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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뀨귱 - 마르스

  서쪽 마법사 먼 × 인간 선비 마르스

 

 

 

  서쪽의 마법사 먼. 험하고 깊은 산 속 어딘가에 홀로 초가집을 짓고 조용히 살고 있는 달의 마법사. 그런 그에게 요즘 한 가지 골칫거리가 생겼다.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네 어깨에 이 병아리가 뭐? 주작?!"

  "… 네, 주작이요."

  "설마 내가 아는 그 주작? 붉은 깃털에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불을 다룬다던, 전설의 신수인 그 주작이라고?"

  "… 네, 그 주작 맞다니까요."

  "…… 따하하하핫! 이 쪼끄만 병아리가 뭐? 주~작~? 믿을만한 소리를 해라, 짜샤! 내가 그런 걸 믿을 거 같냐? 엉?"

  "후우…… 안 믿기면 믿지 마세요…. 그나저나 언제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네가 나한테 키스해주면."

  "아…… 왜 그러세요, 진짜…."

 

  먼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며 입술을 들이대는 남자를 밀어냈다. 축 처진 어깨와 피곤한 눈빛이 시비를 거는 남자에게 많이 시달렸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 마르스는 거절당했음에도 능글맞게 실실 웃으며 "에이, 쪼잔한 새끼."라고 중얼거렸다. 집적거리는 마르스에게 질린 먼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할 말이 없어진 마르스는 괜스레 애꿎은 병아리만 검지 손가락으로 툭툭 쳐댔다. 먼은 포기했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 귀찮은 남자가 자신에게 들러붙게 되었나, 아련하게 회상을 하려던 찰나에 갑자기 마르스가 계곡이 떠나가라 소리를 꽥 질렀다.

 

  "앗 따거! 야 이 병아리 새끼야!"

  "병아리 새끼 아닌데, 보름이라고 이름도 있는데……."

  "저 병아리 새끼가 내 손가락을 쪼았어! 감히 이 마르스 님의 귀한 손가락을 쪼아버리다니! 아이고~ 나 죽네~ 아파 죽겠네~!!"

 

  조그만 병아리의 날카로운 부리가 의외의 괴력을 발휘한 건지, 아니면 마르스가 엄살을 피우는 건지, 그는 과장되게 아파하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먼은 아파하는 마르스를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쌤통이다. 먼은 차마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겉으로는 티 나지 않도록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마르스를 바라보는 눈빛과 비웃듯 씰룩거리는 입꼬리에서 묻어나오는 한심함은 감출 수가 없었는지 마르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먼을 째려보았다.

 

  "너 방금 속으로 나 한심하다고 생각했냐?"

  "………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요……?"

  "다 티 나거든?"

  "안 했어요, 진짜 안 했어요……!"

  "흐음, 그래, 뭐 믿어줄게. 내 입술에 뽀뽀해주면 믿어주지!"

 

  황당한 마르스의 말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먼은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마르스를 지나쳐 걸었다. 뒤에서 같이 가자고 외치는 마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먼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무시하며 제 갈길만 갔다. 마르스와 대화하고 있다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돌이켜 보면 첫 만남부터 꼬였던 거 같다. 후우, 떠오르는 첫 만남에 저절로 한숨이 푹푹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그냥 그때 모른 척하고 지나쳤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집으로는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먼은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며 마르스와 처음 만난 그날의 사건을 회상해 보았다.

