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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군요. 이런 거대한 무도회장에 싸구려라니"

"…싸구려?"

 

화려하디 화려한 무도회였다. 이런 무도회에서 음료조차도 비싼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싸구려라? 아무리 제 곁에 있는 상인이 못미더운 존재라고 해도 무언가를 사고파는 사람으로써 물건의 값어치를 따지는 것에 오차가 크지 않을 이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싸구려가 나왔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지?"

"진짜와 유사하게 만들었지만 끝맛이 미묘하게 다르고 전체적인 향이 죽어있습니다. 물론 알아보지 못할 천체가 많겠지만"

 

아마 저 안의 모두도 같은 음료를 마실 것이라. 조금 전에도 이곳을 다니며 참 좋은 술이라고 대화했던 것이 들려왔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알지 못했던걸까. 조금 상인이 새삼스럽게 보였으며 자신이 그런 술을 마실뻔 했다는 것에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이런걸 마시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 그 잔을 꼭 가져가서 확인을 했어야했던걸까.

 

"비싼 것을 사들이는 재력은 있어도 그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행성주에 대한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며 다시 잔에 입을 대는 상인을 바라봤다. 그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이 정확하고 옳은 말이었다. 그가 남은 와인을 모두 들이켰다. 그렇게 싸구려라 품평을 내리던 것을 제 입안을 털어넣고 깔끔하게 비워진 잔을 다시 곁에 내려두는 것을 말없이 바라봤다.

 

"다 비우지 않으면 곤란하겠죠"

 

그럼 이만 안으로 들어가보겠다는 이야기를 남기며 자리를 뜨는 상인의 뒷모습을 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비어버린 잔

혼자남은 여인

허영심 가득한 정원의 작은 해프닝

 

[원래의 자리로]

 

 

모두가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사교를 위해 모인 것이만큼 많은 관계가 뒤바뀐 장소였으며 그 사이서 별다른 미동도 없는 관계도 있었다. 돌아가는 길, 아무런 눈짓도 말이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워프를 타고 도착한 긴 회랑에서 동시에 걷던 발소리 하나가 먼저 걸음을 멈췄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긴 회랑을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세레스는 걸음을 멈췄다. 이제 끝이구나. 더 이상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물끄러미 오늘 제 파트너 역할을 했던 상인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원래의 복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저기즈음에 입이 있겠지. 눈이 있을테고. 어림짐작하며 눈을 마주봤다. 그래봤자 천이지만.

 

"…나중에 또, 부탁하지"

"여왕님의 명령이라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상인의 곁을 지나쳐갔다. 상인 역시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지나쳐 제 갈길을 나선다. 서로가 엇갈리는 회랑, 은은한 회색빛의 머리카락이 옷자락을 스쳤다.

어느 거래자와 상인의 어느 날.

 

 

언젠간 또 뵙기를

누가 했을지 모르는 그 생각

 

 

 

[연극의 막이 내리다.]

W. 방랑 - 상인

D. 아트로 - 세레스

그 날 우리는 한 편의 연극을 했다

* * *

 

 

 

 

헥토르가 떠난 후 넓은 홀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 적막감을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세레스의 작은 한숨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다. 어쩌면 정해진 결말이었을까. 자조적인 미소를 그렸다.

 

 

"팔라스, 돌아가자"
"…네"

 

 

마땅한 파트너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마땅한 이들을 떠올려봐도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곁에서 빳빳하게 서있는 팔라스는 파트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 할 것이다. 이미 헥토르로 정하기 전에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에 또 다시 말을 꺼내보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꼿꼿한 어깨가 어느새 내려가있었다. 과연 그 젋은 행성주들을 한번에 만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초대받고 오지 않는다면 그 사교파티의 왕, 그 자리에 있는 이의 친필 초대장을 거절한다? 최악의 상황. 팔라스는 세레스의 미묘하게 처진 어깨에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베스타를 불러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레스를 따라 긴 다리를 뻗었다.

 

 

"…어쩔수가 없는건가"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그'를 모르는 자라면 목소리가 좋다고 느낄 수 있었지만 그 깊은 심연까지 훑어봤던 세레스는 그 말에 진저리를 쳤다. 뒤로 돌아서자 웃고 있는 그가 서있었다. 곁에 서있던 팔라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자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봤다는 기억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필 이때 그가 건내는 말은 타이밍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세레스의 앞으로 한걸음 옮겨 무례한 이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여기에 오신겁…"
"제 질문의 대답부터 부탁드립니다. 여왕이시여^^"

 

 

팔라스가 상인을 향해 말을 꺼내도 그의 시선은 세레스를 향해 있었다. 이가 악물렸다. 물론 자신이 무시 당했다는 생각이 화나지는 않았다 다만 이 자의 시선이 세레스님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팔라스, 다시 부를 터이니. 먼저 돌아가거라."
"세레스님!"

