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행성과 항성의 주인이라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자신들은 언젠가 소멸하고 그 자리는 현재 지구에서 머물고 있는 후계자들이 메꿀 것이다. 저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어색하겠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새턴은 일렁이는 고리 너머의 시간축으로 몸을 던졌다.
"어디쯤 있으려나★"
제 위치를 확인한 후 저가 찾는 이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직하게 내뱉은 말이 텅 빈 공간에서 잔잔히 울렸다. 이젠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주위를 두리번대던 중 어쩐지 낯이 익은 인영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홍빛 너울이 저를 감싸는 것도 모른 채 시선을 고정한 새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신이 지독히도 싫어하던 붉은 별의, 새로운 주인.
"…선?★"
이미 한참 전에 잃어버린 제 옛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의 붉은 기운이 감도는 투톤 머리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오랜만에 목을 쓰는 것인지 새턴을 부르려던 목소리가 약하게 갈라졌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몇 번의 헛기침 후 성숙해진, 그래서 자신도 채 적응하지 못한 목소리로 제 앞에 있는 토성주에게 말을 건넨 솔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솔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니까, …오랜만이네요, 새턴."
"호칭은 그것 뿐?★"
"지금의 저는 항성의 주인인 걸요."
저와 동급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능청스레 웃어보이는 솔에 새턴의 입술이 뭐라 덧붙이려는 듯 달싹이다 다시 다물렸다. 맞는 말이기는 했으나 어쩐지 분하게 느껴져 고리 밑에 눈을 감추고서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니 솔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과거의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겠죠."
"…★"
말 끝을 올리지 않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선 가만히 시선을 피하는 것에 그녀는 쓰게 웃었다. 가라앉은 분위기와 계속되는 침묵이 새턴을 짓누르자 토성의 주인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지금 우주는 바뀐 거 있어?★"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솔은 잠시 생각하듯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환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제 손을 잡아 이끄는 솔을 힐끗 바라본 새턴은 자신의 고리를 사용해 워프하면 될 텐데, 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가만히 몸을 맡겼다.
"이게, 제 별이에요."
자신이 있던 시간의 것보다 꽤나 붉어지고 크기도 커진 태양이 제 존재감을 과시하듯 홍염을 뿜어냈다. 처음으로 무언가가 아름답다, 고 생각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할 말을 삼켜낸 새턴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띈 솔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름답죠, 그렇지 않아요?"
확실히.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솔에게 늘 그래왔듯 영업용 미소를 지은 채 그러네☆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별의 주인은 그녀의 별보다 더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다들, 소멸했겠지?★ 그러니까, 내 시간대의 별들 말야★"
"그렇죠, 대부분은요. 시간이 굉장히 많이 흘렀으니까…."
"잠깐, 대부분, 이라면★"
"…네."
아직 존재하고 있는 별이 있어요.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새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머물던 시간에서 다른 별들보다 비교적 적은 시간 동안 존재한 몇몇 별의 주인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그의 얼굴이 호기심에 찼다.
"자주 놀러가는 편?★"
"전 태양계를 책임져야 해요. 아직 다들 계승을 하지 않았으니까… 제가 자리를 비우면 안되죠."
의외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또박또박 대답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항성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무거운 자리였는지, 대답하는 솔의 눈이 피곤과 외로움에 흔들렸다.
이 시간축에 발을 디딜 때,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시간을 뛰어넘어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든, 무슨 행동을 하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 제가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을 때부터 지금껏 몇 번을 시도했지만 과거는 과거고 미래는 미래일 뿐, 정작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시간에는 조금의, 손톱만큼의 영향도 끼치질 못하더랬다.
그래서 새턴은 제 고리를 더욱 애용했다. 속하지 않는 시간에서는 자신이 무슨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마치 현실이 아닌, 그래, 게임과도 같았다. 지금 새턴은 현실로 착각할 정도로 진짜 같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감정을 쏟아붓는다는 것은–
"단순한 변덕, 이겠지★"
"네?"
