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어머니로부터, 혹은 함께 자라온 친구이자 형제들로부터 어린 태양이라 불리는 청년은 스스로를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다 생각한 적은 있으나 결코 이렇게 무력하단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한 은하의 중심이자 여왕인 청년의 어머니는 품은 강력한 힘과 달리 싸움을 즐기지 않았기에 청년의 스승이 되어주지 못했다. 청년에게 싸움을 가르친 건 태양계를 지키는 수호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강하고, 또한 엄격했으며 상징과도 같은 머리칼처럼 그녀의 양 손에서부터 타오르는 붉은 불꽃은 강렬하고 매서웠다. 태양을 품은 청년마저도 그 불꽃 앞에선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르침을 받은 건 청년 한 명만이 아니었지만 함께 받은 이들 중 청년이 가장 두각을 보였다. 품은 힘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강한 것도 한 몫을 했지만 청년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성실함을 스승은 칭찬했고 그의 마음을 어머니는 지지해주었다.
청년, 선은 스스로의 강함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좁은 오만이 어리석고 한심했다.
맑은 쇳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진 검의 자루에는 피가 엉망으로 묻어있었다. 스스로 빛나는 태양의 힘에서 태어난 선은 쉽게 상처입지도, 상처가 나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선의 손에 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특히 심한 것은 왼쪽 손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아문데다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었을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조금만 충격을 줘도 상처가 터져 피가 배어나왔다. 줄 곧 상처를 봐주었던 헤르메스로부터 다시 훈련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무리해선 안 된다는 당부를 귀 언저리에 새기고 또 새겼더란다. 선은 덜덜 떨리는 오른손으로, 마찬가지로 떨리는 왼손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손바닥을 전부 감싼 붕대가 터진 상처에서 베어 나온 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치고 올라오는 아픔에 입술을 깨문 선은 시선을 돌려 내팽겨진 자신의 검을 보았다. 피로 얼룩진 칼자루와 달리 날은 베어야 할 것을 찾는 것 마냥 서늘히 빛나고 있었다.
선은, 자신을 베었던 그 날카로운 무기를 다시 떠올렸다.
* * *
또 다른 아버지이며 오래전부터 그들을 지켜주던 중후한 별이 저들을 향해 주저 없이 그의 오랜 무기를 휘둘렀었다. 하데스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낫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형제들이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하데스의 낫에 베인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고 반대로 상처 부위로부터 스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점점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너덜너덜해진 온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그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반대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몸의 통증과 심정의 초조함은 점점 동작을 단조롭게 만들었고 나중에 하데스는 선을 보지 않은 채 그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쳐가는 와중 세럴과 먼의 협공이 먹혀들어 하데스가 낫을 떨어뜨린 건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육중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맑은 쇳소리를 내며 떨어진 무기가 눈에 들어온 순간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투스였다. 선을 부르는 절박한 외침은 순식간에 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해주었고 빠르게 달려가 거대한 낫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선을 압박했지만 그 이상으로 이 무기라면 하데스에게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거침없이 치고 올라오는 고통에는 눈 돌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무기를 휘둘렀을 때, 선은 분명히 하데스의 얼굴로부터 낭패를 보았었다.
승산을, 보았었다.
그 다음 선의 머리를 뒤흔든 건 덜스의 비명이었다.
언제, 어떤 공격에 정신을 잃었는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무겁게 짓누르는 몸을 애써 움직여 형제들을 찾으니 모두 정신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비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겨우겨우 시선을 돌린 선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을 떨었다.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하데스가 처음과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제 앞에서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팔을 붙잡고 비명을 토하는 덜스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 속에 든 희열을, 죽음을 향한 확신을, 선은 먼 거리에서도 알 수 있었다. 높이 치켜든 낫의 끝이 덜스를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은 피를 토하며 멈추라는 비명을 토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 *
당장이라도 토해질 것 같은 욕지기를 애써 삼키며 피로 얼룩진 양 손을 강하게 쥐었다. 상처의 아픔보다 몸 속 깊숙이 부터 솟아오르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에 참기 힘들었다.
그 날, 끔찍한 무력함과 죽음의 공포에서 떨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은 형편없이 땅에 떨어진 이 검과 같았다.
“그러다 또 상처 벌어진다~.”
“벌어진다가 아니라 벌어졌잖아.”