 

 

믿지 못 했다. 동조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생각했던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에 팔라스는 추방이라도, 아니 추방이 명백한 세레스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여왕님. 팔라스는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에 이를 악물었다. 아주 오래 전 여왕님을 모실때 보았던 작은 핏방울들, 입술의 작은 상처, 애써 가리려고 하는 행동. 평생 그 곁을 지키는 자신이 못 알아볼리가 없었다. 그때 여왕님을 방문한 사람은-

 

 

" ^^ "

 

 

충심과 분노가 뒤섞여 이제는 무엇이 되었는지도 딱히 중요하지 않게 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레스의 눈빛에 억지로 삼켜야했다. 억지로 삼킨 말은 가시박힌 장미보다 더욱 날카로웠으며 여느 칼날보다 매서워 목 안의 연한 살점을 햘퀴었다.

 

 

"어서"
"알…겠습니다…."

 

 

저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 팔라스는 옆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코끝에 얹어진 안경 너머로 상인을 노려봤다. 도발적인 눈빛에도 상인은 미소를 보냈다. 팔라스는 그 웃음에 더 속이 좋지 않아졌다. 세레스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다 짧게 허리를 숙였다폈다. 언제나 공손했던 그 얼굴에는 상처 자욱이 서려있었다. 이내 팔라스가 서있던 자리는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따. 그제야 세레스는 참아왔던 숨을 뱉었다. 분노, 슬픔, 미안함. 온갖 마이너 감정이 뒤섞인 답답함은 한번으로는 모자랐다. 마지막 자신을 바라보는 그 상처받은 얼굴은 떠올리기도 두려웠다.

 

 

"이런, 꽤 아끼시는 분인가 봅니다. ^^"
"천박한 네가 알 것 없다."

 

 

천 위에 그려진 웃음과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는 연기라는 일면을 자신을 일부나마 알고 있다. 어쩌면 우주의 작은 별과 같은 일부일지도 몰랐다. 그때의 기억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공포심과 아찔함을 떠올려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랫입술을 이 끝으로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그 탓에 아랫입술이 살짝 부었지만 제대로 보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정도였다. 저 자의 앞에선 이제까지 덧씌웠던 웃음은 필요없었다. 이미 들켰을 것이 뻔했다. 상인의 웃음이 가득했던 천 위에는 휘둥그레 뜬 외눈 하나가 덩그러니 시야를 채웠다. 그가 허리를 숙인 탓이다. 시선에 닿은 자신이 죄다 헐벗겨지는 치욕스러운 느낌이었다. 그 감춰놓은 것까지 파헤져지는 느낌은 끔찍했다.

 

 

"…난 그대는 필요없다."
"이런, 저는 그 필요 이상을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저는 단순히 행성주들과의 대화를 위해 가는 것 입니다. 그저 저를 그곳에 놓아두시면 됩니다. 어차피 여왕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
"체면을 차리셔야죠. 여왕님은 혼자가 아니십니다."
"하"

 

 

상인의 말에서 빠져나갈곳이 없었다. 빵에 목이 멘 사람 앞에서 홍차를 들고 있는 것처럼, 길을 헤매는 사람 앞에서 지도를 들고 있는 것처럼. 간절히 필요한 것을 들고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 그랬지. 기어코 헛웃음이 터졌다. 상인이 제 앞에 도착했을때부터, 꽤 오래 전부터 패배했다. 달콤한 꿀을 들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은 이 손을 잡아 패배자의 고개를 숙이며 그의 손을 위로 들어야했다.

 

 

"…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그런 꼴로 가는 걸 원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가볍게 박수를 친 상인의 옷차림은 바꿔었다. 정장과 드러난 머리카락, 긴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묶여있는 것은 의외였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천이 아닌 눈가를 가리는 천은 이전의 천과 같은 눈이 그려져 있었다. 평소 세레스는 상인의 모습을 한번 훑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보기에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디서 보고 많은 것이라 생각했다. 상인의 옷을 작은 키로도 훑어보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여인의 눈은 세세하기 그지 없었으니. 몇군데를 손가락으로 지적해주는 것으로 옷을 손보는 것을 마쳤다.

 

 

"팔라스"

작은 부름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팔라스를 웃으며 바라봤다. 팔라스는 고개를 듬과 동시에 시야에 들어온 상인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의 단출한 무례한 이가 아닌 한 단계 옷이 화려해진 무례한 이가 되었다.

