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꽃잎은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벌을 꾀어내는 단내 뒷편으로 갓 손질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풀 잎사귀 특유의 간지러운 향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주 보았지만 이름 모를 꽃들에서 꽃잎 하나라도 수중에 안긴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유명한 꽃들에 이르기 까지 틈도 없이 서로 뺨을 맞대고 있었다. 손끝으로 꽃잎을 쓸어보던 W.H는 다발을 제 코에서 한치도 되지 않는 거리로 끌어당겼다. 단내도 풀 내도 잔잔하기만 했다. 어떤 꽃이 어떤 향을 풍기는지 구별할 수 없었다. W.H는 그것이 소심한 꽃들 나름의 수줍음일지에 대해 생각해 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저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시리우스가 W.H에게 꽃다발을 건네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시리우스는 이따금 생소한 물건을 품에 안고 바로 들어오고는 했다.
그것은 병 자체에서 연보라색 빛을 내뿜는 술일 때도 있었고 이름만 들어본 동화의 애벌레가 필 듯한 괴상한 물담배일 때도 있었다. 차라리 그런 종류라면 괜찮았을 터였다.
W.H는 여닫이문 풍경소리에 졸음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덩치의 사내가 예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곁눈질로 훑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가슴팍에 꿀단지라도 숨겨 들어오는 것인지 도둑 발로 한 발짝 두 발짝 거북이걸음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감춰야 한다면 발소리를 죽이기 전에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먼저 신경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관심은 시리우스가 소중히 감싸 안은 물건으로 돌아간 이후였다. 관심과 호기심이라면 학을 뗀 지 오래인 성격인 저가 왜 드물게 관심을 가졌느냐 하면은, 먼저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그 물건을 들이는 그 태도 때문이었고, 둘째는 신문지 홀 겹 포장이 흘러내려 보인 내용물 때문이었다.
항상 이맘때쯤 졸고 있을 제 모습을 떠올리고 오늘도 그러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순수한 것인지 단순한 것인지 모를 추론방식에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참으로 깔끔한 논리야. W.H는 아직도 저가 무의식을 헤매고 있다 믿을 그에게 덤덤한 기상신고를 보냈다.
오셨습니까.
깨어있었나?
되묻는 말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우스는 품에 있는 물건 한번, W.H 한번 번갈아 보더니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깨 있을 거란 일말의 예상도 없었던 것인지. 그의 단순함에 대해 덤덤하게 경의를 표하는 차에. 내려앉은 침묵을 먼저 걷어낸 것은 시리우스였다.
언제부터 깨어있었나?
처음부터요.
모르셨습니까, 그 말에 시리우스는 어깨만 으쓱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W.H 역시 긴 대화를 즐기지 않았기에 새로이 질문을 건넨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내용물을 숨기기 위한 포장이었던 싶은 신문지가 반쯤 벗겨져 내용물이 예전에 까발려졌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줘야 하나에 대해 고민이 들 뿐이었다.
포장 안쪽에는 얼핏 짐작한 데로 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발로 묶인 것은 제가 한 손으로 겨우 감싸 쥘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흔히들 애정표현에 쓰는 붉은 꽃은 아니었어도 상처 날까 고이 안은 모양새로 예상되는 쓰임새는 획일적이었다. 거기에 최근 들어 가게 메뉴판에 하나둘씩 추가되기 시작한 허브 티로 그가 다발을 어디에서 공수해 왔는지 까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것은 꽃다발의 출발지가 아니라 목적지였다.
사회성이라는 표현과는 담을 쌓은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시리우스가 다른 사람에게 호의 이상의 대접을 베푸는 것은 손에 꼽게 드문 일이었다. 손에 꼽는다 해도 펴지는 손가락은 하나뿐으로, 제 짝지가 머릿속을 헤집을 대로 헤집어 놓은 그의 의동생뿐이었다. 이따금 가게 일이 끝나고 보너스라며 받았던 술상에서 들었던 얘기로 유추하건대 그는 꽤나 팔불출 이었다. 그러나 동생의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이에게 호의 이상의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태양계나 저는 모르는 몇에 약간씩의 친분은 쌓아둔 것 같았지만. 그래봤자 드문드문 만나 안부를 묻거나 서로 하룻밤 술동무 삼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시리우스가 누구를 위해서 양팔 그득 정을 담아 들어오는지.