 

 

 

* * *

 

 

 

  그날은 왠지 산책이 가고 싶은 날이었다. 하늘은 높았고 공기는 맑았으며 산의 나무들은 유난히 녹음 졌던 날이었다. 날씨도 청명하여 놀러 가기 좋은 날이라 먼은 중앙의 마법사, 선에게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험난한 산을 조심조심 내려오던 중, 먼은 한 남자가 산짐승을 잡기 위한 덫에 발목이 걸려있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화들짝 놀란 먼은 재빠르게 달려가 덫에 물린 남자의 발목을 살폈다. 남자의 발목은 덫의 쇠 이빨에 씹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고, 비싸 보이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남자의 연한 주홍빛 두루마기는 흘린 피에 젖어 검붉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고 연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뼈까지 갈리는 고통에 남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니, 이 정도의 고통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더 대단한 거다. 먼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덫에 물린 상태로 상처를 치유해 버리면 뼈에 쇠가 박힌 채 살이 아물어 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덫을 빼내는 게 더 아프다. 일단 덫을 먼저 빼내는 게 순서다. 결론을 내리고 생각을 마친 먼은 남자의 뺨을 톡톡 쳐서 정신을 차리게 했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봐요…! 제 말이 들리세요?"

  "으으윽……. 너무 아파…. 넌, 넌 누구냐……?"

  "제가 누군진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은 제가 이 덫을 빼드릴 테니까…… 하나, 둘, 셋! 하면 발을 빼세요, 아셨죠…?"

 

  남자는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먼은 펄럭거리는 갈색 도포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남자의 발목을 물고 있는 덫의 양쪽을 잡았다. 후, 긴장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먼은 온 힘을 다해 덫을 벌리기 시작했다.

 

  "끄, 끄아아악! 아아악! 끄으으…."

 

  덫이 빠져나가면서 상처를 더 자극했는지 남자는 고통이 여실히 느껴지는 비명을 질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턱의 힘줄이 붉어질 정도로 꽉 다문 어금니, 손톱이 파고들어 손바닥에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움켜쥔 주먹이 남자에게 가해지는 고통의 크기를 짐작케 했다. 멧돼지 같은 맹수를 잡기 위한 덫이어서 그런지 쉽사리 벌려지지 않는 터라 먼은 발까지 사용해 덫을 벌렸다. 손으로 당기고 발로 밀면서 겨우겨우 남자의 발목이 빠져나갈 틈을 만든 먼은 안간힘을 쓰면서 외쳤다.

 

  "자, 이제 발을 빼세요…! 하나, 둘, "

  "잠깐만! 나, 다리에 감각이 없어."

 

  신호를 주던 먼의 말을 끊고 남자가 말했다. 고통으로 인해 퀭하게 변한 눈가와 겨우겨우 치켜뜬 눈꺼풀이 그의 붉은 눈동자를 더 붉어 보이게 했다. 먼의 노란 눈동자와 남자의 빨간 눈동자가 마주쳤다. 불꽃?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남자의 빨간 눈동자가 넘실거리는 불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태양의 마법사, 선의 눈동자? 아니다. 그쪽이 아니다. 불의 마법사, 투스의 눈동자와 닮았다. 잠시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럼, 손으로 다리를 잡고 뺄 수는 있겠어요…? 저 지금, 버티는 거, 윽, 한계예요……."

  "알았어, 해볼게. 그럼, 뺀다!"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낑낑거리며 손으로 다리를 들어 덫에 박혀있는 발목을 빼냈다. 남자가 발목을 빼냄과 동시에 먼은 벌렸던 덫을 놓았고, 텅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덫은 입을 다물었다.

 

  "괜찮으세요?"

  "으…… 젠장, 너무 아파. 아파 죽을 거 같아."

 

  남자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먼은 남자의 등을 나무에 기대게 부축해주었고, 남자는 먼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몸을 가누었다.

 

  "제가 치유해 드릴게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먼은 남자의 피범벅이 된 발목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살이 헤집어져 뼈까지 드러났음에도 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상처를 어루만졌다. 먼이 조용히 무어라고 읊조리자 남자와 먼의 주위가 어두워졌다. 밤이 찾아오는 것처럼 주위가 새까맣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줄기의 달빛이,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빛나는 순백색의 달빛이 남자의 상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상처의 고통도 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을 크게 떠 봐도, 감았다 떠 봐도, 눈을 비벼 봐도 주변은 한밤중이었고 자신의 상처에는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남자의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남자는 벙 찐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몸속의 세포들이 꾸물꾸물 증식해서 남자의 상처를 메꾸고 있었고, 먼은 상처가 치료되는 기괴하고도 신기한 광경을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평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집중하기 힘들단 말이에요."