 

 

"파트너를 대동하고 무도회장에 갈 것이니 이 곳을 지켜있어주렴"
"…파트너 말씀이십니까?"

 

 

파트너라는 의외의 단어에 얼빠진 표정은 한층 더 심오하게 얼이 빠졌다. 조금 전에 파트너가 없어서 돌아가려했는데 이제 생겼다는 말인가? 자신을 바라보며 세레스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이를 올려다봤다. 설마 아닐 것이다. 저런 무례한 자를.

 

 

"부탁해"

 

 

어느새 그 자리에 혼자 남은 팔라스는 지나가던 베스타가 말을 걸기 전까지 공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도회장의 거래된 파트너]

 

 

소행성대를 떠난 이후 일체 대화가 없었다. 상인이나 세레스나 그저 필요에 따른 관계였다. 그 이상의 감정이나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도착한 입구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입구가 이정도인데 저 안은 얼마나 더 화려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작게 혀를 차며 허영심의 산물을 보다가 들이밀어진 가면에 온 시야가 가면에 들어왔다. 의아함에 올려다보니 상인이었다.

 

"슬슬 입장하셔야 합니다. ^^"

"…."

 

상인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가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스러운 손짓으로 그의 손에 들려있는 가면을 낚아챘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웃고있는 상인에게 가면은 아마 저 흰 천일 것이다. 나비모양의 가면은 꽤 고급진 것이었는지 불편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가면이 아니라 손을 내민 상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가시지요. ^^"

 

입구로 다가가자 거대 외계 행성에 속해있는 위성이 문을 열어주었다. 복잡한 문양을 새긴 거대한 문이 열리자. 인공 조명에 눈부터 찌푸려졌다. 극도의 화려함만 취했지 눈 건강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이 확실했다. 빛에 어느정도 눈이 적응이 되자 입구보다 더 화려한 내부였다. 얼마나 화폐를 쏟아부은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삼삼오오 모인 이들이 보였다. 그들도 화려했지만 주위의 웅장한 화려함은 손님의 화려함마저 죽여버렸다. 그들은 제각각의 드레스나 옷을 입었으며 같은 것이라곤 가면을 썼다는 점이었으며 대체로 어려보이는 모습이었다. 외형이 천차만별이라고 해도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일순간 시선이 몰렸다. 커다란 키의 남성과 매우 작은 여성, 그 키 차이는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미소로 답했다. 상인은 그것을 인식한지 오래인지 이미 웃고 있었다. 더없이 우아해보이는 그들. 경험도 우아함도 거의 없이 혈기만 넘치는 어린 아이들에게 시선을 단번에 끌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상인이 읆조렸다. 주위에 지나가는 이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파트너이지만 파트너는 아닙니다. ^^"

"당연한 것을"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서로의 배역에 맞춰서 우리는 서로의 이익만을 취할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아한 파트너로 보이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눈치빠른 상인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미 곁에 두고 있었으며 상인답지 않은 예절을 갖추고 있었다. 언제 저런건 또 배워온건지. 분명 편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동시에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래야한다며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비이성적은 행동이었지만 애초에 이런 곳을 그와 온 것 만으로도 비이성적이었기에 더 말하지는 않았다. 주위를 돌아다니며 -높은 곳의 단, 세레스의 키에 맞춘- 서로가 원하는 이들을 머릿속에 그려두었다. 무도회장을 한바퀴 돌던 두 사람은 연인들을 위해 준비했을법한 작은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테라스의 문이 닫히자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

 

조금 전 수줍게 올려두었던 자그만한 손은 상인의 손을 매섭게 후려쳤다. 상인은 미리 예상한탓인지 구겨진 장갑의 매무새를 정리했다.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조금 뒤에 보지요 ^^"

"그러지"

 

상인의 말에 영 못마땅하게 답한 세레스는 먼저 테라스를 나섰다. 조금 전에 점 찍어두었던 이들을 보러가는 중이리라. 그 자리에 서있는 상인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이내 그 미소 위에 다른 미소를 그리며 테라스를 나섰다. 상인의 일은 언제나 끝이 없다.

 

 

 

 

[그 거리, 그 시선, 그 감상평]

 

 

대화는 순조로웠다. 가벼운 잡담에서부터 자신들의 경험담과 이야기. 그것들을 화수분처럼 꺼내놓는 상인은 젋은 이들의 혈기를 자극하여 그 어린 것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세레스는 누구보다 고고하며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한 모습에 끌리는 이들이 있었다. 풋내어린 행성주들은 자극받기도 했으며 대체로 강한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왔다는 것이 옳았다. 처음에는 거리를 두던 이들도 세레스의 웃음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는 세레스를 알아본 몇몇 행성들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세레스, 아니 지금은 나비인건가요?"

