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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마치 살아 있다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심드렁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가 날카로운 그것의 형상을 띠었다. 거대한 의자, 마치 왕좌로까지 보이는 곳에 앉은 사내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작게 손짓함과 동시에 튀어나온 서류 두어 장이 서늘한 색채를 빼어 물었다. 덜스는 끝끝내 제 곁을 지나치는 존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주피터 님, 주피터 님.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꽃잎을 머금은 양 수줍게 고백하던 목소리가 금방 죽어서 내팽개쳐진다. 차마 그 소리들을 주워 담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덜스의 흰 두 손이 망토 자락을 어설프게 잡아챘다. 때문에 남자는 멈춰 서야만 했다. 팽팽히 당겨진 망토와, 다급함으로 몸을 던진 녹발의 사내와, 경멸 어린 표정을 지우지 않은 남자가 대치한다.

 

  남자는 지금 이 상황이 제가 태어난 이래 가장 ‘흥미롭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만든 후계에게서 사랑의 밀어를 받는다니, 그 누구도 생각한 적 없는 헤프닝일 터다. 게다가 남자 본인과 자신의 후계는 뱀파이어가 아니던가. 그는 그의 종족이 사랑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여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줄의 기록조차 그들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영생에 가까운,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기에 이 감정이 얼마나 유약하고 변질되기 쉬운지 자각한다. 이는 기실 모든 뱀파이어들이 인정하는 부분인 동시에 흡혈욕과 비슷한 본능적 자각이었다.

 

  그래서 쉬이 믿을 수 없었다. 혹 ‘후계자여서 남들보다 조금 더 신경 써준 것’이 저 아이의 어설픈 감정을 부추긴 것일까. 자신들은 사랑할 수 없다는 본능의 속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증명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어린 뱀프의 치기일 뿐일까. 못 박힌 듯 여전히 멈춰선 채 남자의 손과 눈이 서류를 향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저의 후계에 한 터럭 시선조차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의무이다시피 한 애정을 줄 때엔 여유롭게, 다만 끊어내야 할 때엔 한 토막 여지없이 구는 것이 그의 방식인 탓이다.

 

  움켜쥔 양손의 떨림이 주인을 대신해 망토를 타고 전해졌다. 간절하게 내지르는 무성의 비명이 차마 덜스의 입에서 터져 나오지 못해 손으로 뱉아진다. 그러나 ‘넌 네가 사람인 줄 아느냐’고 무참히 말하던 남자는 미동도 않는다. 급기야 삼 분여를 긴장이 팽배한 가운데 맞서던 남자가 하품으로 지루함을 쏟아냈다. 순간 덜스는 깨달았다. 아, 이 남자는 이런 뱀프였지. 주피터 님은 그런 뱀파이어셨지. 결국, 망토를 쥐어 챘던 덜스가 제 손을 떨구고 말았다. 덜스는 그저 기분 나쁜 환상을 느낄 따름이다. 비참한 슬픔, 그보다 더욱 깊고 무거운 심연의 아가리로 짓이겨지는 그런 환상을.

 

  덜스에게 망토 자락을 잡히고서도 서류만을 들여다보던 주피터가 그대로 방을 나섰다. 쿵. 묵직한 목재 문이 닫히며 한숨을 토해냈다. 홀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제국의 왕이 기거한다 하여도 부끄럼 없을 방이 텅 비어버렸다. 그 공허의 가운데에서 덜스는 다만 두 손을 떨구고, 고개를 떨구고, 자신을 떨구었을 따름이다.

 

  “잔인하시기는…….”

 

  파각.

  찰나의 파열음이 허공에 아로새겨졌다. 밤에 녹아드는 존재답지 않은 찬란한 녹빛이 덜스의 발밑에서부터 꽃잎 덩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덜스가 한두 방울 눈물을 흘릴 즈음 모터 소리 같은 시동 음이 작게 들려왔고, 그 뒤를 이어 빛이 피어올랐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빛에 둘러싸여 사라져버렸다. 거부와 조롱이 섞인 주피터의 말을 떠올리며, 그래서 아랫입술이 희어지도록 깨물며.

 

 

 

* * *

 

 

 

 “도련님과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잘 벼려진 독수리 부리를 한 남자가 통보하듯 일렀다. 그에 주피터의 얼굴이 설핏 구겨지며 가니메데를 향했다. 며칠 전부터 연락이 끊기시더니 이젠 아예 그분의 집으로도 이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외부를 차단해버리신 것 같더군요. 한숨과 염려가 담긴 말이었음에도 주피터는 고개를 다시 서류로 놓았다. 구태여 저가 신경 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는데 고작 차였다고 틀어박힌 제 후계를 돌보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그냥 두실 겁니까?”

