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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시간. 자신의 아이들이 사는 곳을 한가하게 걸어보았다. 방독면을 벗고 있던 탓인지 점점 가빠지는 숨에 휴식을 취할 겸 자주 가던 바닷가로 향했다.

 

  파란 바다와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절벽에 걸터앉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저 절벽이었던 이 장소에는 검은색의 묵직한 도로가 덮여있었다. 꼭대기의 저택을 위한 것이리라.

 

  저택에는 남은 여생을 즐기기 위한 듯 다정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노부부는 넓은 바다의 자연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사랑했다. 일생동안 모은 돈으로 주변 땅을 모두 사들여 보호했다.

 

  덕분에 어스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휴식처를 지킬 수 있었다. 소금기가 묻어나오는 바닷바람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오자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나른해져 오는 몸에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갑자기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한 청년이 어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다가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이곳에 자주 오신다는 분이 당신이십니까?"
  "…?"
  "아, 저는 저 저택에 살고있는 사람입니다. 원래 사시던 분들이 부탁하신 것이 있어 이렇게 찾고 있습니다."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을 똑바로 바라봤다. 싱긋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런 상념은 다시 물어오는 청년에 의해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 인상착의로는 당신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자주 오시는 분이 맞으십니까? 그저 가만히 앉아있다가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절벽에 앉아 쉴만한 아이는 없기에 아마 자신이 맞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어르신들께서 한번 꼭 차라도 대접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자연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아…."

 

 

  악수를 나눈 청년은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돌아가셨지만… 자주 오시는 걸 많이 보셨다고 하시더군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택으로 초대해도 괜찮겠습니까?"

 

 

  정중하게 물어오는 청년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들리는 것 뿐이고…. 게다가 휴식처를 지켜준 그 부부에겐 감사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살짝 고개 숙인 청년이 앞장서 걸어나갔다. 애초에 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따라갔다.

 

  거세게 바위를 때리는 파도 소리와 점차 강해지는 바람이 발목을 끌어당겼다. 억지로 떼어내 힘겹게 발을 내딛기 무섭게 어스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밀려올 고통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허리에 무언가 휘감겨 우뚝 멈춰 섰다.

 

 

  "이런, 차로 모실 걸 그랬나요?"

 

 

  슬그머니 눈을 뜨자 청년의 억센 팔에 안겨있었다.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이며 허둥지둥 제자리에 섰다. 품속에서 칠판을 꺼내 들었다. 빠르게 글씨를 쓰고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감췄다.

 

 

  [고맙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걷기 힘드시면 제게 기대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거의 다 왔는걸요.]
  "그러시다면…."

 

 

  가볍게 미소 짓는 청년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뒤따라 걸었다. 방독면을 벗어두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저택의 문 앞에 도착하자 청년이 먼저 문을 열고 문 옆에 서 꾸벅 허리 숙였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ㄱ…손님."

 

 

보기와 다르게 아담한 크기의 저택에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하지만 따뜻함이 가득했다. 오손도손 지냈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푸스스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작죠? 어르신들께서 활동하기 편하시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쪽은 어르신들이 주로 있던 곳이고 모실 곳은 2층입니다."

 

 

  청년의 설명을 듣던 어스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쏠렸다. 하얀 문 아래로 붉은빛이 언뜻 비쳤다. 유독 그곳만 흘러나오는 차가운 기운에 무의식적으로 다가갔다. 손을 문고리에 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지고 아파왔다.

 

 

  "어스씨? 아, 그곳은 잠겨있습니다."
  [왜… 그렇죠?]
  "어르신들이 주무시던 곳인데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가실까요?"

 

 

  완전한 미소로 무장하고 어스를 바라보는 청년은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듯했다. 문고리에서 시선을 때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인 어스는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름을 알려준 적 있던가?

 

 

  "이쪽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차를 끓여 올라갈 테니 먼저 구경하시고 계시길."

 

 

  고개를 숙였던 청년은 뒤로 돌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자 넓은 창문으로 주변의 모습이 모두 보였다.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자 파도치는 모습까지도 한눈에 들어왔다. 뻥 뚫린 이 창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이곳에서 봤을터…인데. 풍경을 바라보던 어스는 순간 자신이 쉬던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곳에서 봤을 거라고 고개를 휘저었지만 아까 방문이 신경 쓰였다.
 

  붉은 액체. 내 이름을 알고 있던 아이.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날 봤다는 이야기.
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얼어붙어 버릴듯한 느낌에 몇 번 손을 움켜쥐었다.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다시 밖을 내려다봤다. 아래로 시선을 돌리자 작은 흙더미 2개가 눈에 들어왔다. 만든지 얼마 안 됐는지 풀이 자라지 않아 있었다.

 

 

  "어르신들의 무덤입니다. 이곳에 계시고 싶어 하셔서 모셔두었습니다. 여기."

어느새 옆에 차를 올려둔 청년이 조용히 말했다. 애매한 청년의 표정을 바라보다 칠판에 글씨를 적었다.

  [그 부부와는 무슨 관계이신가요?]
  "간병인으로 고용됐었습니다. 덕분에 금방 친해졌고 이렇게 여러 이야기도 듣게 됐죠. 그런데 당신도 요양 목적으로 오시는 겁니까?"
  [아…. 그런 셈이죠. 두 분은… 언제 돌아가셨나요?]

 

 

  어스의 질문에 힐끗 바깥을 바라본 청년은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답했다.

 

 

  "좀 많이 지났습니다. 것보다 이 차는 저택 정원에서 기른 찻잎으로 끓였습니다. 목에 좋다고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차를 조금 마셔본 어스는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입을 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부탁을 잘 거절 못 하시는 모양이군요."
  "….?"
  "아뇨.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의심 없이 오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만난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도 보일 정도인가? 우물쭈물 거리던 어스는 대답을 피하기 위해 연거푸 차를 마셨다.

 

 

  "그렇게 의심 없으실 줄 알았으면 진작…."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는 의미 모를 말에 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 차린 듯 어스와 눈이 마주친 청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어르신들 계실 때 한번 초대할 걸 그랬다는 말입니다. 오늘 오실지 몰라 준비를 많이 못 했군요. 다음번에 한 번 더 들러주시겠습니까? 어르신들의 부탁을 제대로 지키고 싶어서요."

 

 

  간절한 눈빛에 다시 마음이 약해진 어스는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부부를 위하는 아이가 다른 생각을 품을 리 없다며 자신을 안심시킨 어스는 이제 가봐야겠다며 일어났다. 청년이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다음번엔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다행이 잔잔해진 바람에 한결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어스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서 있던 청년은 문을 닫고 아까 잠겨있던 방문을 열었다.

 

  온통 붉은 액체로 범벅이 된 방안에서 청년의 모습이 변했다. 하얀색, 파란색의 눈 문양. 청년, 아니 상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얼굴을 덮었다.

 

 

  "성대하게 대접 할 테니. 다음에 꼭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인간들은 정말 더럽군요. 이렇게나 난장판을 만들다니. 치우기 귀찮게 말이죠."

-우리의 골디락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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