"네, 오늘은 나비이지요.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어머, 영광입니다."

 

친근하게 다가온 항성의 존재는 저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있었다. 적의가 아닌 호의로 얼굴을 마주했는데 어찌 잊을까? 제 성격다운 화려한 가면에 눈길이 갔다. 이전부터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여성체였다. 상체를 타이트하게 조이는 흰 드레스는 허벅지를 따라 내려가다 한떨기의 꽃처럼 펼쳐진 드레스자락은 붉은 꽃물을 머금은듯 물감처럼 물들어있었다. 핵인지 보석인지 모를 작고 반짝거리는 것들이 온 드레스를 장식하고 있어 과도하게 밝은 천장 조명 탓에 과하게 반짝였다. 아마 그녀의 취향이었지. 이런 낯선 곳에 있을수록 오래전부터 호의를 느꼈던 익숙한 얼굴에 반가움이 들었다. 하나 둘 대화거리를 꺼내놓으며 이따금 웃음소리를 내었다.

 

"레이디"

"무슨 일인가요?"

 

잠깐 자리를 비웠던 파트너가 어느새 돌아온 것인지 뒤에서 얼쩡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와 대화할 것이 있는지 그녀에게 다가가 사근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따금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아하니 좋은 상황은 아닌 모양인데.. 그들이 하는 행동은 사람을 앞에 두고 할짓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미안하다며 눈짓하는 그녀에게 어찌 말할까. 가면 아래 가려진 눈만 굴려 주위를 살펴봤다.

 

'어디에 있는거지'

 

상인이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았느냐 하는 불안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곳을 나서기 전까지는 파트너라는 단어 아래 시선도 행동도 얽혀 있었다. 왜 보이지 않는건지. 불안감이 치밀어올라 목을 잠궈버릴즈음 유달리 시끄러운 그룹이 눈에 들어왔다. 우글거리는 그룹에서 큰 키 때문인지 툭하니 튀어나와 대화를 주도하는 이의 얼굴이 자연스레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

 

저기 있을 줄이야. 조금 떨어진 거리라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여러 목소리가 섞인 웃음소리뿐이었다. 보아하니 매우 즐거운 상황인듯 싶었다.  

 

… … …

…천박한 상인이 입만 살았군.

 

속으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편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대다. 아직도 그 깊은 심연을 떠올릴때면 두려움부터 치밀었다.  괜히 머리 아픈 답을 욱여넣으며 상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바라보던 상인의 입술이 미묘하기 비틀려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와 그녀의 파트너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상당히 심각해져 있었다.

 

"세레스, 아름다운 여왕님. 미안해요. 먼저 자리를 비워볼게요"

"아니에요"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았다. 잠시 머리 아팠던 혈기 넘치는 행성주들과의 대화에서 있었던 그녀와의 대화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그 잠깐 목을 축인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 말하며 파트너와 함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간 주위에 적막감이 흐르는 것 같았다. 텅 빈 느낌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람은 많았다. 다만 조금 허해졌을 뿐이지. 주위에 있던 이들은 서로 말이 맞는 이들끼리 그룹으로 뭉친지 오래였다.

 

"…쉬어볼까"

 

조금 전부터 극찬을 받던 붉은 빛이 선명한 와인이 담긴 잔을 건내받고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우 문 하나를 지났을뿐인데 분위기에 만족했다. 조용하면서 은은한 인공조명에 너무 밝지도 않은 정원은 눈이 갔다. 골디락스 행성에 들고 온 딱봐도 비싸보이는 목재 의자가 눈에 띄었다. 단순한 디자인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귀한 목재로 쉽게 건들지 못한건가? 뭐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이 행성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영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비싸다는 것 하나로 만족하고 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과는 딱히 상관없지 않은가? 음료를 들고 벤치에 앉았다.

 

"… 피곤해"

 

평화는 짧았다.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말도 못 할 정도로 작은 몸을 내리누른 탓이다. 그래도 지금 쉬어야 이후가 편할 것임을 알기에 피곤함에 감기는 눈꺼풀을 막지않았다.

 

 

 

 

[고조되는 음악]

 

'어리석고 오만한 소행성'

 

ㅡ천박한 자의 감상평이었다.

 

"그럼 여기까지 입니다. ^^"

"즐거웠어~"

"다음에 또 들려줘!"

