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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오로지 상대방을 위해 있는 말이었다. 옛날 옛적 먼이라고 불렸던 사내는 소심하고 다정했으며 자존감이 낮았다. 늘 남에게 져주고 양보하는 사람이었다. 먼충이, 비하적인 별명으로 불려도 화를 내기보단 "응." 수줍어하듯 조용히 웃던 그는 이제 없다. 그는 자애로운 어머니를 이어받아 달을 지켜야 했다. 문은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하며, 부드럽게 도닥여주기도 하던 어머니의 부재, 그리고 느닷없이 제 곁으로 떠오른 은빛 행성에 울먹였다. "저는 달 같은 거 책임지고 싶지 않아요, 책임질 수 없는걸요." 은색으로 센 머리도, 새까만 밤하늘에 뜬 달덩이 같은 노란 눈도 싫었다. 문은 그 순간부터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계승한 후, 그들은 누군가에게 억압이라도 당한 것처럼 행성 관리에만 힘썼다. 마치 제 존재 의의는 행성의 안녕뿐이라는 듯이 강박적으로 웜프를 죽이고, 망가져 가는 옛 요람에 최소한의 예우를 다 하고, 멀고 먼 미래까지 헤집고 다니며 불안 요소를 제거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물려받은 유산 지키기에 돌린 것이다. 애정과 물에 목말라 비틀고 시든 꽃처럼 퍼석퍼석한 잎이 부서져 떨어지는 소리를 숨긴 채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모인 목성 안 회의장은 삭막 그 자체였다. 세상에 재미 볼 건 하나 없다는 것처럼 삐뚤어진 미소를 짓고, 그늘진 눈동자를 힐끔 굴리고, 끝내 열리지 않을 듯 닫혀있는 입술을 뻐끔거려 의사를 표시하는 게 다였다.

 

  오늘 회의도 여느 때와 똑같았다.

  "웜프가 기하급수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아레스, 제우스, 크로노스. 일 처리는."

 

  헤르메스가 말했다.

 

  "이 공간, 저 공간 열어봤지만, 근원지는 찾을 수 없었어."

  "잠도 안 자고 쳐 죽이는데 그 새끼들은 왜 자꾸 기어 와서 꾸물거리는 거야? 기분 나쁘게."

  "아레스, 진정하십시오. 어차피 죽이는 데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고, 나중에 한꺼번에 해치우죠."

  "그럼, 난 이만 가도 될까? 듣자하니 내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 쉬고 싶어서."

 

  솔이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일어섰다. 벌써 가느냐는 헤르메스의 눈빛에 눈웃음만 지어주곤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솔이 퇴장하자 문도 까닥 고개를 끄덕이고 솔을 쫓아 나섰다. 아프로디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설레설레 손을 흔들며 웃었다.

  "문도 참 끈질기네~"

  "너도 그렇잖아, 아프로디테."

  "아레스, 너한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거든? 애초에, 문은 이상하다고. 문만 예전처럼 솔을 좋아하고 있잖아."

  "아니야…."

  "뭐가?"

  아프로디테의 질문에 헤르메스는 손장난만 칠 뿐이었다.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만들어 안경처럼 눈 가까이 댔다. 손가락 안으로 보이는 아프로디테의 빛나는 장식들이 가만히 짤랑 이는 것을 구경했다. 바다처럼 푸르게 가라앉은 눈 안에 조그마한 빛이 알알이 들어찼다.

  헤르메스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회의가 열렸다. 저번 회의가 열린 지 고작 이틀만이었다.

 

  "솔이 사라졌습니다."

  "솔이 왜?"

  "저도 알면 회의를 열었겠습니까. 문, 아는 거 있나요?"

  "모르겠어."

 

  제우스의 말에 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야, 범인이 자신인데 아는 게 있다고 말할 리가 있겠는가.

 

  "헤르메스는요?"

  "……."

 

  헤르메스는 침묵했다.

  솔은 창백히 질린 손끝마저 아름다웠다. 무척 아름다운 나머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듬거리며 지하실 문을 잠갔을 때도 자신을 믿던 순진무구한 얼굴도, 불안하게 떨리는 몸도, 문에겐 무척 소중해 눈을 조금도 뗄 수 없는 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 불필요한 일로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 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서 이 미련한 회의를 끝내고 싶었다.

 

  "어서 찾아야 할 텐데요. 태양의 행성주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 큰 소란이……."

  "괜찮아, 제우스. 솔은 잘 있으니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만든 방이니 꼼짝도 못 하고 잘 있을 것이다.

  "괜찮아."

 

  문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회의실 안은 크로노스의 모래시계가 흐르는 소리만 가득 찼다.

