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어느 하루를 무작위로 골라 짚어도 늘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을 명왕성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하루를 마감하기 전 닉스는 여느 때와 같은 자세로 여느 때와 같이 눈을 감은 채 약간의 사색에 잠겨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물게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따금 답지 않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둥 가만히 있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곧 처음의 자세를 취하더니 잠잠해졌다.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지금까지 잠이 오지 않아 움직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꺼풀이 세상을 덮을 때 비로소 펼쳐지는 상상의 나라 안에서 아이는 무언가를 얻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골라질 때 닉스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간 건 카론이었다. 아이는 혹여 겨우 든 잠을 깨울까 노심초사하며 얇은 담요 한 장을 덮어주었다. 그러고선 잠시 주춤하더니, 살금살금 다가가 닉스의 옆에 앉았다. 아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은 카론의 귀를 녹였다. 괜스레 뛰는 심장에 카론은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붉어진 뺨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카론은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몇 번을 중얼댔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한마디씩 내뱉는 단어들이 간지러운지 온몸을 꼬아대는 아이를 보면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카론은 명왕성의 밤하늘에 크게 뜬 자신의 집을 바라보다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일어나 돌아섰다. 부디 아침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바라며.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들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 자신도 모르는 생각들이 나타나 그들의 무의식이 이런 것이라고 상기시켜준다. 흔하지 않은가. 하늘을 나는 것이 불가한 이들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든지. 닉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왕성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황홀한 색들이 가득한 공간에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몸을 감싸는 무언가는 포근해서 마치 누군가의 품 안에 안겨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몽글거리는 무언가가 정확히 어떤 이름으로 정의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중에 이와 같은 것을 꼭 찾아내겠다고 다짐한다. 금방 뭉개지고 또 금방 뭉치는 그것을 가지고 한창 놀고 있을 때 닉스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필시 카론의 것이었다. 자신의 무의식 속에도 이 작은 위성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인지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 때문인지 닉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것도 잠시. 언제 놀랐느냐는 듯 평소와 같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이것이 꿈인 것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닉스가 미소를 짓자 꿈속의 카론도 따라 웃는다. 그 순간 아이는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핵에서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따스함은 언제 느껴도 마약 같은 것이라, 혼란스럽고 정신이 아득했다.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체온의 변화를 느꼈는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쾅대는 소리가 들릴까 봐 닉스는 괜히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런데도 모자란 것 같아 자그마한 날개로 얼굴을 쏙 가리기까지 한다. 누군가가 보면 귀엽다고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듯한 장면이다. 하지만 혼자 흠칫하며 놀라다가 갑자기 웃고서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 당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닉스는 카론의 눈에 영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그대로 닉스에게 다가가 그 아이를 툭툭 쳤다. 닉스의 무의식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카론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 간단한 행동이 닉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카론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으나 그 손이 자신에게 닿음으로써 닉스의 이성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닉스는 카론의 작은 몸을 붙잡았다. 카론은 짐짓 놀라며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닉스가 먼저 선수를 빼앗았다. 이미 닉스에게 이 공간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있었다.
"좋아합니다!"
카론의 검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에 못지않게 닉스도 놀란 듯 보였다. 자신도 이것을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그, 저기, 그, 어'를 몇 번씩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닉스의 볼은 제 주인의 눈동자만큼이나 붉게 변해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카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던 걸까. 그러면서도 아이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카론의 눈치를 살폈다. 돌이라도 된 듯 그 자리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카론에 닉스가 살며시 눈동자를 굴려 그 아이와 눈을 맞댔다. 카론의 눈동자에는 어떠한 빛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마치 경멸한다는 듯, 업신여기는 듯.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더럽다고 써진 상대의 표정을 제정신으로 보는 건 정말이지 못할 일이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장난치지 마."
닉스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좋아한다는 그 짧은 한마디를 내뱉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표정을 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나오는지. 닉스는 이것이 꿈이라고, 제 자리를 찾아온 이성에 되새겼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현실'이라고 자각해버린 공간을 꿈이라고 부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타이밍 좋게 머리에 떠오르는 어느 고약한 자가 말한 한 문장. 생생한 꿈은 현실이 된다고. 주위를 덮고 있던 몽글거리고 포근한 것들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대신에 불투명한 벽과 천장이 그들을 에워쌌다. 카론은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며 닉스에게 말을 건네왔다. 닉스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반응 없는 상대에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떼었다. 닉스에게로 오려는 듯 보였다. 사방이 막힌 것 때문인지 공기를 가르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렸다. 닉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떼어냈다.
담요를 덮어주고서도 추운 곳에 내버려두고 왔다는 것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론은 다시 닉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까의 그 상태 그대로 자는 닉스에게 자신의 이불을 덮어준 카론은 바람구멍이 하나라도 있지 않게 담요 한 장을 또 덮어주었다.