 

다 소화시키지도 못 할 것이면서 단순한 흥미를 위해 쉼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별들을 바라봤다. 언젠간 더 자라서 그 핵을 취할 수 있을테지. 지금은 단순한 밑밥임에도 훗날 도움이 될 것이다. 오랜 상인의 삶을 지내며 그 긴 경험에서 얻어낸 값진 것이었다. 일을 마치고 슬슬 오만한 여왕님이 무얼 하나 천 안으로 시선이 굴러갔다. 마침 저 멀리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눈에 띄었다. 흐음, 너무 떨어져있으면 좋게는 안 보일텐데. 조금 전 상황을 본 행성들도 몇몇 있을 것이다. ... 어리석어라. 그들을 모두 물리며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정원이었다. 쉼터 같은 곳이었건만 자리를 잘못 잡았다. 이런 구석진 곳이라면 대부분 이쪽으로 오지도 않을텐데. 주위를 둘러보며 장식품들과 식물들 (분명 돈을 퍼부었을것이 분명한) 값어치들을 환살할즈음 세레스가 눈에 띄었다.

 

"여기에 계셨습니까^^"

"…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일순간 세레스의 아미가 밭고랑처럼 깊게 패이고 감겨있던 두 눈이 귀찮은 벌레라도 보는듯 가늘게 떠졌다. 정원은 순식간에 팽팽한 활시위처럼 긴장감이 흘렀다.

 

"할 일은 다 끝냈나보구나"

 

어린 행성주들에게 무어라 속삭였는지. 그 아이들이 불쌍해질 참이다. 하기사 거기서 살아남는 것도 자신들의 재주가 필요하겠지. 살 이는 살고 죽을 이는 죽을 것이다. 그것의 주체가 상인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물론입니다"

 

상인의 주위에만 다른 공기가 흐르는지 분위기 속에서도 태연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세레스의 옆에 앉아 다리를 꼬는 것이 퍽 자연스러웠다. 세레스는 가까워진 상인에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쉼터의 유리문 너머 다른 이들이 있었다. 

 

"여왕님께서는 영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입니다. ^^~"

"…."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곳에는 올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거지. 그나마 얻은 것이라곤 어느 몇몇 행성들의 이야기뿐이다. 몇몇 행성이 부딪쳤다는등의 따분한 이야기. 신경질적으로 그를 한번 노려보다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천박한 것이 알 필요는 없지."

 

그러고보니 이곳에 와서 한동안 무언가를 마시지도 못했다. 곁에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려했지만 입에 대려던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없었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옆으로 사라지는 잔의 자취였다. 자취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잔을 위로 들어 정원 가득 내리쬐는 천체빛에 비춰보는 상인이 있었다. 가면의 눈동자가 가볍게 휘어져 붉은 액체를 감상하며 바라봤다. 이내 와인을 한모금 입에 머금었다. 몇번 입안에서 굴리더니 목젖이 꿀렁이며 입안의 와인이 사라졌다.

[서막이 오르다.]

 

[우리에겐 첫 인상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주인의 신분적 위치와 취향을 반영한 내부는 고고한 회색과 우아한 푸른색의 두 조합만으로 이루어져 타인에게서 감탄과 위압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분명  몇몇 이들이 몇날 며칠을 골머리를 앓게 했을지 뻔했지만 그것은 만드는 자의 이야기였다. 이만한 공간에 올만한 이들은 그런 자신과 거리가 먼 이들의 이야기를 깊게 생각할 위치는 아니었다. 누가 작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알 생각도 없다. - 부속품과 다를 바가 없는 작은 장식품 하나까지 조형미와 어울림을 중시했는지 눈에 보였다. 아마 그들의 충성심을 뜻하는 것일테다. 아니면 희대의 폭군이라던가. 그 열렬한 충성심의 장소에 따각이는 소리가 같은 속도로 반복해서 울렸다. 그 울림은 드러나지 않는 것을 갉작이고 있었다.

 

따각

 

 

한쪽 벽, 높은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왕좌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소녀가 있다. 자신의 몸집보다 몇배나 큰 의자임에도 조그만 어깨와 가슴은 펴져 있었다. 크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모든 것을 압도하는 왕도의 모습이 작은 소녀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소녀에게 위엄이 어려있는 것일까. 천장에 매달린 인공 조명의 빛에 머리 위의 푸른 장식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예삿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장식의 가치를 단정짓는 이유를 묻노라면 소녀의 지위를 읆을 것이다. 그 후에는 모두 자연스레 긍정을 표할 것이었다.