시리우스는 가게로 오기 전에 동생에게 들린다. 동생을 위한 꽃이었다면 진즉 그의 품을 떠난 후였을 터였다. 곱게 꾸민 모습은 용도에 있어 없는 창의력을 쥐어짤 틈을 주지 않았다. 태도부터 내용물까지 확인사살을 날리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가 특별한 이를 위해 손수 꽃을 구해와 내미는 모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친절하고 예의 바른데 왜 드라마에서 자주 볼법한 연애장면에 익숙한 얼굴을 끼워 넣기 힘든 것인지 저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W.H는 같은 질문을 두 번 정도 반복해본 뒤 이르게 결론지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복잡한 고민의 전개식을 그려 줄 정도로 그는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제 눈으로 보지 못한 일이라 함부로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라 머릿속으로 단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양가 없는 생각들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떠올리기를 몇 번. 졸음이 바짓단을 적실 무렵. 한동안 멎어있던 발걸음이 다시금 소리를 내었다. W.H는 눈을 감고 터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 두 번, 곧 저를 지나쳐가면 줄어들겠지. 턱괸 손은 바로 두고 남은 손으로 톡 톡 발걸음 수를 세었다. 아마도 다섯 번 더 움직이면 제 앞을 지날 것이다. 다섯, 넷, 셋, 둘. 발소리가 정확하게 끊겼다.
W.H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사내로 보아 제 박자 맞추기 놀이는 끝나버린 듯했다. 네 번이었구나. 손톱만 한 허탈감이 들었다.
W.H?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다만, 나쁜 일이라도 있는가?
나쁜 일이라. 저가 행한 바보 같은 놀이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하는 말에 태연하게 딴소리를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지만. 저는 그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피곤한데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아서 그럽니다.
저런, 자게 두었어야 하는데. 좀 쉬게나.
이제 깼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쪽잠이라도 자두는 게 낫지 않겠나.
대답을 듣지 않고 시리우스는 잡다한 자재가 쌓여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다시 한 번 괜찮다며 그를 붙잡는다 해도 그는 자기가 괜찮지 않다며 지금처럼 홀 겹이불을 들고 왔을 것이다. 감기 걸린다며 저에게 둘둘 이불을 싸매고 만족스러워하는 그에게 걸리려면 예전에 걸리고도 남았다고 해주고 싶었다. 애초에 가게 안은 항시 따뜻한 편이었다…. 수선에 가까운 저 행동들은 유난스러울 만큼 순한 본성 때문인지 아니면 저를 갓 알을 깬 병아리 취급하는 것인지. W.H는 두 번째 경우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려해보고 싶지 않았다. 시리우스는 이불을 꼼꼼히 둘러주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러면 감기는 안 걸린다네. 안 그러셨어도 안 걸렸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접어두고 W.H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밖 온도는 어쩐지 몰라도 어깨를 감싼 이불까지 더해져 주변 온도는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시야는 느긋하게 점멸했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곧 잠들겠지. 턱 괸손을 풀어 팔베개에 턱을 올렸다. 가슴까지 차오른 잠에 곧 묻혀버릴 참이었다. 시리우스는 제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걸터 앉아있었다. 잘 자라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넌지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속으로만 한번 이름을 부르는 때에 눈이 맞닿았다. 졸음에 먹혀버린 척 고개를 떨굴까 짧은 인사라도 남길까. 고민은 시리우스가 저를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자기 전에 이것 좀 받아주겠나?
무엇을 말입니까. 물을 필요는 없었다. 시리우스는 보란 듯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신문지가 벗겨진 알몸의 꽃다발이 손길에 잘게 흔들렸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앙증맞고 고운 꽃이었다. 분명 코를 가까이한다면 단내가 풍겨올 것이고 꽃잎을 쓸어보면 마르지 않은 물기가 만져질 것이다. 살에 가까이하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간지러운 물건을. W.H는 꽃과 그를 눈짓으로 번갈아 보았다. 예의 그 미소가 지금은 장난기로 가득 찬 꼬마와 겹쳐 보였다. 질 나쁜 장난에 취미를 두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수줍게 손을 타길 기다리는 꽃다발엔 미안했지만 올바른 반응에 대해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W.H? 잡념에 빠진 저를 그가 끌어올렸다. 어, 그게. 더듬더듬 무작위적으로 널린 단어의 조각은 집어 드는 순간에 부서져 버렸다.