“선 무리 했다간 헤르메스님께 혼날 걸?★”
“!”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상념으로부터 빠져나온 선은 입구에서 걸어오는 세 사람의 모습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선과 마찬가지로 온 몸에 붕대와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투스와 덜스, 그리고 세럴이 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왔는데 예상치 않은 이들의 등장에 할 말을 잃은 선을 보던 투스가 갑자기 개구지게 웃었다. 그리곤 한쪽 발목을 심하게 다쳤다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발 빠르게 달려와 선의 이마를 장난스럽게 한 대 툭 치며 그를 또 불렀다.
“얌마 정신 차려!”
생각보다 손이 매운 투스 덕에 반쯤 정신을 차린 선이 빨갛게 된 이마를 쓸며 물었다. 아니, 생각으로만 맴돈 질문이 투스의 손 덕분에 튀어나왔다고 보는 게 옳을 거다.
“여긴 왜……?”
“너랑 같은 이유지★”
목을 심하게 다쳐 심하게 긁힌 소리인데도 평소와 다름없는 밝기가 느껴지는 세럴의 말에 선은 눈을 크게 깜박였다. 가장 회복이 빠르다는 선이 이제야 겨우 훈련을 허락 받았다. 훈련은커녕 재활도 큰 무리를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른 세 사람이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 썩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선은 손을 크게 휘저으며 셋을 서둘러 병실로 보내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누군가 그의 팔을 잡지 않았다면 선의 입에서는 걱정 어린 말이 한참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선 못지않게 한 덩치를 자랑하는 덜스가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던 선은 평소처럼 미간에 잔뜩 주름을 단 채 무시무시한 중압감을 내는 덜스의 행동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덜스?”
“그 쪽이 아니야.”
덜스는 짧고 간결하게 말을 끝내고 곧게 선을 바라보았다. 마주쳐진 같은 색의 눈동자에 선은 숨을 삼켰다.
얼굴에 반을 덮은 붕대에 숨어 한쪽만 날카로이 빛나는 눈동자의 색은, 담긴 마음은, 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날의 무력감을 향한 분노이며, 약한 자신을 향한 분노이며, 지키지 못한 양 손을 향한 분노였다. ―두려움을, 분노로 애써 감추고 있었다. 크게 타오르는 분노와 초조함 아래에는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압도적이리만치 강한 상대였다. 긴 세월 언제나 등 뒤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며 언제든 잡을 수 있던 주름진 손이 그 순간 어떠한 것보다도 강한 공포로 다가왔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데스를 막아서기 위해 움직였다. 자만보단 그 손을 두렵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메말라버려 흔적조차 사라진 꽃밭의 중심에서 죽음을 빚어 만든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믿었기 때문에 손을 뻗었다. 처참한 첫 번째 실패의 결과는 생각보다 참담했다. 압도적인 차이에 승기를 잃은 마음은 그럼에도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몸뚱이를 움직였을 뿐이었다. 한 번, 한 번, 몸에 상처가 생길 때마다 마음은 공포란 이름의 칼날에 찔려 넝마 꼴이 되어갔다. 깜깜해지는 눈을 힘겹게 뜨고 주저앉고 싶다 말하는 다리를 억지로 내디뎠다. 공포를 이겨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형제의 안전과 무력한 자신을 향한 분노를 부추겼다.
그런들 깨달은 건 결국 이 공포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선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비통하게 일그러진 표정은 몸을 회복하는 내내 병상에서 홀로 짓던 얼굴과 같았다. 상처투성이 손아래 얼굴을 숨기며 눈물짓는 밤 속에서 선은 공포에 짓눌렸고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기 위해 방을 빠져나와 검을 휘둘렀다. 어리석었지만 선에겐 최선의 방법이었다.
“한심하지?”
자조적인 말에 덜스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어.”
쓴 한숨과 같은 말이었다.
선과 마찬가지로 강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힘에 대한 자부심이 큰 덜스에게도 그 날의 일은 큰 굴욕이며 동시에 공포였다. 온 힘을 다한 공격들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고 무력하게 짓밟히고 상처 입었다. 무감정한 붉은 눈동자 아래에서 다가오는 죽음에 비명을 지르던 순간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끔찍했다. 공포에 발이 묶인 감각은 무척이나 초조했고 이대로 멈춰버릴 것 같아서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게 만들었다.
덜스는 그것이 공포를 이기는 것이 아닌 도망치는 것뿐이라는 걸 겨우 알았고 그게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지 알았다. 그는 선이 그러길 바라지 않았다.
“도망쳐선 이길 수 없어.”
“실패해버려서, 쉽지 않아.”