"아무 것도. 뭐, 이젠 딱히 할 말도, 할 일도 없으니까…★"
이만 돌아갈까. 평소의 자신과는 다르게 시간을 너무 끌었다. 혁명적일 만큼 바뀌었다면 모를까, 달라진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만이기에 새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흥미를 잃고 지루한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솔이 고민하며 눈을 굴리다 곧 제 앞의 사내를 조용히 불렀다. …할 말이 있어요. 왜인지 그녀가 하려는 말이 예상이 가 새턴은 픽 웃었다. 보나마나 꼬맹이같은 말이나 늘어놓겠지. 솔은 토성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어쩐지 서글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우주는 넓어요. 지금도 무한히 넓어지고 있는 데다가 빠르게 변하는 편도 아니죠."
예상과는 다른 말. 그동안 크긴 컸는지 한때는 마냥 철이 없던 어린 소녀가 이제는 어엿하게 자라나 제게 이런 나름 진지한 말을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야, 돌아가면 다른 녀석들에게 말해 줄까나.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니 솔의 눈이 슬픔 이상의 그 무언가를 담고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가지 말아요."
"…뭐?★"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더욱 의외의 말이었다. 이제 봤으니 됐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지 않느냐, 따위의 말을 예상하며 포탈을 열기 위해 고리를 만지작대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시선을 내리곤 언제나 그렇듯 거짓을 품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돌아가선 이 시간대로 다시 돌아오면 되는 것 아냐?★"
물론 다시 돌아올 일은 없고, 돌아온다고 해도 솔은 저를 기억하지 못한 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어차피 같은 무의미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지금껏 몇 번이고 시도한 지루한 행위를 굳이 수고스럽게 되풀이할 이유는 없다.
"제가 이 영겁의 한 부분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요. 지금 이렇게 보내면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바보같죠. 애써 자신에게 웃어보이는 아이의 입 끝이 안쓰럽게 떨렸다. 잠시 눈을 감곤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려 눈을 맞춘 솔이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결국 제가 견뎌야 하는 건데. 바쁘실 테니 빨리 돌아가세요."
고리 뒤에 가려진 새턴의 눈이 가늘게 뜨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솔은 포탈을 열어 제 별로 향했다.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한 번도 한 시스템을 책임지는 항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이젠 진짜로 가야겠지, 돌아가면 귀찮기만 하면서도 말야★"
낮게 중얼대는 소리를 끝으로, 미래는 다시 원래 제가 있던 자리에 고정되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 * *
자신이 좋아하는 도넛을 사기 위해 잠시 지구에 들른 새턴은 겸사겸사 산책이라도 할까, 라는 간단한 계획을 세우곤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옷을 바꾸고 모자를 눌러써 보이지 않도록 눈을 가린 채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니 안타깝게도 태양빛이 환히 비춰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아, 주피터☆ 짜증난다는 투로 욕지거리를 내뱉곤 흐려진 시야를 다시 맑게 하기 위해 눈가를 문지르고 손을 내리던 찰나.
아까까지만 해도 제가 그렇게나 짜증을 내던 점심 즈음의 눈부신 햇살에 오렌지빛의 결 좋은,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잔잔히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새턴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선?★"
"앗, 새턴 님. 도넛 사러 오셨나 봐요?"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서 해가 밝은 것 같다며 웃어보이는 선의 순수한 미소는 늘 주변 사람들까지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래… 그렇네★ 동조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강한 아이야★"
뜬금없이 뱉어진 말에 새턴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말은 흘러넘친 뒤였고, 소녀는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아무 것도★"
이 대화, 언젠가 했던 것 같은데. 이미 수없이 반복했음에 기억이 흐려진 탓일까, 골똘히 생각해도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막연히 제가 오래 전부터 되풀이해온 행위들 중 하나임이라 치부하곤 더 이상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힘들면 얘기해, 난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살풋 웃는 선의 머리를 제 머리카락 한 줄기로 슥슥 문질렀다. 내가 이렇게 친절하기도 참 힘든데 말이지. 혼자만의 중얼거림은 다시 맑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오랜만에 새턴의 입가에 거짓 웃음 대신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 *
고리가 시안빛으로 포탈을 열었다. 그 너머로 한 발짝 내딛으니 시간축을 건너온 직후와 완벽히 같은 핏빛의 화염이 열기를 훅 끼쳐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처럼, 붉은 역안이 저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제게 다시 인사를 건넨다.
평소대로 받아주는 인삿말 대신 항상 애용하던 웃음을 망토마냥 걸치고는,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은 채.
다녀왔어★
어느 것이 현재인지 구분하려 들지 않으며.
W. 날개냥 - 새턴
D. 슴쿠 - 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