  "뭐냐, 지금 이거 상처 재생되는 게 네가 하고 있다는 듯한 그 말투는?"

  "제가 하고 있는 거 맞아요…. '치유'가 제 능력이에요."

  "… 뭐? 능력? 하하, 거짓말도 작작 해라.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어.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어! 와하하핫!"

 

  남자는 실성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사이에 상처는 완벽하게 치료되었다. 흉터조차 남지 않고 원래 상처조차 없었던 것처럼 깔끔한 피부로 돌아왔다. 어두웠던 주변은 밝아졌고 상처를 비추던 달빛도 사라져 다시 환한 햇빛이 내리쬐었다.

 

  "이렇게 멀쩡해진 발목을 보고도 못 믿으시겠어요…?"

  "하하하,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 이………."

 

  남자는 현재 모든 상황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던 문장을 매듭짓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며 쓰러졌다.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무슨 연유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는 옆으로 픽 고꾸라지며 기절해버렸다.

 

  "…… 이를 어쩌지. 이 남자를 여기다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는데……."

 

  먼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기절한 남자를 깊은 산 속에 버려두고 선을 만나러 가느냐, 아님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무사히 깨어날 때까지 상태를 지켜보느냐. 두 가지를 열심히 저울질하던 먼은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먼은 의식이 없어 온 몸이 축 늘어진 남자를 자기 혼자 옮기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할 수 없이 '그것'을 불러내기로 결정했다. 일단 긴장된 짧은 한숨을 쉬고, 어깨 위에 올라탄 병아리를 양 손바닥으로 조심조심 옮기고,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을 나직이 중얼거린 먼은 손바닥 위의 병아리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조막만 한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간 병아리는 온몸에서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을 내뿜었다.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노란 병아리가 아닌 불처럼 새빨간 깃털을 뽐내는 주작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보름아, 이 남자가 다쳐서 그런데 너의 등에 태워도 될까?"

 

  먼이 다가오자 주작은 그가 머리를 편하게 쓰다듬을 수 있게 고개를 숙였다. 먼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주작의 머리 깃을 사뿐히 쓰다듬어 주었다. 먼의 물음에 주작은 알았다는 뜻으로 노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고 먼은 낑낑대며 남자를 주작의 등 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집으로 가자, 보름아."

 

  주작의 등 위에 올라탄 먼은 남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며 다정하게 말했다. 주작은 발로 땅을 굴러서 도약하며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고, 먼은 온 세상이 한눈에 보이는 상쾌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풍경 감상도 잠시, 주작의 날갯짓 두세 번 만에 초가집에 도착했다. 먼은 오랜만의 비행이 순식간에 끝난 아쉬움에 주작의 깃털을 살짝 쓰다듬은 후 조심조심 남자를 안아 들었다. 먼이 남자를 안아 들고 주작의 등 위에서 내려오며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주작은 펑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조그마한 병아리로 돌아와 먼의 어깨에 살포시 날아 앉았다. 성큼성큼 손님방으로 들어간 먼이 방 한구석에 개어진 이불을 향해 손짓하자 이불이 저 혼자 펄럭거리며 방바닥에 펼쳐졌고, 먼은 남자를 이불 위로 조심스럽게 눕혔다.

 

  "으으음……."

 

  남자는 폭신한 이불에 몸이 뉘어지자마자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보이자 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정신이 드세요……?"

  "넌, 넌 뭐야……? 여기는 또 어디야?"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된 듯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되물었다. 먼은 대답 대신 상체를 일으키려는 남자의 어깨를 양손으로 다시 내리누르고서 흩어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먼은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제야 제 소개를 드리네요…. 전 서쪽의 마법사 먼이라고 해요. 그쪽은 성함이……?"

  "어……, 너 진짜 마법사였어……? 세상에, 말도 안 돼, 마법이 실제로 존재했다니……!"