시리우스는 멍한 저를 보더니 싫은가?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싫고 말고를 떠나서 도통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하는 말이 혓바닥 아래에서 넘실거렸다. 그렇게 묻고 그는 앞으로 내밀었던 꽃다발을 슬쩍 뒤로 빼었다. 거두어지는 손아래 가게 조명에 내린 그림자가 아쉬워 보여 무심코 꽃다발 한 자락을 붙잡았다. 아뇨, 싫지 않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이 대답이 상황에 맞는 것인지 확언할 수 없었다. 고민하지 않게 꽃다발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팔 닿는 가까운 곳에 두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굳이 제가 받아들이고 말고를 결정해야 하는 쪽을 택했는지. 정말로 남을 곤란하게 하는데 재능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리우스도 제 표정을 마저 읽어내지 못하고 팔을 거두는 참이었던 터라 그쪽으로 가져가는 꽃다발에 저가 매달리는 꼴이 되었다. 우스운 꼴이겠구나. 옅은 한숨은 꽃다발을 붙잡은 손에 묻혀 시리우스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아까와 똑 닮은 웃음을 짓고 꽃다발을 제게 건넸다. W.H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걸 받아들였다. 짐작한 대로 꽃잎은 촉촉했고, 풀꽃 내가 올라왔으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정이 적나라하게 담긴 채였다. 어쩌지, 웃으면 되나. 꽃들은 곤란할 정도로 곱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들었다. 왜 이걸 저한테. 물음이 목구멍에서 찰랑. 입만 열면 질문이 쏟아질 텐데. 찰랑찰랑. 목구멍만 간지럽히고 차마 입 밖으로 쏟아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의구심만 잔뜩 담은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몸 안에 갇혀버린 의문이 눈에서 메아리쳤다. 소리 내어 묻지 않았으니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래도 대답을 기다렸다. 당연하게도 시리우스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은 꿈 꾸라는 마침 말과 함께 그가 돌아서면서 대화는 일방적으로 단절되었다.
W.H는 물을 타이밍을 놓쳐버린 질문을 떠올리고는 두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저에게 이런 것을 준 것인지. 사실 그리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구절을 흥얼거리는 그에게 한마디 물으면 되는 것이다. 뻐끔뻐끔. 알아채 주길 바라며 소리 없이 물었다. 졸음이 혀를 묶어두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부르는 노래가 자장가처럼 부드러웠기 때문에 W.H는 다시금 졸음이 밀려오는 것이라 믿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머뭇거림 없이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선잠 들은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에 예상은 순식간에 녹아버렸지만.
* * *
얕은 잠이 깨었을 때 가까운 노랫소리가 들렸다. 새근새근 머리를 채웠던 열로 뿌연 시야에 눈에 익은 사내가 들어왔다. 수십 번이고 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익숙해졌을 뿐 질려버린 노래는 아니었다. 속으로 따라부를까 가사를 되짚어 보는 참에 시리우스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그는 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옆 의자에 걸치듯 앉아있었다. 눈길이 뒤엉켰다. 목구멍에 달라붙은 질문들이 다시금 혀뿌리를 간지럽혔다. 더는 태연하게 눈을 감겨줄 졸음은 없었고 큰 목소리를 내야 들릴 곳에 서로가 있지 않았다. 물어봐야지. 그러니까. 왜. 제게. 입술만 열렸다 닫혔다 아가미처럼 덜컥거렸다. 소리 내는 모든 기관의 톱니가 헛돌았다. 사실 눈을 맞춸을 때 그는 이미 저가 묻고 싶은 말을 듣지 않았을까. 요동도 없는 졸음을 뒤집어쓰고는 제가 손쓸 새도 없이 밀려왔다 한 것처럼 명백한 핑계고 변명이었다. 목이 멨다. 눈을 피하는 제 어깨에 시리우스가 손을 올려놓았다. 부산을 떨던 질문이 숨을 죽였다.
목이 잠겼을 텐데, 마실 것이라도 가져오겠네.
괜찮다며 마저 말을 잇기도 전에 그는 데운 차 하나를 제 앞에 내려놓았다. 언젠가 가게 안을 노니는 잔향이 달아 향이 좋다며 흘러 말했던 종이었다. 우연이겠지. 그 말에 손에 쥔 알록달록함으로 눈길이 닿았다. 사실 꽃다발도 그런 종류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베푼 친절이 오해를 쉽게 사고 하는 경우. W.H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물음을 삼켜버렸다. 목이 아니라 배 속에 있으니 눈 맞춤에 발작적으로 고해해버리는 일은 없겠지. 생각해보면 시리우스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제게 꽃다발을 건넸을 터인데, 그걸 의미가 있다. 없다 속으로 고민해 봤자 저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해하지 말자. 그러니 묻지 말자. 저를 타이르며 손에 힘을 풀었다.
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단 향만 열꽃 처럼 피어오르더니 막상 혀에 닿아서는 향을 배신한 맛들이 전해졌다. 한 모금 넘기자 목을 타고 속에 열이 퍼졌다. 차가 지나간 자리가 뜨거웠다. 열띤 찻물이 발자국 찍듯이 제 안에 화상을 피우고 갔나. W.H는 찻잔이 식기만을 기다렸다. 어서 저가 열을 느끼지 못하게 식어버렸으면. 괜스레 열이 얼굴로 퍼지는 듯해 고개를 숙였다.
