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 솔, 나는 네 그림자야.
- ….
- 나로 인해 네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영원토록, 그 미소를 간직하기를.
* * *
솔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욕설을 하는 아버지와 칼부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울고 있던 어린 시절의 솔을 바라보는 꿈을. 솔은 쉰 목에 울부짖으며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애쓰는 어린 시절의 저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용기 내 손을 뻗다가도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걷어내기를 수어 번. 솔은 익숙하게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허공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굉장히 밝은 빛 머리를 하고 있는, 어딘가 익숙한 모습의 여자와. 더 자세히 살펴 볼 틈도 없이 여자는 사라져버렸고, 이윽고 솔은 꿈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모습의 천장. 솔의 곁에는, 익숙한 형태의 인영이 곁을 지키고 있다.
- 악몽을 꿨구나.
천천히 눈을 내리까는 솔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이내 볼을 타고 내려가는가 싶더니 그 중심을 잃고 추락해 베개를 적신다. 자는 와중에도 울었던 것일까, 축축해진 베개가 솔의 몸을 무겁게 적셔 왔다. 자신을 끌어내린다. 또, 어린 시절의 나락으로. 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물로 인해 흐릿한 시야 사이로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의 형태가 보였다. 아레스. 솔은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어, 많이. 말하며 솔은 흐릿하게 웃었다. 형태-아레스는, 말없이 솔의 손 위에 가만히 제 손을 포갤 뿐이었다.
- 어릴 적 꿈을 꿨어.
- 저런.
아레스는 손을 뻗어 솔의 눈가를 살짝 눌렀다. 이윽고 흐렸던 시야가 조금 깔끔해졌다. 아레스의 얼굴이 제 시야에 들어오자, 솔은 그제서야 환히 웃음을 지었다. 악몽의 여파로 눈썹은 조금 찌푸려져 있었으나 그 표정만은 밝다. 내 그림자, 나의 아레스. 아레스의 볼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솔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지난 번 보단 괜찮아, 많이 나아졌어. 꿈 속에 나왔던 이상한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솔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 솔의 모습을 보며 아레스도 다행이네, 하고 말하며 눈을 살짝 접으며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에 솔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레스야, 아레스가 맞아. 그토록 기다리던, 나의…
- 보고 싶었어, 아레스.
- 내가 널 두고 어딜 떠나겠어.
나의 그림자. 웅얼거리며 솔은 아레스의 품에 안겼다. 난 너로 인해 행복해. 아레스가 듣고 기뻐할 말을 아레스의 귓가에 속삭인다. 경직되어 있던 아레스의 몸이 느슨하게 풀리자 솔은 안심하며 아레스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나 같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표정. 어느 때에는 그 모습이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섭지만, 간간이 솔을 보며 미소 짓는 그 표정에는 분명 솔만을 향한 정과 온화함이 들어 있었다. 솔은 마음이 안정됨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 누워, 편안한 자세로 아레스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다.
-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들고 왔어?
밤에는 빛이 없어 사라져 버리는 솔의 그림자- 아레스는, 몸이 약해 침대 곁을 벗어나지 못하는 솔을 위해 깊은 숲 속 밖까지 나가서 매일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 와 들려주곤 했다. 이야기는 여러 종류였고, 각각에 아름답고 슬픈 주인공들만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마치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내다 보는 바깥의 풍경처럼, 그 이야기들은 때로는 화창한 봄이 찾아오듯 푸릇푸릇했고, 때로는 폭풍우가 몰아치듯 잔인하고 아팠다. 솔은 봄 같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따듯하고, 모두가 행복해 지는 이야기.
- 음, 오늘은…숲 속 공주 이야기.
- 빨리 들려 줘, 듣고 싶어.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솔은 밝게 웃으며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레스도 따라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낮고 허스키한 음성으로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 옛날 달이 뜨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공주가 살았습니다. 그 공주에게는 공주를 보살피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림자는 공주를 사랑했습니다 . 아름다운 금발 공주가 사는 산 속의 밤에는 달이 뜨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자는 밤만 되면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그림자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슬펐답니다…
언제나 듣는 비슷비슷한 종류의 사랑 이야기지만 솔은 항상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동화 속 공주는 내가 아레스를 사랑하듯이 그림자를 사랑하고 있을까 ? 둘의 사랑이 이루어 질 수는 있을까? 속으로 상상을 해 가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림자는 공주에게 날마다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워, 어두운 동굴 속 나쁜 마법사에게 아주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 그림자는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 마법사와 거래를 했습니다. '내가 매일마다 당신에게 인간의 영혼을 바칠 테니, 당신은 내게 이야기를 하나씩 주시오.' 마법사는 그 거래를 마음에 들어 하며 그림자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언젠가 이 마을에 있는 모든 인간의 혼이 사라진다면, 나는 네 몸에 저주를 걸거야.'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웃었습니다.…
- 나는 항상 이야기 속 마법사들이 싫어. 못됐어.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들은 것은 예의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문득 드는 생각을 표출해내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솔은 조금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자가 불쌍해. 만약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해? 침대 위에 얹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아레스를 바라본다. 아레스는 그저 작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 그럼, 그만 할까?