 

  기절하기 전에 나눈 대화가 생각이 났는지 남자의 눈빛은 격하게 흔들렸다. 계속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급기야 머리까지 쥐어뜯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마법사의 존재를 안 믿나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믿었던 거 같은데……."

 

  먼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먼의 말에 남자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먼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야."

  "안돼요! 이렇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면……!"

  "야, 너 조선사람 아니지? 신라시대 사람이야? 아님 고구려? 백제?"

 

  도로 눕히려는 먼의 한쪽 손목을 잡고 말을 끊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빈정거림이 아닌 장난스러움이 담겨있었지만, 먼의 귀에는 그저 비아냥으로 들릴 뿐이었다. 손목을 잡은 남자의 손을 탁 쳐내며 먼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아니거든요…! 그냥 요즘 산 속에만 있어서 그래요. 자꾸 말 돌리지 말고 그쪽 이름이나 말해요."

  "따하핫! 사내 새끼가 장난친 거 가지고 삐치기는. 크흠, 그럼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마르스, 조선 최고의 과학자다! 과학자지만 난 양반이야. 중인이 아니라고. 전설처럼 떠도는 마법사 이야기는 믿지 않았는데…, 그중 한 명인 서쪽의 마법사가 내 눈 앞에 있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 왜 마법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난 마법을 믿지 않아. 내가 믿는 건 오로지 과학뿐이야. 허울만 거창한 눈속임은 믿지 않아."

  "마법은 눈속임이 아니에요…! 실제로 존재하는, "

  "하지만 넌 믿을 수 있을 거 같다."

 

  항의하는 먼의 말을 뚝 끊고 마르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한순간에 말을 바꾸는 자신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먼과 눈을 마주친 마르스는 먼의 그 표정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따하하핫, 너 그 표정 웃기다. 하하하하!"

  "웃지만 말고 말해봐요! 못 믿겠다 했으면서 갑자기 절 믿겠다 하는 건 무슨 의도예요?"

  "크흐음! 사실은 나도 못 믿겠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널 믿을 수 있는 아주 큰 이유가 두 개나 생겼어. 일단 첫 번째는 내 상처를 치료해 내 생명을 살려준 거. 두 번째는…, "

  "…… 두, 두 번째는요?"

 

  왜인지 긴장이 된 먼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마르스의 마지막 말을 반복하며 물었다.

 

  "두 번째는, 내가 너에게 한 눈에 반한 거 같다는 거."

  "네에에?!?!"

  "그래, 뭐, 못 믿는 건 이해하겠는데 말이야, 너무 그렇게 벌레 본 얼굴 하지 말아줄래?"

  "아니, 그게, 못 믿는다기 보다는, 음, …… 신기해서요."

  "신기해? 뭐가? 남자가 남자에게 한 눈에 반한다는 게?"

 

  마르스는 정말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잠깐의 바람인지, 벌써 자리 잡은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먼은 상처를 준 것이 미안해졌다. 그러나 먼이 신기해한 것은 동성애가 아니었다.

 

  "저, 죄송해요……. 신기하다는 건 신분이 양반이고 과학자로서 지위도 꽤 높은 거 같은데 그런 편견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는 거였어요. 보통 양반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차별하고 배척하는데, 당신은 그런 게 없는 거 같아서 신기하다는 거였어요……. 상처받았다면 정말 미안해요."

  "…… 너… 나 유혹하는 건 아니지? 어쩜 이렇게 예쁜 말만 하냐?"

  "…… 방금 한 말 취소할게요."

  "그러지 말고 나랑 결혼하자, 어때?"

 

  먼은 대답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뒤에서 마르스가 뭐라 뭐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달빛이 휘황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보통의 사람과는 가치관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마법을 믿지 않는 것도, 양반 신분에 과학자를 하는 것도, 같은 남자인 자신에게 한 눈에 반했다며 당당하게 고백하는 것도 특이했다. 근 50년 간 초가집에만 틀어박혀 살던 먼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사람. 마법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먼과 반대로 모든 일에 능할 것 같은 사람. 소심한 저와는 다르게 솔직하고 쾌활한 사람. 모든 것에 부족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좋은 인연은 개뿔.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그를 간신히 떼어내고 먼은 하늘의 마법사, 모든 마법사들의 어버이인 어스를 찾아갔다.

