 얼굴이라는 게 문제지만. 그러면서도 웃는 듯 애매한 얼굴에 너스의 표정에 더욱 의문이 서렸다. 그에 답하듯 프랑의 입이 열리며 울음기 섞인 음성이 툭- 튀어나왔다.
"망했어- 완전 망했어, 누나아-!"
흐헝헝-하고 소리로 울며 웃는 얼굴을 해버리는 그를 보며 아-하고 너스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도 망쳐버린 모양이었다. 세럴과의 데이트를. 그것도 오늘은 꽤 무참히 깨져버린 건지 영 상태가 좋지 않은 그에 너스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쩌면 좋니-
"이쯤 되면 그냥 이루어지지 말라는 거 아닐까? 세상이 나 싫은가 봐. 아무리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지만 이런 식일 수는 없는 거잖아. 왜 매번…! 포기하라는 걸까? 응? 응?"
"자자- 프랑, 진정하고. 어떻게 된 건지 말해보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니? 응?"
흥분해서 우다다- 쏟아내는 그의 옆자리로 옮긴 너스가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이며 차분하게 물었다. 그 다독이는 손길과 차분한 음성에 서서히 감정을 가라앉힌 프랑은 다시 한 번 심호흡과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풀어냈다. 우울함이 잔뜩 서린 음성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너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프랑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적당히 무난하게 시작해서 좋은 분위기로 잘 흘러간다고 여긴 순간 뜻하지 않은 사고의 발생으로 데이트가 끝났다-였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을 만큼 몇 번이고 반복된 패턴에 너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음- 저기 프랑? 좀 이상하지 않니?"
"으엉?"
"고의… 인 것 같은데?"
원래 계산이 빠르고 머리 회전이 잘 되는 똑똑한 제 동생이지만 감정적인 면이 있는 탓에 흥분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너스는 잘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핵심을 콕 집어준 말에 그제야 진정이 되고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인지, 프랑의 표정이 맹한 얼굴에서 서서히, 빠르게 바뀌었다. 입이 꾹 다물리며 시선은 아래로 내려가 탁자에 고정된 모습에 그녀는 잠시 생각할 수 있게 조용히 기다렸다. 그 사이 프랑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흥분한 탓에 ‘이상함’을 여태 눈치채지 못한 어리석음을 탓하며 계속해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언제였을까, 어디서부터 그랬던 거지? 조금 거슬러 올라가다가 생각보다 더 오래된 것 같은 기분에 그는 아예 처음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 * *
처음. 세럴과 만난 처음. 그날은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날이었다. 적당히 게임에 응하고 술자리를 즐기다가 담배 하나만 피우고 오자-싶어 조용히 빠져나갔던 프랑은 술집 옆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괜히 가게 앞에서 그냥 피우다가 선배님들 마주칠 필요는 없지. 술자리에서부터 모델인 저의 누나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물어왔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집요하게 묻던 몇몇을 떠올린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고갤 흔들었다. 골목길이 짧아서 그대로 통과해 조금 걸어가니, 금세 작은 놀이터가 시야에 잡혔다. 저기서 피울까-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을 떠올리는 그의 귓가로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흔한 착취의 현장이라고 생각했으나, 가까워질수록 들리는 말들은 프랑의 인상을 단박에 험악하게 만들었다. 선배가 잘해 줄게, 어차피 많이 해본 거 아니냐, 비싸게 굴지 마라- 등등 진부하기는 얼마나 진부하고 저질스러운지 담배 피울 생각이 저절로 달아났다. 꺼내려던 담배를 넣은 그가 참견 좀 할까-하는 생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할 말은 끝나셨나요?”
담담하고 깨끗한 음성이 조용한 놀이터에 울려 퍼졌다. 겁을 먹기는커녕 난처한 기색조차 없이 무덤덤한 말과 목소리에 호기심이 생겼다. 당장 끼어들기보단 조심히 당하고 있는 상대를 살폈다. 전체적으로 목소리와 어울리는 단정한 이미지의 남자가 당황하고 있는 예의 선배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여리고 도련님 같은 이미지에 곱상한 외모만 보고 이런 상황을 벌였는데 당당한 태도에 외려 저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우스운 꼴을 속으로 비웃은 프랑이 조용해진 틈을 타 냉큼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뭐야- 내 카톡도 안 보고 뭐하나 했더니- 여기서 뭐 해?”
