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지구의 어느 곳이었다. 자칫 쌍둥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유사한 외모를 지닌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금 특이한 머리의 두 남자의 정체는 약간의 불미스러운 사고 이후 지구에 정이 들었다며 이곳에 눌러앉으려는 B.H와 W.H였다. 각자의 본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물론, 자신이 별일 적의 이름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홀즈들의 왕이자 부모나 다름없는 대홀즈가 지어준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홀즈 중에서도 그들만이 유일했다. 이쯤 되면 미운 정이라도 들었으련만, 무엇이 그리도 서로를 아끼던 그들의 사이를 틀어지게 한 건지, 다른 이들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초기 홀즈일 적에 상당히 사이가 좋았고, 죽고 못 살 정도로 서로를 아껴주었다는 소문이 근근이 돌고 있었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조금 둘의 사이가 이상하다며 의아해하는 이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장난'을 빙자한 싸움이 잠시 멈춘 시점은 언제였을까. 아아 그래, 때는 봄이었다.

 

 

 

  지구의 만물이 다시 몸을 틔우고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는 계절. 봄을 알리는 듯한 따뜻한 바람이 홀즈랍시고 그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W.H를 스쳐 지나갔다. 하늘은 꾸물거렸고, 습기가 있었다. 아마 비가 오려는 듯했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못 해도 소나기겠지요, B.H."


  비를 피하세요.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실 겁니까. 흰 머리의 사내는 조용히 뇌까렸다. 그와 똑같이, 그러나 정반대의 색을 지닌 이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쳐대는 것이었다.


  "눈도 못 마주치는 주제에, 감기라고? 지금 네가 나를 걱정한다고? 웃기지도 않아. 그토록 짝꿍 짝꿍, 앵알대면서 너는 나를 감시했잖아. 그렇지? 내가 어딘가로 튀지 않도록 너는 언제나 내 곁에 다니며 시시한 것마저도 일일이 너의 상관, 대- W.H님께(이 때, 검은 머리의 사내는 아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빈정거리는 어조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내는 마치 광신도가 신을 찬양하기라도 하듯 손을 허공에 대고 뻗으면서 '대W.H' 이라는 단어를 길게 늘여 뜨려 발음했다.) 일러바쳤겠지. 그렇지?"


  조용했다. 잠시의 정적이 이어졌다. 거짓이 아니었으므로 흰 머리의 사내는 부정도, 그렇다고 긍정도 할 것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아마 속된 말로, 이런 '갈굼'을 당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익숙한 듯했다. W.H는 침착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와그작, 소리가 날 만큼 B.H는 W.H의 반응에 얼굴을 구겼다. 하. 어이가 없군.


  "정말 그랬어? 정말 그렇게, 그렇게 일러바친 건가?"

 

  나는, 네가, 정말, 싫어. 짓씹듯 말 마디마디 하나에 힘을 주어가며 이를 악물고 저를 바라보는 제 분신에, 파트너를 W.H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담담히 서 있었다. - 벙어리라거나, 귀머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하나 표정 변화 없이 그 아플 말을 조용히 담고 있었다. - 저도 압니다. 상처가 될 말들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난 후 W.H가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진심이 담긴 가장 무거운 말이었다. 그에게는, W.H에게는 이런 것이 일상이었다. B.H가 과거를 제게 물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리도 오랜 세월일 줄은 예상 못 했다만. 언제나 들어온 말이었고, 언제나 익숙한 듯이 받아쳤지만 남아있는 자잘한 상처들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하고도 깊은 것이라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B.H는 온갖 짜증이란 짜증은 모조리 내면서 저를 피해 다른 곳으로 -아마 B.H, 그만의 공간일 것이다. 그의 파트너인 W.H조차 오지 못하는 곳, (물론 마르스는 자신이 갖고 있던 능력을 이용해서 제 집 드나들듯 마음껏 들락날락한다. 하지만 그 능력은 그가 그다지 사용하기 아니하기 때문에 B.H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잠깐, '그 때' 를 제외하곤.) 그곳을 B.H는 선호했다. 사이가 틀어지기 이전부터 그는 자신만의 공간을 항상 필요로 했다. - 발걸음을 옮겼다. 어찌 되었든 비를 맞는 것은 싫은 듯했다.

  투둑.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소나기로 끝났으면 좋겠으련만, 이라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해대면서 흰 단발머리의 그는 가만가만 비가 내리는 길을 걸었다. 조금 널널하니 여유 공간이 있었던 옷이 물기에 의해서 제 몸에 붙고 흰 머리칼은 끝이 곱슬 거리며 볼에 붙었다. 차가운 액체가 저를 타고 흘러내려 몸을 적시는 것이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소름이 돋는 것이 꽤나 좋았기에 W.H는 비를 피하려는 기색조차 없이 그대로, 고스란히 제 몸을 비에 맡기었다. 비가 오기 때문일까, W.H는 유난히 제 마음의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었다. 수많은 홀즈들의 앞에 당당히 웃으며 서로를 그토록 아끼던 때는 과연 언제였을까. 사실 꿈이 아니었을까? 아아. 아마도 자신이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 모두 거짓이었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었으나 부정하였을 뿐이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과거의 제 짝을 지킨답시고, 규율에 따라 입을 다물고 그와 멀어진 것은 다름아닌 자기자신이었다.