- 아니야. 계속 해 줘.
…그림자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좋아, 그러면 됐어.' 그림자는 마법사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날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얻어 냈지요 . 불의 저주에 걸린 여자의 이야기, 숲 속 나무 이야기, 떡을 빚는 토끼 이야기 , 자신의 기사를 사랑했던 회색 빛 왕자 이야기 등등. 공주는 그 이야기를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좋아하는 공주의 모습을 보니 그림자의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을에서는 그림자로 인해 영혼을 빼앗긴 사람들의 가족들이 하나 둘 씩 마을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솔은 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묘하게 익숙한 이야기다.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이야기. 기분 좋았던 평범한 일상들이 깨질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아레스의 얘기를 그만 하도록 막아야 할 것 같았지만 아레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던 이야기. 마치 솔이 어릴 적에 겪은 듯한 익숙한 이야기이다. 솔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데자뷰…?
'에이, 설마.'
솔은 애써 그 생각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마을은 텅 비고 말았습니다. 마법사는 그림자에게 찾아 와 말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나는 네 몸에 저주를 걸 거야.' 마법사는 말하며 크게 웃었습니다. 그림자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하루만이라도 더 공주님과 보내고 싶어요.' 마법사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림자는 익숙하게 공주의 방에 찾아갔습니다. 달이 뜨지 않는 숲 속 깊숙이 위치한 곳. 공주는 자신이 살아 있을 적의 기억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있었…
- 그만, 멈춰!
솔은 다급하게 아레스의 말을 끊었다. 이제 그만, 이 이야기는 그만 들을래. 평소와는 다르게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서는 아레스의 팔을 붙잡는다. 더 이상 들었다가는 제가 못 견뎌 낼 것만 같았다. 익숙하지만 소름 끼치는 이야기들.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인데. 다시는 겪지 않아야 할…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어? 아레스는 옅게 웃으며 제 팔에서 솔의 손을 살짝 걷어 냈다. 미안, 오늘 얘기는 하나 밖에 없어서. 아레스는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넘기며 솔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들었니? 묻는 표정이 담담하다. 평소 같았으면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얘기를 가져올게, 하면서 웃었을 텐데. 솔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레스의 표정을 보니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 왜인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기분이 안 나네. 말하며 솔은 어색하게 웃었다.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가 떨렸다. 이불 위 움켜쥔 주먹도 따라 떨린다.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벙긋거리던 아레스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 솔의 머릿속으로 작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지쳐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울음을 터트려 내던 어릴 적 자신의 모습. 그 모습을 똑똑히 봐 놓고도 방관하던 그녀의 부모…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른기침을 뱉어, 살려 주세요, 하고 울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딸에게는 관심이 없는 부모의, 모습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솔의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천천히 펼쳐져 나갔다. 솔은 제 가슴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아파. 솔은 작게 신음했다.
- 아프니?
- 그냥, 가슴이….
- 기억했구나.
- 기억하다니, 뭘?
물어 오는 솔에게 아레스는 그저 작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야기의 뒷 부분, 조금 남았는데 안 들을 거야? 질문하는 아레스의 표정이 오늘따라 슬퍼 보였다. 그 얼굴에서 피곤함이 느껴진다. 마른세수를 하며 아레스는 쓰게 웃었다. 자꾸만 답답해져 오는 속에, 솔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 흐릿한 영상 속에 자신과 아레스의 모습이 비춰졌다.
아레스의 어깨를 붙잡으며 떠나지 말라고,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솔과 , 너는 내가 없어도 견뎌낼 수 있을 거야, 하고 아릿하게 웃는 아레스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그들의 틈 사이로 어느 순간 나타난 하얀 색 옷을 입은 마법사. 독특한 눈동자를 가졌던 그는 웃으면서 아레스가 아닌 솔에게로 향해 손을 뻗고 저주를 내렸다. 너는 평생 동안 단 하루만을 반복하면서 살게 될 거야. 일생 중 가장 끔찍할 시간을.
솔은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꿈에서처럼 마른기침을 뱉으며 허리를 꺾는다. 익숙한 고통. 언젠가 겪은 적이 있던. 금방이라도 머리가 깨져올 듯이 아파왔다. 아파, 아레스. 나 아파. 솔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레스를 불렀다. 아레스는 묵묵히 그런 솔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해 보지만 잘 안 되는 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린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 버렸네.