어울리지 않는 힘없는 대답에 덜스의 미간에 주름이 조금 깊어졌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깁스로 단단히 고정된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렸으니 그 고통은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올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안정을 취해야한다고 당부하신 말과 함께 들은 상처들은 덜스 스스로가 정말 안 죽고 살아남은 게 기적이 아닐까,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했다. 바로 곁에서 함께 듣고 있던 제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덜스 역시 이번만은 무모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새길 정도였다. 선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가족을 아끼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뛰어난 회복력을 앞세워 덜스보다 더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경향이 있는 그가 이번이라도 그러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데스의 낫을 빼앗아 그를 향해 내리친 순간 선을 덮친 하데스의 그림자는 먼 곳에서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흉흉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거대한 물살과 같이 선을 완전히 덮어버린 다음 사라졌을 때 흡사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쓰러진 선의 모습에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쓰러진 선을 유유히 지나 낫을 주워든 하데스를 향한 공포 속에서도 덜스는 이를 악물고 선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처참했다. 하지만 만약 덜스가,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달려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선을 붙잡고 설 수 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단단히 팔을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나무와 같이 곧고 단호한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맞서다 실패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야.”
“……그런가.”
희미하게 뱉어낸 말을 끝으로 선은 고개를 숙였다.
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덜스는 피로 엉망이 된 선의 붕대를 보곤 짧게 혀를 찼다. 한층 팍 구겨진 인상 덕에 더더욱 험악한 얼굴이 되었지만 걱정이 받침이 되어 있는 걸 아는 선은 순순히 그의 살벌한 걱정에 고개 숙였다. 미안, 너무 희미하지만 무모했던 분노가 빠진 목소리에 덜스는 콧방귀를 한 번 끼는 것으로 대답을 돌려줬고 투스가 킬킬대며 언제 챙겨온 건지 모를 구급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순순히 투스에게 양 손을 내미니 손재주 좋은 그가 능숙하게 붕대를 다시 감아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니지.”
“응?
“실패했을 때 말이야.”
선과 마찬가지로 양손 모두 손가락까지 전부 붕대로 칭칭 감겼음에도 붕대를 감는 손엔 거침이 없었다. 투스의 손에서 한참동안 시선을 때지 못하던 선은 문득 고개를 들어 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탓에 선글라스 안쪽의 눈동자가 훤히 보였다. 선과 덜스와 같은 색의 눈동자지만 선은 종종 투스의 눈은 약간 다르다고 생각했다.
“실패하면 무섭고 갑자기 눈앞이 막막해지기 마련이야. 솔직히 말해서 주저앉아도 비난하기 힘들지. 덜스 저 녀석이야 풀떼기 주제에 안 어울리게 투쟁심이 활활 타오르니까 멈출 생각을 못하지만 넌 아니잖아.”
붕대의 끝을 강하게 묶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 투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선을 바라보았다. 주일들 중에서 가장 큰 덩치가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며 잔뜩 움츠러들었었다. 퍽 웃긴 모습에 투스가 올라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크게 뱉으며 선의 등을 강하게 쳤다. 안타깝게도 아픔은 선의 등보다 투스의 손이 더 심했는데 한참동안 손을 부여잡고 바닥을 굴러야했지만. 아예 눈물까지 단 투스가 다시 자세를 고치며 말을 이었다.
“그, 그냥 혼자 머리 싸매지 말라는 거야. 너 자주 말하잖아? ‘피할 수 없다면 함께 나눠야지 괴롭지 않다!’고 말이야!”
투스는 평소처럼 개구지게 웃었다.
장난스런 곡선 아래의 두 붉은 눈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같이 결코 꺼지지 않는 매서운 불꽃을 가진 그는 종종 선 보다 더 크게 빛을 바라며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영특하고 요령이 좋은 만큼 주변 일에 설렁설렁 대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성실히, 그리고 완벽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음을 선을 알고 있었다.
가슴을 채우던 먹먹한 초조와 공포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것처럼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상쾌한 찬바람과 같은 안도에 선은 다시 단단히 붕대가 감긴 손을 조심조심 쥐었다 폈다. 쓰라린 소독약 위로 단단히 고정된 양 손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늘 조용한 헤르메스가 칭찬해 마지않는 깔끔한 솜씨에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당연하지.”
정리를 끝마친 구급상자를 작게 연 포탈 너머로 집어 던지다시피 하며 투스가 대답했다. 어련하실까, 조금 가벼워진 마음처럼 거뜬히 자리에서 일어난 선은 보며 투스가 또 그 등을 팡팡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순둥한 성실이가 왜 가끔 이렇게 폭주를 하냐?”
“마음이 초조해졌나봐.”