 

소행성대의 여왕, 세레스

 

 

소녀의 이름이였으며 현재의 자리. 작지만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며 아름다운 여왕인 세레스는 푸른 벨벳으로 마감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형색이었다. 여왕이?  듣도보도 못한 상황. 계단 아래에 펼쳐져 있는 긴 카펫을 바라보던 고운 아미가 일그러졌다. 오질 않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어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 시간이었던 탓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시간과 고요함, 그로 인한 분노는 극적인 상상을 하기에는 충분한 조합이었다. 지금의 장소도 잊은 체 자유로이 흘러가던 상상 속에서 불쑥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나를 우습게 아는 건가? 천박한 상인따위가

 

 

거기에 생각이 닿자 머릿속은 참고 있던 불쾌감과 분노가 뒤섞여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했다. 평소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생각들이었건만 생각은 파도가 되어 서로 뒤엉키며 수십가지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거대한 우주에 속해있는 단체들중에는 상인들의 단체도 존재한다. 그들과 소행성들의 사이에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상인과 인사를 나누려는 것이 오늘 이곳에 자리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 상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목구멍까지 짜증이 올라왔다. 그저 잠시 얼굴만 보고 말 것인데 이것마저 여왕을 기다리게 한다. 소행성이 그리 얕잡아보이는 것인가. 하, 이제 되었다. 나의 사랑스런 아이들과 함께 다과를 즐기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나도 나를. 이 소행성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을 향해 빌빌거리거나 고개를 숙일 생각따위는 없었다. 입매가 딱딱히 굳어 팔라스를 부르기 위해 입을 떼려던 찰나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미 익숙한 소리였다. 왕좌의 손받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일순간 고요함이 찾아왔다. 드디어 나타났군. 헛웃음을 흘리며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제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자연스럽게 펴지며 딱딱히 굳었던 입매는 늘 그렇듯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서 가져왔을지 모르는 깨끗한 석재 위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한 상인이 나타났다. 하염없이 세레스를 경배하는듯한 모습에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뭘 하는 수작인지 모르겠군. 익숙하게 그 감정의 자욱을 지웠다.

 

 

"죄송합니다. 잠시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

 

 

잘못을 저질러 죄를 사해달라고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 당당함이 자신을 희롱하는 것 같아 일순간 아미가 일그러졌다.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하, 천박한 상인이라는건가. 입으로 먹고 살아 상대의 이성을 무너트려 거래를 마치고 그것을 마치 공정이라 말하는 자들. 극지역의 찬 공기를 내뱉는 것 같은 냉소가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일이라, 많이 바쁘셨나보군요."
 
작은 냉소는 정적을 몰고 왔다. 고고한 회색은 차게 얼어갔고 푸른색은 제 색깔을 잃고 얼음처럼 희게 변해간다. 이 맹렬한 충성심이 가득한 공간은 제 주인을 향해 희롱한 이를 향해 날카롭게 조여간다. 상대는 시간이 흐름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어버린 석상처럼 말하는 법도, 움직이는 법도 잊은듯이 미동도 없이 정적을 이어갔다. 시간이 얼마즈음 흘렀을까. 고개를 숙였던 상인은 세레스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그렸다.

 

 

 

* * *

 

 

 

 

상인은 자신의 공간에 몸을 뉘였다. 핵들로 장신된 단순한 형태의 공간, 소매를 뒤적여 카드를 꺼냈다. 푸른색과 흰색이 어우려져있다. 흰 장갑에 희롱당하는 카드는 이미 수십, 수백의 행성주들의 눈물과 피가 머금은 귀물이었다. 그것이 제 손 위에서 평화롭게 돌고 있었다. 돌아가는 카드, 고요함. 조금 전까지 마주했던 여성체 소행성을 떠올렸다. 그때가 떠오르자 입술 사이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과 닮은 미소를 그리던 여왕, 여왕님이라. 자신이 비등비등한 이들 사이에서 대우 받았다는 하나로, 신분이라는 저들끼리의 놀이에서 자신이 고귀한 줄 아는 것일까. 아니, 적어도 그 오만함 위에 자신과 비슷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나름의 책임감 정도는 느끼고 있는건가? 단단하지 못하고 무름이 보이는 그 미소에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온다. 그 소행성대는 과연 어떻게 유지가 될까. 저런 여성체 소행성을 앉혀놓은 이들이 궁금하다.