 

  "어스님, 저 왔어요."

  "아, 먼이구나. 어서 와, 무슨 일이니?"

 

  어스는 다정하게 물으며 자리를 권했다. 먼은 어스의 맞은편에 앉아서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향긋한 차를 음미한 먼은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어스님, 사실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혹시 요즘 절 따라다니는 마르스라는 인간, 아세요?"

  "음, 알고말고."

  "하아……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퍼진 거예요……?"

 

  먼은 머리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먼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마르스의 기억을 지워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왔어요. 그는 인간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에요. 인간들의 실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학기술을 갖고 있는 자예요. 그런 사람을 제가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요, 어스님. 자의로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마르스의 기억을 지워주세요"

 

  먼의 부탁에 어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걱정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넌 괜찮겠니, 먼?"

  "네? 저요……?"

  "그래. 비록 한 달이라는 시간일 뿐이지만, 그와의 추억이 많이 쌓인 것 같던데……. 기억을 지우면 그는 이제 너라는 존재 자체를 잊게 될 거야. 그의 기억 속에서 너를 아예 들어내는 거지.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쳐도 그는 널 절대로 알아보지 못해. …… 그래도 괜찮겠니?"

  "…… 네, 괜찮아요. 그는 저보다 인간들에게 더 필요한 존재예요. 게다가 전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그래, 먼. 그럼 그의 기억을 지우고 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돌아오고 네가 너의 집으로 갔을 때는 아마 그가 왔었다는 흔적조차 없을 거야."

 

  어스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름을 닮은 망토를 둘렀다. 먼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처음 결심했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이제 그에게서 해방이란 기쁨뿐이었는데, 아니었다. 막상 그의 기억을 지운다고 하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몸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어스는 자신의 상징인 흰 제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먼은 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그를 따돌리고 오느라 보름이도 집에 있었다. 쓸쓸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그가 불편했었는데, 이렇게 혼자 방안에 있으니 너무 조용했다. 이제는 이 조용함에 익숙해져야겠지. 다시 조용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 그는 한낮에 달콤한 낮잠을 자며 꾸었던 꿈같은 사람이었던 거야. 달이 뜬 한밤중이 아닌, 달이 침범할 수 없는 한낮의 꿈.

 

  "먼."

  "아, 어스님……."

  "다 끝났다. 이제 너의 산으로 가봐도 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에 남아있는 미련 찌끄래기를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어스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먼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배웅해주는 어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집을 나오자마자 서쪽의 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초가집에 도착하자 반겨주는 것은 보름이뿐이었다. 마르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정말 완벽하게 끝났다. 알 수 없는 그리움과 허전함이 밀려왔고 눈에서는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영생을 사는 자신에게 한 달은 정말 1초처럼 지나가는 시간일 텐데, 정말 짧은 시간 동안 같이 지낸 게 뭐라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러는 한 편으로는 후련했다. 걸리적거리는 혹을 떼어냈다는 후련함이 아니라, 아주아주 작은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끊어냈다는 후련함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 상반되는 감정들이 뒤섞여서 지금의 심정은 이렇다,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굳이 확정 지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영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랬듯이, 이것도 흘러가는 시간이고 인연 이리라. 가끔 그에 대한 추억이 떠오를 때면 달빛이 세상을 비추듯 멀리서 그를 지켜볼 것이다. 잊은 쪽은 아무 잘못이 없다. 선택은 남기는 쪽이 했으니까. 미련은 없다. 단지 그리울 뿐이다.

D. 교량 - 먼

  * 본 글은 아아이스님 동양마법사 썰 기반입니다.

본페어에 이 트로피를 수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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