떨리는 손길로 솔의 머리를 쓸다가 아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은 점점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뱉는 숨 사이로 잔기침이 자꾸만 배어져 나왔다.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그 때 당시의 목소리들이 흩날려 나오고 있었다. 제발 그만, 이제 그만. 솔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기억 속의 제가 쓰러져가고 있었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대 위로 엎어진다. 기억 속의 아레스는 쓰러진 솔의 몸을 붙잡고 오열을 토했다. 내 몸이라고 약속했잖아! 내 몸이라고! 힘없이 늘어진 몸을 붙잡고 운다. 너는 쟤의 그림자니까, 네 몸은 곧 솔이나 마찬가지잖아! 깔깔대며 신나게 웃던 마법사는 이윽고 숲 속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홀로 남은 아레스는 쓰러진 솔의 몸을 붙잡고 계속해서 운다. 악몽 속을 반복하고 있을 솔의 모습이 끔찍하고 불쌍한지 계속해서 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다.
‘내가 다 되돌려 놓을게. 다시 처음으로… ’
솔은 제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짐작했다. 내 가장 끔찍한 순간, 아마도 그건. 솔은 조금씩 되돌아 오는 기억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어느 샌가 주위 풍경과 자신을 바라보는 아레스의 모습이 변형되어가며 익숙한 배경이 그녀의 주위로 나타난다. 데자뷰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 절대로 멈추지 않을.
* * *
- 아아.
이젠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솔은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솔은 꿈 속 공간 안에 있었다. 낡고 낡은 반지하 방. 이미 싸늘하게 식은 자신의 시체는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어머니가 날린 칼에 맞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원망하는 말을 뱉으며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깨진 파편들과 피가 낭자한 공간 속에서 솔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아레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레스는 조용히 어린 솔의 몸을 들어 올렸다. 머리에 손을 대고 무언가 읊어 대더니 작은 미소를 짓는다. 어린 솔은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살아난 것일까, 생기가 도는 표정으로 아레스를 보더니 방긋이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화답하며 아레스는 조용히 어린 솔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 솔, 나는 네 그림자야.
- ….
- 나로 인해 네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그랬었지. 솔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느 것보다 매혹적이고 잔인한 이야기가 여기 있었네. 영원히, 반복될. 솔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 제 손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공간은 바뀌고 있었다. 아레스는 어린 솔을 붙잡고 그 공간을 벗어났다. 다시 그 숲 속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아레스가 사라진 이후로 공간은 더 빠른 속도로 제 위치를 찾아갔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쓰러졌던 아버지의 시체가 벌떡 일어나고, 피투성이인 칼을 쥐고 있던 어머니의 손에는 날이 무딘 과도가 쥐어지고, 방금 전까지 아레스와 어린 솔이 있던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솔'이 태어나 쉰 목소리로 앙앙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솔의 몸은 점차 뿌옇게 흐려져, 이젠 마치 배경의 일부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솔은 마지막으로 눈을 들어 제 앞을 살폈다. ‘또 다른 자신’ 의 모습이 '또 다른 어린 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모든 상황이 일시정지. 이윽고 챙그랑, 하고 접시 깨지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자신의 꿈 속 세계가 시작되었다. 자신도 불과 몇 시간 전에 꾸었던, 그 끔찍한 꿈이. 사라지기 직전 솔은 또 다른 솔과 억지로 눈을 마주쳤다. 그 쪽에서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어쩐지 알아봤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자신을 바라보는 솔의 표정이 당황스러움에서 경악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틈에, 이쪽 세계의 솔은, 완전히 소멸했다.
* * *
솔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욕설을 하는 아버지와 칼부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울고 있던 어린 시절의 솔을 바라보는 꿈을. 솔은 쉰 목에 울부짖으며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애쓰는 어린 시절의 저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용기 내 손을 뻗다가도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걷어내기를 수어 번. 솔은 익숙하게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허공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굉장히 밝은 빛 머리를 하고 있는, 어딘가 익숙한 모습의 여자와. 더 자세히 살펴 볼 틈도 없이 여자는 사라져버렸고, 이윽고 솔은 꿈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모습의 천장. 솔의 곁에는, 익숙한 형태의 인영이 곁을 지키고 있다.
- 악몽을 꿨구나.
천천히 눈을 내리까는 솔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이내 볼을 타고 내려가는가 싶더니 그 중심을 잃고 추락해 베개를 적신다. 자는 와중에도 울었던 것일까, 축축해진 베개가 솔의 몸을 무겁게 적셔 왔다. 자신을 끌어내린다. 또, 어린 시절의 나락으로. 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물로 인해 흐릿한 시야 사이로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의 형태가 보였다. 아레스. 솔은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어, 많이. 말하며 솔은 흐릿하게 웃었다. 형태-아레스는, 말없이 솔의 손 위에 가만히 제 손을 포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