 

 

 

* * *

 

 

 

  "다녀왔어, 솔. 회의를 하는 바람에, 그들이 널 찾고 있어. 하지만 절대 찾지 못할 거야. 헤르메스는 알고 있겠지만, 입을 다물어주었어. 왜일까? 왜일까, 글쎄, 왜일까, 선? 헤르메스는 아마 나를 가여이 여기는 걸 거야. 그래서 아무 증언도 하지 않은 거겠지. 솔, 그들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이제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그래, 우주가 더는 우주로 남아 있지 않더라도, 죽음이란 존재가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솔, 선, 솔."

 

  문은 말했다. 달 먼지 특유의 화약 냄새가 짙게 풍기는 어두컴컴한 지하실 안에는 솔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들었다, 보다는 세상을 떠났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터다. 솔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스스로 청한 동면이다. 문은 솔을 함부로 깨울 순 없었다.

 

  "키스를 한다 해도 절대 깨어나지 않겠지? 왜냐하면, 넌 나를 피할 방도로 잠에 빠져든 거니까. 나를 마주 보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은 거야. 솔, 너는."

 

  문은 솔의 딱딱한 손톱 끝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얽었다. 보드라운 살결 끝에 살짝 걸린 일말의 온기마저 햇빛 냄새가 난다.

 

  "너는 내 안에 있는데도 여전히 환한 햇빛 같구나."

 

  문은 조심스레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헤르메스로구나."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헤르메스는 멍한 눈을 빛냈다.

 

  "문, 솔을 내버려 둬. 솔은 소유물이 아니야, 솔에게 억지로 기대려 들지 마."

  "참 쉽게 말한다, 헤르메스. ……나는, 나는 기대면 안 돼? 조금 기대해보고, 조금 욕심내면 안 되는 거야? 헤르메스, 알잖아, 나는, 힘들어. 그래, 미치겠어. 차라리 예전이 좋았어. 내가 아플 때 고통을 덜어주는 존재가 있었어. 이해해주는 존재가 있었어. 하지만, 지금 없어. 나 혼자야. 나는 '옛' 지구를 빙글빙글 돌 뿐인 바보 같은 달, 루나 님의 유산을 돌봐야 해. 외로워, 헤르메스. 너도 그렇잖아. 네가 아플 때 다정한 손길로 돌봐주던 그녀를 이미 잊은 거야? 아니잖아. 제발, 날 이해해 줘. 나는 선밖에 없어, 아니 솔 밖에, 나는……!"

  "하지만, 솔이 깨어나지 않으면 안 돼, 문. 진정해."

  "진정하면 달라져?"

  문은 성큼성큼 헤르메스에게 다가섰다. 헤르메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가, 헤르메스."

  "문!"

  "나가 줘. ……부탁이야."

 

  순간 헤르메스는 얼핏 먼의 얼굴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헤르메스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 도망치듯 달려나갔다. 문은 덧없는 한숨을 쉬었다.

 

 

 

* * *

 

 

 

  "문도, 없어졌습니다."

  "문마저…!"

  "헤르메스, 최근에 달에 갔었죠? 문은 있었나요?"

 

  제우스가 물었다.

 

  "없었어, 문은."

  "문은? 다른 이가 있었나요?"

  헤르메스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글쎄……."

 

  천장에 행복했던 옛 추억들이 겹쳐져 아롱거렸다. 헤르메스는 눈을 감았다. 헤르메스는 문도, 먼도 아닌 불안한 누군가를 보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오로지 헤르메스만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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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보답 받지 못할 비틀린 애정을 눈에 담아두었다가 혼자 간직했다. 아레스나, 다른 이들에겐 말할 수 없는 문만의 비밀이자 헤르메스의 비밀이었다. 그러니 문은 자신이 그릇된 애정 방식을 가졌는지 모를 터였다. 헤르메스나, 솔이 말해주지 않는 한 영원히.

  문은 솔을 지켜보고 있었다.

  솔이 잠에 취해 잠자리에 몸을 뉘일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고, 솔의 아름다움을 탐하다 솔이 잠들면 혼자 슬피 울었다. 기댈 곳도 없는데 사랑마저 보답 받지 못하는 제 처지를 홀로 동정했다. 달의 벽면 한가득히 솔의 이름을 새기고, 레골리스로 솔의 이름을 만들어놓았다.


  헤르메스는 문이 투박한 손으로 솔의 이름을 만드는 모습을 되새겼다. 바닥을 바라보는 표정은 여신을 짝사랑하는 천사처럼 신성하고 애달프고도, 한 마리의 악마 같았다. 아프로디테의 말처럼 문은 이상했다.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감정이 메마른 그들 모두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문은 어디 한가운데가 부서져 있는 듯 굴었다. 솔이 알면 분명히 싫어할 게 분명했다. 솔도 선이 아닌 만큼 먼충이라 놀리며 그를 감싸주지 않는다. 솔은 문에게 질릴 대로 질려 이야기 하나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혐오감을 거리낌 없이 그대로 표현한, 위풍당당한 여제의 얼굴로 문을 날카로운 말로 찌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헤르메스는 지켜보기만 했다.

  문이 달 한구석에 음습한 지하실을 만들어놓아도, 설마 그러겠거니 하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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