 

  가니메데가 채근하듯 물었다. 그러나 주피터는 아주 짤막한 시선을 흘긋 던졌을 뿐으로, 그 이상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었다. 독수리 머리의 모카 빛 남자가 또 한 번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두 뱀파이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그냥 두어선 안 되었다. 제법 광범위한 구역의 보안을 담당하는 주피터와 그의 후계자가 불화를 일으켰음이 새어 나간다면……. 그건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이번엔 제대로 싸운 듯한데, 분명 이를 눈치채는 존재가 있을 터다. 그러면 이 구역의 뱀프들이, 자칫 덜스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니메데는 방관이 요수가 아님을 절감했다. 문제야 뭐가 됐든 대부분은 주피터 님이 먼저 굽히고 들어가면 풀릴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가니메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 분이 싸우셔야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주피터 님, 게다가 이번엔 도련님도 많이 화가 나신 듯합니다. 두 분이 무엇 때문에 이러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의 권속, 주피터 님과 함께 이 일대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거 참, 말 더럽게 많군.”

 

  “그게 싫으시다면 어서 도련님께 찾아가 보십시오. 이렇게 오래 연락이 끊겼던 적이 없으셔서 더 걱정됩니다.”

 

  대번 가니메데의 말뜻을 알아들은 주피터가 짜증스레 몸을 일으켰다. 꼭 보잘것없는 일로 저를 귀찮게 한다 성질 내는 것도 잊지 않으며. 천성이 나약한 녀석, 쓸모없는 놈, 누굴 닮았는지 모를 녀석. 가니메데를 뒤로한 채 집무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온 귀찮음과 짜증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 뒤엔 하여튼 도움도 안 되면서 걱정이나 끼친다는 속 편한 생각이 숨어 있었다.

 

  “되도록 빨리 귀환해 주십시오. 요즘 들어 인간들의 실종 속도가 급격히 증가했다며 경계가 강화된다는 소식을 입수했습니다. 정부 차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말과 함께요. 돌아오시면 이에 대한 서류를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어어.”

 

  재미없게 끝까지 일 얘기다. 이젠 이골이 나 크게 감흥도 없는 전개에 그냥 휙휙 고개를 몇 번 끄덕여 주고 말았다. 악재는 겹친다던가. 덜스의 이상 행동과 인간들의 이상 행동을 곱씹으며 주피터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 사라진 인간 놈들만 해도 피가 몇십, 몇백 리터인지. 그는 하릴없이 덜스의 집을 좌표로 한 이동진을 그렸다. 그의 날카로운 손가락 끝으로부터 유려한 전선(電線)이 희게 그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는 조그마한 스파크가 기이한 형상을 띠는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 그가 이동진 너머로 종적을 감추었다.

 

 

 

* * *

 

 

 

 목재 바닥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침입자 탓에 묵직한 마찰음을 질렀다. 주피터가 약 일 미터 상공에서 나타난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주목한 소리는 고작 제 구두 굽과 나무 바닥의 합음이 아니었다. 자신 외의 누군가가 내고 있을 낯선 소리가 귀를 휘감았다. 퍽─ 무언가 으깨지는 둔탁한 음이 길지 않은 간격을 두고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주방에서 어떤 격렬한 요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것은 그보다 더, 조금 더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주피터의 감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소리는 끊길 듯 위태로우면서도 절대 놓이지 않는 희망처럼 질기게 이어졌다. 그는 어느새 그 탁음을 따라 홀린 듯 걷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새삼스레 기류가 심상찮다. 그러고 보니 이동진을 그리던 스파크가 이상하게 뒤틀리기도 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이며, 덜스가 무엇을 하기에 나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내 걸음이 멈춘 곳은 덜스의 개인 침실 앞에서였다.

 

  확실히, 선연한 파열음이 문틈을 비집고 뚝뚝 덩어리져 흘러내린다. 주피터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문고리를 비튼다. 다음 순간 문이 열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탄식과도 같은 침음성이 덜스의 등으로 가 닿았다. 그러기 무섭게 뒤돌아선 덜스가 어딘지 흐린 두 눈을 크게 치켜뜬다. 아아. 보고 싶었던 목소리. 듣고 싶었던 주피터 님. 그가 주피터의 목소리를 브레이크 삼아 높이 치켜들었던 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막 내리치려던 차에 그가 찾아와 준 것이다.

 

  “인간이 되고 있었어요,”

 

  주피터 님. 덜스가 예쁘게 웃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건지, 오로지 저가 만든 희망에 부풀어 지금까지 봐 온 중 가장 예쁘게 웃음 지었다. 주피터는 방 안을 빠르게 한 번 훑었다. 모든 가구를 한쪽으로 몰아놓은 가운데 수많은 인간의 시체가 제물 마냥 쌓아 올려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죄 머리며 가슴팍이며 사지가 터지고 짓뭉개진 상태였다. 구석엔 아직 멀쩡한 인간이 서넛 기절 당해 포박된 채다. 게다가 덜스는 지금 막 한 명을 더 죽인 듯했다. 신선한, 그리고 따끈한 생명의 냄새가 무섭도록 코를 찌르고 들어온다. 피가 온갖 곳으로 튀어 저들끼리 웅덩이를 만들고 한 폭의 추상화를 그려냈다.