 

 

'무르디 무른 오만한 소행성'

 

 

자신을 향해 냉소를 하던 소행성에 흰 천 위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 천 아래 드리워진 미소는 세레스가 지었던 냉소보다 더욱 짙고 차가웠다. 언젠간 이용해먹을 패였다. 무르고 오만하디 오만한 여왕님, 그래서 더 써먹기 좋은 패. 뱅그르르 돌리던 카드를 쥐어 입가에 가져다댄다. 천 위로 느껴지는 카드의 딱딱한 느낌에 웃어보인다. 여왕이시여. 그 오만함에 이 알량한 무릎을 꿇을테니, 그 무름에 단단한 것인듯 겁에 질릴테니. 내가 달콤한 과실을 취할 수 있게. 그렇게 웃어주십시오.

 

 

 

* * *

 

 

 

 

상인이 떠난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세레스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어설 수 없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개어놓은 두 손이 간혈적으로 떨고 있었다. 그저 일개의 상인에게서 무엇을 느꼈기에 나는.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신에 헛웃음을 흘리며 일어서기 위하여 아랫입술을 이빨로 찢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끔한 통증과 비릿한 피가 입안을 가득 매웠다. 그제야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계단은 밟을때마다 상인의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흰 천을 뒤집어 썼다고 하나 그 정적 사이에 드러난 그 미소는 극심한 피로와 두려움을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상인을 보냈을때까지 겨우 이성을 붙잡으며 내보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드러날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을 파헤쳐보는듯한 그 깊은 눈은…

 

 

'천박한 것'

 

 

입술 사이로는 천박한 것이라는 단어가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갈때까지 끝내 말하지 못 했다. 그 웃음이 눈앞에 아직도 선명했다. 자신과 닮았지만 그 상인은 완벽하게 달랐다. 해저의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심연처럼, 모든 별들이 죽어버린 컴컴한 우주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파헤쳐보던 그 눈을 잊을 수 없었다. 다시금 찾아온 극도의 두려움에 헛숨을 들이켰다. 기어코 푸른 카펫 위로 선연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다신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상인만큼은 절대로.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이따금 우주는 변덕스러운 행성주들에 의해 시끄러워진다. 정기적인 모임도 - 참여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주로 젊은 층이나 타 행성과 교류를 꺼리는 이들 - 있지만 흥미라기엔 서로 면면을 한번 익히고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의 주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어린 행성주들의 관심을 끌려면 어찌야할까. 그 생각에서 비롯된 결과가 지금 세레스의 손에 들린 초대장이었다.

 

 

"…가면 무도회?"

 

 

기가막혔다. 어디서 듣도보도 못 한 유흥거리의 축에도 못 들 저급한 것이었다. 무도회란 무릇 서로 얼굴을 드러내며 친분과 교류를 쌓는 장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가면은 웬 말인가. 우습기 짝이 없다. 쉽게 넘겨버릴 초대장이었지만 선뜻 놓을 수 없었다.

 

 

"마주치기 힘든 행성주들을 볼 수 있겠지"

 

 

눈매가 가늘어졌다. 거대 외계 행성주가 보내온 초대장이었다. 거기다 초대장은 화려한 축에 속했으며 가면이란것은 파릇파릇한 행성주들의 호기심을 끌어모을 것이다. 거대 외계 행성주 자체, 허영심과 사교성으로 유명한 이였다. 아마 화합의 장으로 만들테지. 이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물론 우주에서 한번씩 여는 그 어이없는 모임에 가는것도 좋기는 하나... 이런 곳이라면 안나오던 이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잼을 듬뿍 바른 갓 구운 스콘을 입 안에 집어넣고 오물거렸다. 담백한 스콘과 바로 잼으로 만든 사과잼이 혀를 감싸안는다. 팔라스의 빵은 오늘도 제 입에 금빛 종을 울렸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매가 코코아 위에 얹어진 마시멜로처럼 부드럽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빵의 식감이 끈적이며 녹아내리는 잼과 함께 희롱한다. 절로 높은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흠흠"

 

 

다음에도 스콘을 구워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목구멍 속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달콤함을 붙잡고 싶었지만 달콤함은 감칠맛을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그 달콤함, 아름다운 무대는 깔끔하게 불이 꺼져야 비로소 끝난다. 그 남은 여운을 끝까지 붙잡지 않고 미적지근한 홍차를 한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꽃 향기가 나는 홍차는 거대한 벨벳 커튼을 내렸다. 박수갈채가 울리는 그 홀이었건만 마치 커튼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무대 장치마냥 딱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화려하고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은 초대장 맨 아래에는 간결하게 - 거의 유일했다.-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파트너

 

 

