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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일을 무사히 마치게 된다면 상으로 뽀뽀라도 해 드릴까요?”

 

  오로지 필요 때문에 썼을 흰 가면이 얼핏 웃는 듯도 했다. 개새끼. 그래서 B.H는 마음껏 지껄였다. 도통 몇십억 년을 살았을지 한 터럭 가늠조차 허용치 않는 제 목전의 상대에게 소리 없이 외쳤다. 일상적인 파티장에서 이루어질 그보다 더 일상적인 의뢰는 한 달도 더 전에 들어온 것이었다. ‘상인단의 거래에 거슬리는 누구를 조용히 죽여 달라’던 저음이 발치에 내리깔리던 그 날. 그날 B.H는 일말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던 동음으로 사랑을 고백받았다. 허나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칭할 만한 대단한 무엇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상인, 아칸서스’의 입에서 나온 거라면 더더욱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뿌듯이 뽀뽀를 쥐여 줄 그임을 알기에 B.H의 발걸음이 미련 없이 휙 틀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아칸서스 또한 제 연인으로부터의 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가면 아래서 입꼬리를 당길 뿐이다. 그러며 아칸서스는 어쩐지 낙낙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 걸음을 멈추고 B.H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저 살아 존재하는 것을 무감정하게 썰어낼 줄 아는 이라 판단해 망설임 없이 살인을 의뢰했을 따름이다. 그에게 여타 덧붙이는 사족 없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말만 덧붙여서. 그때 왜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갔는지는 여직 정의할 수 없는 의혹이었다. 무언가 일시적으로 결여됐었는지…….

 

  멀거니 B.H를 응시하던 아칸서스가 머잖아 홀 바깥쪽으로 발을 놓았다. 평소의 짓궂은 기운을 정장으로 감춘 그가 목표물과 닿았으니, 슬슬 물러서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 번 이쪽을 돌아볼 법도 하건만 기어이 작은 시선 하나 던지는 것 없다. 이전의 뽀뽀 선언이 부끄러웠던지 그 창백한 피부가, 허여멀건 한 귓가가 예쁘게 붉지 싶다. 아칸서스가 연신 B.H를 훑는 사이 그가 목표물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밖으로 나가지?”

 

  용건은 아칸서스가 일러준 대로 대충 에둘렀고, 목표물이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껄렁하게 씨익 웃어 주었다. 입가에 이는 경련을 자근히 누르고서.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땐 앞뒤 잴 것 없이 찢어발겨 왔던 탓으로 도통 이 ‘암살’이라는 행위가 몸에 익질 않은 때문이다. 애당초 왜 이런 불편한 방식으로 죽여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B.H는 제법 프로페셔널했다. 이 바닥에서 구른 기간이 얼마인데, 이까짓 놀음에 잠깐 어울리는 것쯤은 쉬웠다. 만면에 여유로움을 얄팍히 덧칠한 B.H가 앞장서 홀을 나섰다.

 

  “알고 있을까 싶긴 한데, 아니, 상인 놈들한테까지 견제받을 정도면 알 수밖에 없을 거로 생각하긴 한다만~”

 

  그래도 파티장이라고, 처음 해 보는 암살이라고 감춰 두었던 시시껄렁한 면모가 홀을 나오자마자 죄 풀어지기 시작했다. 입꼬리를 씩 끌어당겨 웃은 그가 정장 마이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가볍고도 익숙하게 눈을 가렸다.

 

  ‘아. 이거 좀 아칸서스 놈 같아. 눈을 가린다는 점뿐이지만.’

 

  그래도 닮은 건 닮은 거잖아? 마치 머릿속이 암전이라도 됐다가 팍하고 빛이 터져 들어오듯, 그러나 그 거창한 일련의 과정과는 하등 관계도 뜬금도 없는 생각이 B.H의 머리를 꽉 메웠다. 그 탓일까, 그가 일순 말하려던 것을 끊고 움직이려던 몸짓을 차단한 것이. 물론 눈앞의 상대는 이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졸지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인 천체는 B.H가 다른 생각으로 빠진 순간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디로든 우선 순간이동부터 하자는 생각이었던지, 목표물의 몸 근처 허공이 그의 손짓으로 찢어져 얄팍한 틈을 내비쳤다.

 

  “쓰읍─”

 

  아주 당연하게도 이를 놓칠 B.H가 아니었다. B.H는 날카로운 소리로 혀를 차며 ‘지구’산 선글라스를 내팽개쳤다. 강하게 던져진 선글라스는 거칠 두꺼운 공기층도 없이 우주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B.H가 전개한 그만의 공간에 가려져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기실 아칸서스가 직접 짚어 준 목표물은 절대 약한 상대가 아닐 테지만, 그가 친히 의뢰를 맡긴 B.H 자신 또한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닐 거였다. B.H는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본인과 목표물을 제 공간으로 감싸 덮으며 새삼 엄습해 온 저의 강함에 노랫말처럼 감탄사를 흥얼거렸다.