멀리서 본다면 하나의 바위로 보일 정도다. 숨구멍도 막아버린 카론은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웃었다. 그때였다. 이불에 묻혀버린 아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게 손대지 마세요." 동시에 카론의 동작이 멈췄다. 반 자동적으로 닉스에게서 열 걸음은 떨어져 주저앉은 카론은 멍하니 닉스를 바라보았다.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약간의 현실 부정과 함께 말을 걸어보는 카론이다. 닉스의 이름을 살며시 부르니, 시리도록 아픈 말이 돌아왔다.
"당신… 미워요…."
잠꼬대가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나올 수 있다니. 분명 순간의 여신은 카론의 편이 아닐 것이다. 카론은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기분을 느꼈다. 울컥했다. 곧 아이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결과이지. 자신이 좋아하는 이에게 모진 험담을 들었는데 어찌 제정신일 수 있겠는가. 카론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소리 없이 절규의 말을 외쳐댔다. 카론은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 같은 거 평생 오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이 모진 우주가 누군가의 바람을 들어준 적이 있었던가. 밤을 꼬박 새워 아침이 오지 말라고 기도하였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오랜만에 얼굴을 내비친 태양이다. 카론은 원망스런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환해진 세상 때문에 슬픈 얼굴이 그대로 드러날까 두려웠다. 아침을 먹을 때가 된다면 모두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 텐데! 한 끼 정도는 걸러볼까 생각도 하였지만, 배가 고프다 못해 쓰리기 시작하여 카론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명왕성으로 향하였다. 아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질이란 말인가. 한숨을 내쉬며 지나가는 갈림길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는 분명 새의 그림자. 닉스였다. 카론은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두 올씩 빠져있는 깃털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자기 자신을 탓했다. 허나 그것이 안 됨을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던 카론은 그만 닉스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닉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론에게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상대가 눈까지 매섭게 치켜뜨고 다가오니 할 수 있는 건 뒷걸음질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등이 벽에 닿자, 카론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닉스는 옴짝달싹도 못 하는 카론에게 다가가 아이의 바로 옆 벽을 세게 내리쳤다. 그, 그러니까 이걸 벽치기라고 하던가? 카론이 머리를 굴려 언젠가 본 적 있는 자세의 명칭을 떠올리려 노력해보았지만 그건 뒷전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분홍색의 새가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카론은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이내 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알고 있죠?"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면 당장에 살육이 일어났을 것 같은 표정과는 딴판으로 닉스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카론은 눈을 떴다. 뜨자마자 얽히는 시선에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아, 다 알고 있고말고. 카론은 나지막이 긍정의 답을 표했다. 새벽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걸 모르면 바보겠지. 아이는 씁쓸함을 집어삼켰다. 굳이 확인 사살시켜줄 이유가 있느냐며. 닉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색하고 무겁기만 한 공기가 짙게 깔렸다.
"같은 대답을 할 건가요?"
애매한 분위기 안에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카론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다. 닉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건 닉스의 눈시울이 매우 붉게 변했다는 것이다. 카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나쁜 놈으로 몰린 것 같았다. 아이는 먼저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뭐든 잘못한 게 있다면 먼저 푸는 것이 상책이리라는 기특한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니, 그저 좋아하는 아이에게서까지 미움받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을까. 카론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시의 정적은 마치 카론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후, 속으로 자신을 달래며 카론이 소리쳤다.
"좋아해요."
"미안해!"
순간의 여신은 정말 평생 카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모양인가 보다. 카론의 동공이 흔들렸다. 닉스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서 놀란 것이 첫 번째요 이 운명 같은 타이밍에 분노하는 게 두 번째라. 카론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섞였다.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찾는 듯했다. 그럼 뭐하나, 이미 닉스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데. 카론이 당황하며 손을 뻗었지만 됐다며 차갑게 말하고 돌아서는 닉스에게 상황을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급하게 닉스의 손을 잡은 카론은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말을 더듬던 겁쟁이는 어디로 가고. 대체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난 것인지. 카론은 그 상태 그대로 소리쳤다.
"나, 나도! 좋아해…."
끝으로 갈수록 작아져 귀를 기울여만 들리는 목소리가 흠이었지만, 닉스의 정신이 번뜩 뜨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충분하고도 남았지. 눈에 남아있던 눈물 한 조각을 떨어뜨린 닉스가 카론의 눈을 응시했다. 카론의 정신은 가출한 지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엄청나게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우는 듯 웃는 듯, 찡그린 듯 기쁜 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가득 담은 얼굴은 누가 보아도 배를 잡고 웃어댔을 것이다. 닉스 또한 눈웃음을 지었다. 꿈은 꿈일 뿐이라고,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던 새벽이 떠올랐다. 아이는 카론을 꼭 껴안았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드는 감정의 포만감과 돌아오는 따스한 색채는 이 추운 명왕성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나 둘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꿈보다도 더 꿈같은 이야기.
어린 날의 짧은 마법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