“어?”
거짓이 들키지 않게 당황하는 그에게 다가간 만큼 빠르게 어깨동무를 걸친 프랑은 자연스럽게 윙크를 해주고는 선배라고 하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들 누구?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같은 과는 아니고 같이 자취하는 친굽니다- 근데 여기서 뭐 하세요? 능청스런 인사와 빠르게 쏟아지는 질문과 같은 말들에 어버버-거리던 그들은 대충 둘러대듯이 말하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에 냉소를 띄운 프랑이 저기요-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에 옆으로 고갤 돌렸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조금 전의 차갑기 그지없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프랑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순간 숨을 멈추고 그 얼굴을 보다가, 남자의 표정이 의아함을 담은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서야 급하게 어깨동무를 풀며 떨어졌다. 어, 저, 그- 말을 잇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사이 남자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도세럴이라고 합니다.”
“아, 그, 보프랑이고, 어, 멋대로 어깨동무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도와주시려고 한 거잖아요? 정말 감사해요.”
어, 아니- 세럴의 인사에 프랑은 뺨을 긁적이다가, 목 뒤를 긁적이고 머릴 긁적이기도 했다. 시선은 계속 분주히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감사인사가 쑥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웃음이 스트레이트로 관통한 탓이었다. 한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건가- 어쩌지, 아, 미치겠다. 머릿속이 새하얀데-
“저기, 그럼 전 이만.”
프랑이 어떻게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해보려는 사이, 세럴이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거짓말같이 모든 생각이 정지하는 체험을 해버린 프랑의 입에서 급하게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전화번호 좀! 말한 즉시 후회해버렸으나 이미 엎은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당황한 세럴을 보며 더욱 속으로 제 입을 몇 차례나 때리고는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진짜 친구했으면- 해서? 같은 과도 아닌 것 같은데 연락처라도 주고받지 않으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알 수도 없고- 그, 초면에 미안해요. 하하-”
“아- 뭐 좋아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를 정도로 긴장되었으나, 쉽사리 떨어진 허락의 말에 그것도 잠깐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얼른 폰을 꺼내 든 프랑은 세럴이 불러주는 번호를 찍어 급하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가짜 번호면 어쩌나-하는 마음으로 걸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세럴이 꺼내 든 폰 액정에 보이는 제 번호에 안도하며 즐겁게 통화종료를 누르고 번호를 저장했다. 세럴 역시 저장을 끝낸 뒤 더는 늦으면 안 될 것 같다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아쉬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던 프랑이 그제야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밥 한번 같이 먹자고 연락하는 편이 제일 무난하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 * *
그렇게 계속 다음, 다음, 다음의 계획을 세우는 자신을 떠올리던 프랑이 가볍게 고갤 흔들었다. 한순간에 반해 버린 그 순간은 언제 떠올려도 가슴 설레는 것이어서, 한 번 떠올리면 푹 빠져 생각한단 말이지- 이럴 때가 아니라며 자신을 붙잡은 그는 기억하던 것을 다시 되짚어봤다. 어떤 얼굴인지 기억도 안 나는 그 선밴가 하는 이들의 복수? 그렇다고 하기에는 배짱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듣기로는 그 뒤에 세럴씨 형님께 제대로 깨졌다고 했으니 여긴 패스. 처음의 기억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풀고 소파에 푹- 기대어 앉았다. 그대로 쉬고 싶어 하는 머릴 무시하고 빠르게 의심될 만한 다른 일들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다음 만남에서? 세럴씨가 의외로 먼저 감사의 인사로 밥을 사겠다고 연락이 왔었던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하지 않았으니 여긴 아니다. 그다음? 그다음도 저가 너무 얻어먹은 것 같다며 만나자고 했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어디지? 의심되는 부분을 찾으려 차례차례 넘어가는 기억은 어느새 봄을 지나 여름의 도입부에 이르렀다. 세럴과의 관계에 변화가 찾아온 기억이 떠오른 프랑이 한숨과도 같은 날숨을 뱉어내며 눈을 감았다.
