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조금 후덥지근한 늦봄이었다. 더위를 꽤나 타는지 하복으로 갈아입은 학생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선도위원인 제 오라비는 먼저 가서 미안하다며 씩 예의 그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는 멍한 눈동자로 제 오라비를 응시하다 괜찮으니 먼저 가라고 말없이 손짓했다. 제 오라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고 검은 피부를 소유한 그녀는 유난히 말이 없고 멍했다. 오죽하면 부모가 내 딸이 백치가 아닐까, 하고 걱정할 정도로. 그러나 그녀는 걱정들이 무색하리만치 훌륭하게 제 일들을 소화해내었다. 바보는 아니다. 다만 조금 멍할 뿐이다. 그녀를 지켜봐온 부모가 내린 결론이었다.
* * *
아~ 이번만 봐주라. 응?
멍하니 등교하던 그녀에게 불쑥 들어온 것은 제 쌍둥이에게 귀가 잡혀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였다. 능글맞고,조금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시끄러워요. 다른 건 몰라도 교복은 제대로 입어야… 그와 똑 닮은 사내는 한숨을 쉬며 인상을 찡그렸다. 낯익은 얼굴이라 했더니 그의 쌍둥이인 듯 했다. 검고 곱실거리는 머리를 한 사내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손을 붕붕 흔들며 안녕! 이라는 별 뜻 없는 인사를 건네었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될 것 같았지만, 어쩌면 그 인사로 인해 조금은 무언가 바뀔 거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느덧 중간고사가 끝나고 슬슬 초여름으로 바뀌려하는 날에 반은 여느 때보다 좀 더 들뜬 듯 했다. 매 수업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이야 조용히 하라며 교탁을 내려치거나 칠판을 쾅쾅 쳐 고생이었다만, 슬슬 축제분위기에 취해가는 듯 했다. 서너 달은 훨씬 넘었건만, 동아리 부스별로 마감을 해야 한다느니, 홍보포스터를 인쇄해야 한다느니 별별 핑계를 대며 수업을 빠져나가려는 것이 대다수였다.방학이 끝나자마자 바로 축제를 하는 탓인 듯했다. 제 친구는 짧게 줄인 치마를 손으로 팔랑거리며 더위와 불만, 그 다른 감정들을 한껏 표하고 있었다.
“정말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축제를 햇빛 쨍쨍하게 더운 8월에 할 수 있어? 참나, 내 피부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안 그래? 입술에 붉게 색을 칠하며 그녀의 친구는 다른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우선 축제의 부스는 모두 야외부스였고 그늘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분명 더위에 찌들어 기력 없이 병든 닭처럼 비실거릴 것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은 그녀들에게 조금 생소하였다만, 이내 그녀가 버릇처럼 옛 말을 구사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납득하였다. 물론, 더위에 찌들고 기력 없이 병든 닭처럼 비실거릴 것이라는 말도 그녀의 주장이었다.) 친구의 말을 들으며 시리B는 그저 그러려니,생각하곤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자신은 동아리에 속하지 않아있었고, 그저 조용한 곳에 틀어박혀 간식을 한 손에 쥐곤 멍하니 쉬고 있을게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한없이 말갛기 만한 그녀에게 무엇을 바라겠냐며 립밤을 붉은 입술에 덧바르고는 불만을 토로하던 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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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언제 그리도 간 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길고 긴 하루가 끝이 났다. 그녀의 친구들은 동아리 축제 연습을 해야 한다며 종례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갈 목적지로 헤어졌다. 자신은 동아리에 속해있지 않았다. 오라비는 학생회에, 친구들은 동아리에 속해있었으나, 자신은, 저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홀로 있었다. 나 혼자. 조금은 울적하고 감상적인 기분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더랬다. 혼자 있을 곳이 필요했다. (어쩐지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아, 그녀는 멍하니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석양을 본다면 뜻 없이 울적해진 이 기분을 잠재워질 거라, 하는 백치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만약에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있어준다면. 사실 자유로운 영혼이라면서, 혼자가 편하다는 웃음은 거짓 반 사실이 반으로 섞인 차와 같은 것이었다. 칵테일처럼 ‘사실은 나도 혼자는 싫어.’ 라는 맛 따위는 이미‘괜찮아, 먼저 가.’ 따위의 안중에도 없는 맛에 섞여버린 것이다. 사실은 이제 무슨 맛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버렸기에, 그녀는 누군가 그 맛을 알아채줄 것이라는 생각은 떨쳐버린 지 오래였다. 다 그런 거지, 뭐. 안 그래? 신발 앞코를 흙바닥에 파 비벼가며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만일 네가 어떤 감정에 흠뻑 젖고 숨을 못 쉴 정도로 깊게 빠져들었을 때 이렇게 해보렴. 눈을 감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걸어가는 거야. 그렇게 아무렇게나 향했을 때 누군가가 네 앞에 있다면, 그건 아름다운 운명이란다. 그 사람과 너는 좋은 인연을 이루어갈 거야.
문득, 떠오른 그 말은 비단 우연이 아니리라. 이상한 곳으로 가면 어쩌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머리를 부딪쳐 버리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잠시였다.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자신을 어느 장소로 이끌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부딪칠 것 같을 때마다 마치 나비가 나풀나풀 꽃길을 거닐 듯이 저 역시도 사뿐사뿐, 귀족 아가씨라도 된 양 장애물을 아슬아슬히 피해 걸었다. 마법처럼. 그래.마법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삼류소설
하나.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