 

  “어딜 가려고, 으응? 아,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아픈 건 잠깐이거든!”

 

  빙글빙글 동심원을 그리는 B.H의 눈이 유쾌하게 휘어져 목표물을 담았다. 무어 그리 즐거울 게 있다고, 생명 하나가 공중에서 푸스스 흩어지는 장면을 바라보는 입으로부터 웃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그는 연신 낄낄대며 찍소리도 내지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천체를 응시했다. 그랬다. 이 블랙홀의 공간에서 5초 이상 버틸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의 동류 말고는 어디에도 없었다(이 부분에서 B.H는 마르스를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크지 않은 항성의 주인이었던 이놈은 유독 상인단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한 듯했다. B.H가 아는 사실은 딱 거기까지. 꼭 누구 하나 잡아다 속까지 파헤칠 기세로 능글능글 덤벼오던 그 천체가 기어이 사고를 쳤을 때, 아칸서스는 주저하지 않고 B.H에게 암살을 맡겨버렸다.

 

  당시의 기억은 무료한 우주 속에서 필사적으로 흥밋거리를 찾던 나날들에 묻혀 있었다. B.H가 그 먼지 쌓인 생각들 틈바구니를 비집어 끌어올린 ‘첫 암살 의뢰’의 기억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어느 항성주의 죽음─블랙홀의 공간에서 찢어발겨 짐’으로 매듭지어졌다. 이 방법은 확실하긴 한데 너무 쉽단 말이지. 투덜거린 B.H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 앉아서 의미 없이 정장 마이의 손목 부분을 쓸어보기도 하고 구겨 보기도 한다.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흐트러진 머리칼 또한 차분히 정돈했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선글라스를 꺼내 쓰려다 불과 몇 분 전 얼마 쓰지도 못한 채 내던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누군가 잡아주지 않는다면, 어느 이름 모를 우주의 쪼가리들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공허를 유영할 그것을 떠올렸다. 눈을 가린다는 점이 묘하게 아칸서스 놈을 닮게 해 주었던 그 작은 물건을.

 

  무엇 때문에 아쉽고 무어가 그리 속에 콱 틀어박힌 건지, 그래서 결국 무엇으로 답답한 건지. 가늠할 수 없는 제 속이 지구 식 표현대로 ‘고구마 먹은 것’같아 괜스레 가슴팍을 한두 번 두드렸다. 그러고도 나아지지 않는 속은 상인단에게 미움을 산 천체가 무참히 부서질 때까지도 여전했다. 어느 한 항성주의 신체 일부였을 것이 미립자가 되어 날린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없던 양 자취를 감춘다. B.H의 눈이 그 일련의 과정을 집요하게 좇는다.

 

  “똑똑~ 계십니까?”

 

  바깥쪽에서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스며들어왔다. 블랙홀의 공간을 만드느라 한 꺼풀 덮어 씌워져 조금은 탁해져 버린 말이었다. 가만히 죽음의 순간을 목도하던 B.H가 고개를 돌렸다.

 

  “있는 거 알면서 뭘 물어.”

  “그럼 열어주시겠습니까?”

 

  외간남자랑 은밀한 공간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장난스레 키득거리는 아칸서스의 저음이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성의 없이 혀를 한 번 차준 B.H가 그보다 더 성의 없이 오른손을 휘저었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그가 들어 있던 장소의 한쪽 벽면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흠. 다행히 바람을 피운 건 아닌가 보군요. 아니면, 바람 다 피우고 벌써 죽여 없앴나?”

 

  그 예쁜 파란 눈과 딱 듣기 좋은 목소리로 한다는 소리가. B.H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어때요, 처리할 만했습니까?”

  “당연하지. 날 뭐로 보고! 시시하게 이딴 일 시키지 좀 마.”

 

  B.H의 투덜거림에 여전히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섰던 아칸서스가 한 발짝 움직였다. 할 만했다면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망설임 없이 B.H에게로 성큼 다가선다. 아직 해치려는 다짐도 세우지 않았는데 저를 바라보는 블랙홀의 표정이 이상하다. 때문에 웃음이 터져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 막은 아칸서스가 제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제가 말했잖아요.”

  “뭐, 뭐야, 뭘 하려고?”

 

  곧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 끝으로 가면을 짚어 지체 없이 벗어 던졌다. 달칵. 가면이 나뒹굴며 운다. 아칸서스의 오른손이 B.H를 다분히 신사적으로 잡아챘다. 그쪽 말고 여기. 그래요, 뺨 말고 입술이 낫지. 쪽.

 

  “뭐긴, 뽀뽀해 준댔잖아.”

편집자주 : 다시 보는 아트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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