* * *
여름의 시작이라고 치기에는 꽤 더운 날이었다. 확 더워진 날씨에 프랑은 미리 알아두었던 조용하고 한적한 카페로 세럴을 안내했다. 예상대로 카페 안은 한적했으며, 시험 기간인 만큼 공부하는 이들만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메리카노 2잔을 시킨 뒤, 적당히 구석진 곳에 자릴 잡고 앉은 둘은 우선 뜨거운 열기부터 식혔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세럴이 먼저 책을 꺼내 펼쳤다. 프랑과 세럴 역시 시험공부를 하러 온 것이었지만, 프랑은 도무지 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가끔 누나를 따라가 자신도 같이 화보를 찍을 때가 있는데, 하필 그게 오늘 새벽에 있었다. 잠이 부족해 피로한 상태로 유독 더운 날씨에 돌아다녔더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예의상 책을 꺼내 펼치긴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어차피 공부는 물 건너간 것 같으니 책을 보는 척 세럴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고요함만 존재하는 시간이 흐르고, 기운 차리기는커녕 점점 더 정신이 몽롱해진 프랑의 시선이 어느덧 세럴에게로 고정되었다. 세럴씨, 세럴씨, 세럴씨- 책 보는 것도 좋은데 나도 좀 봐주지- 세럴씨, 세럴씨, 세럴씨-
"좋아해요-"
곧장 인식하지 못한 말이 인식되는 순간 프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지금 뭐랬지?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서늘하게 내달리며 잠이 확 달아난 그가 순간 숨을 멈추고 세럴을 가만히 지켜봤다. 여전히 책에만 고정된 시선과 숙인 고개. 못 들었나? 아니면 내가 말했다고 착각을 했나? 반응이 없어 기대감을 가지고 긴장을 조금 푸는 순간 세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방금, 뭐라고?"
"네? 어, 그, 저기- 조… 좋아한다고요! 이런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
"…… 프랑,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니야."
어떻게든 넘겨보려는 프랑의 노력과 달리 세럴은 정확히 그가 한 말뜻을 파악하고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개를 들고 마주해오는 시선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프랑은 조심스레 저의 진심을 다시 한 번 건네려고 무거운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ㅈ… 좋ㅇ……"
"저기 프랑. 은근히 티가 나서 이전부터 짐작은 했는데, 난 친구인 프랑이 좋아. 그냥 계속 이렇게 좋은 친구였으면 좋겠어."
마음을 담은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날아든 거절의 말에 프랑의 입술이 다시 꾹 다물렸다. 친구. 친구. 친구. 지금 유지되는 이 '친구'관계마저 깨질까 봐 제 마음 고백도 못 하고 참고 있던 결과가 너무 허무해서 눈물조차 나질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그는 제 손끝만을 가만히 바라봤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프랑의 입술이 열리며 한숨이 한 번 나왔다.
"역시,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미안하지만 세럴씨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기회?"
"제대로 고백도 하기 전에 거절이라니, 도저히 포기가 안 돼요! 이렇게 해요. 이제부터라도 친구 사이의 만남이 아니라 연인의 데이트를 하고 세럴씨는 저를 친구가 아닌 그 이상에 대해 계속 고민해주세요."
온 마음을 담아 진지하게, 당당하게 말하는 프랑의 기세에 세럴이 주춤했다. 말을 하면서도 이대로 친구 관계마저 끝이 날까 걱정하던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냉큼 말을 이었다.
"물론 계속 그러겠다는 건 아니에요. 올해. 12월까지만 할게요. 그 안에 다시 한 번, 아니 정식으로 고백할 테니까 그때 다시 대답해주세요."
말을 마친 프랑이 심호흡과 함께 가만히 세럴만을 응시했다. 절로 꽉 그러 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고민 가득한 얼굴로 마주 보던 세럴의 입술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하아-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세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 한숨과 함께 감겼던 눈이 천천히 다시 떠지자, 결심한 듯 단단해진 표정이 프랑을 마주했다.
“좋아, 그렇게 해. 기한은 12월 안. 대신 고백은 단 한 번만이야.”
“알았어요. 그거면 돼요. 저는 그거면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