  주피터는 이쯤 생각을 마친 다음 슬몃 고개를 치켜든 의구심에 입을 열었다.

 

  “인간이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래. 무슨 개소리지?”

 

  제법 격하게 튀어나간 어조에 덜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개소리 같은 게 아니에요, 주피터 님. 제가 인간이 되는 방법을 알았는걸요?”

 

  “그게 이 하등 쓸모없는 짓거리의 이유라는 건가?”

 

  주피터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평소에도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녀석임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리 작지 않은 규모의 학살이라니. 고작 차였다는 것 하나가 이 행위의 완벽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좀 더 뚜렷한, 보다 가시적인 동기가 존재할 것이었다. 물론 덜스는 주피터의 그런 생각을 자각하지 못한 듯 예의 그 아름다운 웃음을 한층 진하게 보일 따름이다. 덜스가 피로 흥건한 삽을 사랑스러운 양 제 품으로 가져가 끌어안으며 나긋나긋 말하기 시작했다.

 

  “프라이가 그랬어요. 인간을 천 명쯤 죽이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인간들 생명의 원천은 피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배고픔에 그 생명을 먹어 버리니까 뱀파이어인 거래요. 그러니까 피를 먹지 않고 천 명을 무사히 죽이면 저도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랍니다~”

 

  허.

  가만히 덜스의 말을 들어주던 주피터가 헛웃음을 흘렸다. 프라이. 황금의 뱀파이어.   그 녀석은 두말할 것 없이 제 후계 놈을 놀린답시고 저리 말했을 게다. 덜스는 그 헛소리의 진위를 가려내지 못할 만큼 이성이 온전치 못했을 터고. 순식간에 정리되는 상황 사이로 시체를 지그시 밟고 올라선 제 후계자가 문득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심야에 군림하는 종(種)의 고결함은 썩어가는 핏덩이로도 가릴 수 없다. 이리 엉망인 꼴을 하고도 명백히 저가 ‘귀한 존재다’라는 기백을 내두른 채니 무얼 더 덧붙일까. 오로지 개인의 만족 때문에 인간 사냥을 자행한 것은 일말의 문제도 되지 않는다. 주피터가 한 손을 허리에 올리며 거만한 표정으로 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내 후계답게 굴어. 네놈이 고귀한 존재임을 잊지 말란 말이다.”

 

  네가 뱀파이어인 동시에 저의 후계자임을 잊지 말라는 조언, 충고, 타박. 역시 그 중 인륜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다만 품위 없는 꼴에 대해 혀를 찼을 뿐이다. 저리 형식적인 말만 하시는 걸 보니 역시 나를 보러 오셨나 봐. 부끄러워하시긴. 이미 예상한 대로 반응해 오는 주피터를 보며 덜스가 화사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입맛대로 끼워 맞춘 상상이 더없이 즐겁다. 곧 덜스의 기운이 순식간에 반전되어 공격성을 띠기 시작했다.

 

  “오…… 전 사람이 될 거예요. 주피터 님.”

 

  주피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저 어린 나이의 뱀프가 저지르는 착각인 줄로만 여겼던 것이 당사자에겐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절반은 놀림쯤으로 툭 던졌던 ‘네가 사람인 줄 아느냐’는 말이 비수가 되었나 보다. 태연자약하게 상처를 주고도 소식 없는 덜스를 방치하는 동안 이 사달이 났다. 덜스는, 제 후계는 홀로 상흔을 키우고 있었다. 베인 곳이 깊어져 급기야는 곪아버릴 때까지, 그리하여 그 속에서 괴물이 태어날 때까지 스스로를 어루만졌다. 프라이는 다만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온전히 덜스의 선택이었을 이 참상에 주피터가 주춤했다. 참상. 그래, 참상. 그제야 ‘상황’이 ‘참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시야가 뒤집힌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묵직한 무언가가 배를 들이받았다. 덜스가 마력을 끌어올린 듯했다. 그저 감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 아가리를 쩍 벌린다. 기절한다. 기절할 것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먹힌다. 그 와중에 뒤로 넘어가며 처박은 뒤통수가 얼얼하다. 이를 악물며 순식간에 덜스의 마력을 끊어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후계가, 빠르게 일어서는 저를 시야에 담는다. 여전히 삽을 꼬옥 끌어안은 채로.

 

  “인간이 되고 나면 저와 사랑을 해요.”


  짓이겨진 시체를 밟고 선 뒤로 극채색 여명이 차게 타오른다. 온통 튄 피가 새로이 태어난 해를 먹으며 무엇에 견줄 바 없는 적색으로 반짝인다. 덜스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저와 사랑을 해요. 주피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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