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크로노스의 창백한 피부를 타고 눈물이 떨어진다. 과거의 자신에게 향한 것은 무능한, 약하고도 쓸모없는 현재의 자신을 향한 울분과 증오. 우주에서 지구에 담긴 과거와 토성에 묻힌 현재가 만난다. 그건이 신비롭든 누군가에게는 일상이든 누군가가 세운 가설들을 전부 무력화시키는 것이든, 세럴에게는 꽤나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에게서 늘 보던 은회색의 떠다니는 고리. 그것이 낯선 남자의 머리 위에 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그곳이 제 집인것마냥, 오직 아버지의 머리 위에만 머무르던 그 고리가 다른 남자에게 있는 것을 보자니 세럴에게 느껴진 감정은 혐오감과 이질적인 낯섬이었다. 그러나 세럴을 그 무엇보다도 공포스럽게 한 것은 크로노스의 얼굴, 아니 그 모습 자체였다. 세럴 자신과 같은 키, 호리호리한 체형, 길게 뻗은 다리, 길고 흰 손가락, 이목구비, 남자답게 잘생겼다기 보단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은발에 어우러진 얼굴. 모두 같았다. 단지 세럴에게는 없는 증오가 크로노스의 눈에 짙게 배어 있었다는 것일까, 세럴이 크로노스의 푸른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듯한 한기에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그래도 애써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한 한 마디-
"당신은 누구…?"
그 말이 끝나고 조금의 침묵이 찾아온 후 크로노스가 하, 하며 차갑게 실소를 터뜨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그의 입가에 걸린 온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비틀린 미소가 그 미소의 이유도 크로노스의 이유도 모르는 세럴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그 눈에 담겨져 있는 것은 절망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냉소에 새겨져 있는 것은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살기와 아픔. 남자가 힘없이 웃으며 세럴에게 다가갔다.
"내가 누구냐고 네가 어떻게 물을 수 있지?"
-퍼억- 하는 소리가 메아리 없이 울려퍼졌다. 한쪽으로 맥없이 꺾인 세럴의 흰 얼굴이 붉게 부풀어오르며 주먹으로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아픔인지 단순한 두려움인지 모를 눈물이 맺혔다. 크로노스의 차갑고도 창백한 얼굴은 그 냉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가 세럴에게 속삭였다.
"나는 말이야, 너를 너무나도 증오하고 있어."
하지만 우린 이제까지도 본 적이 없어, 만난 적도 없다고! 당신은 내 이름도 모르잖아, 세럴이 애써 소리높여 항변한다.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증오할 수가 있는 거지? 크로노스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 위의 은회색 고리를 살짝 띄우고 가슴께에 걸린 모래시계를 세럴 앞으로 내밀었다. 능숙한 손가락으로 그가 모래시계를 뒤집기 시작했고 공중에 띄워 둔 고리가 비추는 배경이 달라졌다. 세럴, 크로노스가 그의 이름을 일부러 강조하는 듯 음절을 또렷이 발음하며 세럴에게 뚜벅뚜벅 다가간다.
W. 라옐 - 세럴
D. Monody - 크로노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