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W. 달력 - 어스
맑은 오르골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구름으로 둘러싸인 공간, 지구의 주인이 머무르는 공간. 오르골 소리를 배경으로 삼아 구름 위에 드러누워 있는 두 남자.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는 W.H와 어스. W.H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 앞에는 끝없이 푸르를 듯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눈꺼풀이 내려왔다.
어스 씨.
당신에겐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안 그래도 고통받는 당신의 몸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책임이 큽니다.
이걸, 대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죄송하다는 한 마디로 끝날 일이 아닌데, 안이한 한 마디로 끝낼 수 없는데
그 말밖에 할 수가 없군요.
골디락스인 당신을,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당신을 죽일 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W.H씨, 지금 죄송하다는 생각밖에 하고 있지 않겠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죄송하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계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골디락스로 선택받은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겁니다.
아이들을 지켜가면서, 골디락스를 위협하는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 가면서.
생명을 품은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언제나 쉴새없는 외부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죠. 이것이, 언제나 있는 생명의 위협이,
제가 골디락스로서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인 겁니다.
이번 일도 제 짐의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스 씨.”
“W.H씨.”
동시에 서로를 부른 그들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짧은 말 속에 순간 스쳐지나가는 이질감.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 단순히 기분 탓이었던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W.H씨.”
“왜 부르십니까?”
언제나처럼 온화한 목소리.
“뭔가 저한테 숨기는 게 있으시죠?”
“…그런 일 없습니다.”
말 앞에 붙은 잠깐의 공백, 미미하게 흔들리는 목소리. 이제 어스는 확신을 갖고 W.H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틀림없이 뭔가 숨기는 게 있으십니다. 안 그러면 목소리는 왜 떨리시는 겁니까?”
“……추워서요.”
안 하느니만 못한 거짓말이었다. W.H보다 몸이 약한 어스도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W.H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 맞습니다. 숨기는 게 있습니다.”
“뭔데 그러시는 겁니까?”
“…….”
몇 번을 추궁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친 어스가 막 포기하려던 찰나 망설임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깊은 망설임 끝에 내뱉어진 말이었다. 이젠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W.H가 뭐라 말하려는 어스를 가로막았다.
“예, 압니다. 골디락스로서 누구도 사랑해선 안 되는 그 의무를. 단순한 하나의 행성주가 아닌, 생명을 품은 행성의 행성주로서 아이들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의 감정을 주어선 안 되는 골디락스의 짐을. 알고 있었고, 알고, 알 겁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좋았던 것을! 마음을 포기할 수 없던 걸! 제가 어쩌겠습니까?”
흥분했던 것인지 평소와 달리 흐드러지듯 말을 쏟아 놓은 W.H는 호흡을 골랐다. 어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죄송하다’고 하신 것은….”
“맞습니다. 제 주제에 당신을 사랑해서, 죄송하다고 하는 겁니다.”
어스는 주저앉아 무릎에 머리를 묻고 팔로 감쌌다. W.H의 고백을 들은 순간부터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고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어스는 마침내 무의식에 봉했던 생각을 꺼내 들었다. 자기도 W.H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골디락스로서 해야 할 말은-
“W.H씨.”
한참의 침묵 끝에 이어진 부름에 놀란 W.H는 고개를 들었다.
“제 아이들이 쓴 책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줄 수 없는데,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폭력이라고.”
예상했던 말이건만 슬픔이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W.H는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일으켰던 몸을 다시 뉘었다. 눈꺼풀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목소리.
“한숨 주무십시오. 자고 나면, 기분은 훨씬 나아질 겁니다.”
투명하다고 해도 좋을 미성을 들으며 조금씩 잠에 빠져들던 W.H가 얼핏 눈을 떴을 때 어스의 눈가에서 반짝 빛난 것은 무엇이었을까.
D. 후이 - W.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