“야야야! 주말이, 그것도 일요일이 마음이 초조해지면 평일들은 어떻게 살겠냐?”
“맞아, 주말은 한가하게 쉬어야지★ 바쁜 건 평일들로 충분해★”
“넌 좀 바빠 봐라, 이 도넛중독아.”
“너야말로 일 좀 미루지 마, 풀떼기★”
“풀떼기라고 하지 마!”
하하하하, 평소와 다름없는 소란 속에서 선은 솔직하게 웃어준 다음 천천히 숨을 쉬었다.
창문을 닫아버리면 다시 탁한 공기가 방을 채우는 것처럼 제 마음에서 일시적으로 사라진 초조와 공포는 금방 또 마음속에 자리할 것이다. 한 번 자리한 그것을 버리는 것도, 잊는 것은 어려운 말이다.
같은 마음이라고 세럴은 말해주었다. 초조도, 공포도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덜스는 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도망쳐선 안 된다는 엄한 말이었지만 몇 번이든 실패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투스는 아픔을 나누라 이야기 해주었다. 같은 고통을 당한 형제들의 아픔을 빨리 덜어주고 싶어 무리하게 일어나려 했던 선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선은 무모한 분노 대신 땅에 떨어진 너저분한 검을 집어 들었다. 엉망이 된 칼자루 부분을 닦아내고 다시 고쳐 잡으며 순순히 칼집 안에 되돌렸다.
“훌륭해★”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은 세럴의 말에 선은 솔직하게 웃었다. 밝은 모래색의 머리는 선 대신 옆에 있는 덜스가 얄밉게 한 대 때려주었으니 대신 선은 가볍게 발을 구르며 달릴 준비를 했다. 또 덜스가 짧게 혀를 찼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그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 앉아 선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주섬주섬 열어놓은 포탈 안에서 뭔가를 꺼내온 투스가 또 순식간에 선의 앞까지 뛰어와서는 물었다. 자세히 본 그의 손 안에는 애용품인 태블릿 PC와 다른 종류의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얼마냐 뛸 거냐, 며 묻는 투스에게 선은 어깨를 으쓱이며 헤르메스의 말을 전하고 적당히 풀린 다리로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로부터 이미 늦은 것 아니냐는 투스의 장난스런 외침이 들려서 선은 또 한 번 웃었다.
* * *
“아까 저 녀석 뭐라고 했다고?”
“‘헤르메스님이 무리는 금물이랬어.’ 라고 하셨다!”
“지금 저거 13바퀴째야★”
역시 가져오길 잘했어! 태블릿PC를 흔들며 자화자찬에 입에서 침이 마를 줄 모르는 투스를 고이 무시하며 덜스는 여전히 멈출 줄 모르는 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일들 중에서 유독 회복력이 빠른 선과 먼이 벌써 외출 허락을 맡은 상태라지만 이쪽은 아직 걷는 것도 힘든데 저렇게 뜀박질을 하는 걸 보면 자존심이 조금 상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걱정되었기 때문에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지만 눈만은 계속 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 손에 쥘 정도로 알기 쉬운 덜스의 옆에서 세럴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사이 또 어디서 챙겨온 건지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뺨이 꼭 햄스터처럼 빵빵하게 부풀리며 도넛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코에 확 들어오는 단내에 그를 바라본 덜스가 기가 막힌 얼굴로 말했다.
“잘도 먹네.”
“안줄 거야★”
“필요 없어.”
“오오, 15바퀴째 돌입! 이번엔 멈추려나?”
조금 전까지 열심히 두들기던 노트북에서 아예 손까지 놓고 흥미진진하게 선이 달리는 모습을 보는 투스를 보며 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그 사이 까먹은 건지. 수호성과 요일들을 가족이라 부르며 무척이나 좋아하고 아끼는 선은 그들에게 큰 걱정을 끼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지만 앞 서 말했다시피 종종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경향이 있다. 주일들이 말려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뛰어들어 몇 번이고 깨지고 구른다. 이번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자기주장대로 만족할 때까지 움직이는 선을 보며 덜스는 결국 포기 선언을 했다. 아예 맨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린 덜스의 머리 위로 투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16바퀴째에서도 멈출 기색은 없는 듯싶었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어떻게 다 똑같냐.”
한숨처럼 토해진 말을 끝으로 덜스는 전부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이 번거로운 놈들과 함께 있는 건 정말 피곤할 뿐이다.
그리고 잠시 뒤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선을 부축하겠답시고 나서려 하는 덜스를 보고 투스와 세럴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적어도 지금 네 사람 중 아는 사람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