그 안에서 파트너란 같이 다니는 상대를 뜻할 것이다. 물론 친구나 가까운 사람 혹은 자신의 연인을 데리고 가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젊은 행성주들이 많을 것이 다분하며 거대 외계 행성주가 원하는 것은 선남선녀로 자신의 무대를 환히 빛내길 바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폭이 더 줄어들었다. 누구에게 파트너를 부탁을 해야하는 것일까. 이 무도회장에서 시선을 끌어야 했다. 자신에게 이목을 끌 수 있게 도와줘야하는 상대. 좁디 좁은 자신의 인맥에 혀를 찼다. 왜 이 행성주는 이런 걸 정해놓아선. 무엇이 그리 바쁜지 열리는 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초대창 탓인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미 다 식어버려 미적지근한 홍차를 한 모금 더 마시려다 문득 한 행성이 떠올랐다.  무대 위에서 모든 행성들이 환호하는 한 남성체, 그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다른 행성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강인한 감탄스러운 이. 순식간에 입 안이 깔끔해졌다.

 

"팔라스, 외출 준비를 해야겠어"

 

 

 

* * *

 

 

 

 

그 깔끔함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자신의 키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고 담담하게 말하는 이는 익히 보던 이였다. 새 모양의 위성, 그 위성이 무릎을 꿇었음에도 올려다보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것까진 넘길 수 있었지만. 이어진 말들이란.

 

 

"…그래서 지금 총사령관… 아니 주피터님과 새턴님께서는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한동안 이 주변 일대를 시찰을 하신다니 하니…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번 웜프들의 동태가 수상해서 말입니다."

 

 

설명을 돕는 목소리에 곁에 서있는 험악한 인상의 주홍색의 위성을 올려다봤다. 아, 목 아파라. 무릎을 꿇지 않고 자신을 무덤덤하게 내려다보는 것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며칠 남지 않은 무도회고 무엇이고 한동안 대화 한 번 못할 것이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이름조차 알기 싫은 웜프들따위에 빼앗기는 느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띄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 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이에게 보여주지 못한 드레스를 잡고 예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고개와 무릎을 까딱이곤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부복해있던 가니메데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서있는 제 친우는 팔짱을 낀 채 영 마땅치 않다는듯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는 두 위성은 자신이 모시는 이들을 떠올리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무도회장의 파트너, 그것을 정하는 일은 그 이후 어렵지 않게 흘러갔다. 헥토르, 트로이 전대의 수장. 그와 함께하기로 정해졌다. 정확히는 대화 후에 정해진 것이었다. 그도 나도 모두가 동의한 파트너. 원래 입었던 드레스에서 조금 바꿔 길이가 늘어났다. 끝자락이 반짝여 푸른 물결처럼 보이기도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허리에 맨 천을 고쳐매고는 걸음을 옮겼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헥토르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그 둘을 바라보는 팔라스 역시 깐깐한 안경 너머로 웃었다. 어울리는 한쌍의 모습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팔라스는 이만 가야한다고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헥토르의 표정이 급변했다. 

 

 

"지금?"

 

 

이후의 멋진 시간을 즐길 이의 얼굴이 아닌, 믿지 못한다는듯한 일그러진 얼굴로 변해있었다. 한쪽 귀에 손을 얹고 주위에 있는 이들을 잊을 정도로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급하게 걸음을 옮겨 떨어진 헥토르는 허공을 향해 몇번이고 말을 뱉었다. 이따금 단어는 현재 바깥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웜프들, 변종,  트로이, 당장 

 

근처에서 헥토르를 기다리던 세레스와 팔라스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웜프,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것들의 변종이라는 것은 껄끄러웠으며 지금 위급한 상황임을 말했다. 연락을 하던 헥토르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헥토르는 이를 악물고 세레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치 바닥에서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듯했다. 왜 하필 지금인걸까. 왜 하필- 몸이 부르르 떨었다. 지금 자신을 찾는 이들이 많았으며 상황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급변하고 있을 것이다.

 

 

"…세레스"
"가 봐, 지켜야하지 않겠니"

 

 

겨우 세레스의 이름을 부르던 헥토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세레스는 어서 가보라는듯 헥토르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어 아래에서 위로 살짝 띄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세레스는 무도회장에 가야한다며 지금 눈앞의 다급한 순간에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아이같은 행동을 구는 여성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빨리 가보라 재촉하는 세레스에 헥토르는 코끝이 시렸다. 죄송스러웠다. 오늘처럼 이렇게 아름답게 꾸몄건만 그 손을 잡고 에스코트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시리게 다가왔다. 고개와 허리를 숙여 군신의 예를 취하자마자 텔레포트를 타고 사라졌다.

 

 

 

헥토르, 어느 전사

오늘 단 하루, 한 여인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남성이 아닌 무기를 쥐어야하는 전사가 되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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