 

  권태 끝의 우리, 끝내 전하지 못한 말,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 아마도 그것은 앙금?

 

  "미친놈."

 

  청승맞게 비나 맞고 있냐. 너 어디 가서 내 파트너라고 하지 마라. 쪽팔려. 수많은 자책과 조금만이라도 닿으면 숨이 막힐 듯한, 눅진눅진한 그 무언가가 제 숨통을 막아버릴 즈음 짧은 욕설과 투덜대는 듯한 특유의 말투가 제 뒤에서 들려왔다. 숨이 단박에 트여왔다.

 

  그의 짝, B.H였다.

 

  "…비를 싫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사색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저리 가세요.

  너에게 한 번 더 죄책감을 퍼붓고도 다시 한 번 독설을 내뱉는다. 사실은 아니야. 밀어내려는 것이 아니야. 방해될 리가 없잖아.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인데.

  W.H는 덤덤히, 슬쩍 웃어보려 하였다. 그러나 어쩐지 울컥 올라오는 응어리에 그는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못하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했다. 이런 얼굴을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눈을 감은 것이 더 나으리라. 그리 판단하였더랬다.

 

  "얼른 떠나버리세요. 썩 꺼져주세요."

 

  가지 마세요. 곁에 있어 주세요.

 

  "너는, 나를 증오하는 거야?"

 

  단순한 착각인 걸까, 물기를 잔뜩 머금은 애련한 목소리였다. 마치 연인에게 하듯 절절한 목소리였다.이 모든 착각은 날씨 탓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대체 당신은 나에게 왜? 어째서¿

 

  "물론입니다. 모든 이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도 당신만은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안타깝게도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당신이 제 곁에 아무도 없다 생각할 때도 언제나 지켜볼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그 누구도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당신만은 떠올릴 만큼. 연모합니다. 당신은 내 존재 의의이니. 그는 절대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닫아버린 눈꺼풀을 타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W.H는 눈을 느릿하게 떠 창백히 질린 손끝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차다 못해 저릿거리고 있었다. 속눈썹에는 빗방울인 듯, 물방울이 조금 맺혀있었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니, 아직 끝내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였다. W.H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갈등을 인제 그만 매듭짓고 싶었다. 다 거짓말입니다. 아니에요. 싫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의 너는 너무나도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존재였으므로. 나는 너의 분신이었으므로, 나에게 맑은 눈으로 저의 존재를 묻는 너를 보며 나는 그저 숨을 죽이고, 눈을 피하며 제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합니다."

  W.H는 이 이야기를 끝맺기로 하였다. 아니, 끝맺어야만 했다. 어디까지나 B.H는 자신의 분신이자 파트너였으므로.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기 때문에.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비밀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모른다. 이런 별 쓸모없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미안합니다.

 

 

 

 

* * *

 

 

 

  비가 내렸다. 완연한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봄비 특유의 꽃내음이 만발했다. 죽은 별과 다시 태어난 존재와 그의 분신. 그들은 비를 맞으면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반대라고 생각될 정도의 다르지만 같은 그들이었다.

 

  "망할 놈. 거지 같은 놈. 뒤에선 나쁘다며 씹고, 앞에선 착한 척했어. 위선자. 너무… 너무하잖아. 나는 너밖에 없는데. 순수했던 그 마음은, 재투성이 심장은 여러 번 굴렀지. (검은 머리의 사내는 일그러진 제 짝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알아. 역겹지? 나도 내가 참 역겨워."

 

  사실은, 좋아하고 있었어. 나의 짝꿍인 너를. B.H는 입술을 짓씹고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아, 맙소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수어년의 세월 동안 나는 너를. 너를. 당신을. 습기가 가득한 세상에서, 계속 비를 맞고 있다 보니 제 눈에도 습기가 차올라, 비가 된 듯했다. W.H는 혹여 이게 닿으면 순식간에 스러질 꿈일까,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자신을 좋다 말해주는 너와 어찌 닿고 싶지 않을까. 그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듯, 어미가 새끼를 안 듯 부드러이, 찰나의 순간에 제 짝을 껴안았다. 저도. 저도 그렇습니다.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벅차, 끝끝내 삼키려던 응어리를 결국 뱉어내었다. 여러 가지로 퇴색된 감정이 비에 의해 씻겨가 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비가 내렸다. 꽃내음이 났다.

비는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비가 멎었다. 주변의 꽃은 물기를 함뿍 머금어 더욱 싱싱하고 고운 자태와 함께 애련한 향을 내었다.

 

  "…시금치한테 가서 꽃이라도 한 다발 빼앗아올까?"

 

  봄이잖아. 꽃구경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우리도 즐겨봐야 하지 않겠어?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비가 내렸다. 꽃내음이 났다.

하늘이 맑게 개었다.

 

Contact Us via TWITTER @kcs91139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