* * *
그 해괴한 상황은 이후에도 몇 번 씩 되풀이되었다. 시리우스는 계속해서 처음 보는 물건들을 가게로 들였고 꽃다발은 비주기적으로 그 취급 대상이 되었다. 그런 날이면 W.H는 달아나던 잠의 꼬리를 단단히 붙잡아 메었고, 그는 어김없이 투정 같은 졸음을 보드라운 향이 나는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리고 잠에 빠져들기 전이면 어떤 의도인지 모를 고운 꽃다발을 건넸다. 잠에서 깨어날 적에는 같은 노랫소리가 들렸고 잠시 저와 눈을 맞춘 그는 같은 향을 풍기는 잔을 내밀었다.
과정 일부는 아니어도 제가 느끼는 부분에서 몇 개 공통되는 부분이 더 있었다. 저가 처음으로 꽃다발을 쥐어본 날 것 채로 삼킨 질문은 소화되지 않고 매번 그와 눈 맞출 때마다 살아 있다며 요란하게도 지느러미를 펄럭였다. 그리고 매번 입과 목구멍과 속을 다 데일 만큼 뜨겁게 느껴졌고, 찻물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잔을 멍하니 바라보면 어느 순간 김은 가셨지만, 한 모금 두 모금에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에 저는 화상을 입었다. 목구멍부터 위장 밑바닥까지 이리 화끈거리는 것은 분명히 차가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식은 차를 달라 하면 될 것을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저가 차가운 차에도 화상을 입는 몹씁 열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계속될 수록 유치한 이름의 기대가 질문 뒷면에 차올랐다. 어느 상황이든 열의를 표하는 저가 아니었기에 흙으로 차올랐던 빛을 꼼꼼히 덮어두었다. 흙투성이 손을 감추고 태연하게 눈을 맞췄다. 안타깝게도 손에 묻은 흙이 말라붙기도 전에 시리우스는 삽 순간에 덮고 있던 것을 치워내었다. 깊은 구덩이에 묻어버려도 빛은 금방이고 다시금 떠올랐다. 혀를 데였던 열이 그 안에 있었다. 위장이 아니라 제 안껍질을 데이고 말았다. 화상이 번져갔다.
차차 열이 도지는 저에 비해 시리우스는 어디 한구석 변한 곳이 없었다. 말투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태도는 상냥하기 그지없었고, 가끔 사소한 부분에서 허를 찌르곤 했다. 그는 저가 늘 그렇게 오해하게 쉬운 행동은 일삼는 것에 다른 의미를 쌓아보고 결국엔 무너트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며 막 부순 탑을 잘 자라며 웃는 얼굴에 으스러트리고 남은 부스러기로 돌탑을 쌓아온 저를 알고 있을까. 의도를 가지고 정을 베풀었다면 속으로 욕이라도 할 수 있었고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을 시리게 내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나오는 꿈에 속아 다음 날 내내 시선을 피해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모든 가정이 행해지지 못한 까닭은 어쭙잖은 열병을 시작된 영문과 같은 종류였다.
시리우스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꽃도 노래도 단항이 나는 차도 다 그가 친절했기 때문이었다. 저가 꽃다발을 받은 날 유난히 밤잠을 설치는 것도 꽃을 쓸어보며 잡념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도 서로 눈을 마주할 때 더는 덤덤할 수 없게 된 것도 전부 그가 너무나 친절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아는 마냥 모르는 마냥 저를 뒤집어 놓을 바에는 속을 털어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훑어내어 다시는 서툰 돌탑을 새울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해주었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기도를 염불처럼 외웠다.
제 속에 싹 튼 질문이 여물어 봉오리를 맺어 갈수록 W.H는 곪아갔다. 처음엔 왜냐며 그에게 물으면 될 줄 알았는데 미쳐 물을 수가 없었다. 그 질문을 삼키면 녹아서 없어져 버릴 줄 알았는데 속에서 녹긴커녕 멀쩡히 자리 잡아 느껴질 만큼 자라났다. 나중 가서는 받은 꽃다발을 뚝뚝 꺾어서 그가 갈 수 없는 곳에 한 잎씩 묻어두고 오면 더는 낯선 열병도 뿌리내린 물음도 없던 일로 덮어 둘 수 있을 텐데, 하며 줄기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줄기에 철심이 박혔는지 제 손이 떨렸는지는 몰라도 W.H는 꽃을 꺾을 수 없었다. 꽃 하나 제 속에서 들어내지 못하는 손이 부끄러워 애꿎은 이불만 부여잡았다.
백지에 스며든 빛깔을 보고도 못 본 척하려 부단히 노력했던 게 아까울 정도로 쉽게도 봄은 손끝을 적셨다.
한번 두 번 몇 번씩이나 지새운 밤과 말라비틀어진 꽃들이 얼마나 쌓였을 즈음. 단잠에 빠졌던 몸을 일으켜 어깨에 대롱 대롱 매달린 이불이 잔물결처럼 흘러 내릴 때. 잠이 말라붙고 시선이 얽히는 그때에. 각막 뒤쪽을 어루어 달래는 눈길에 의문을 매어둔 고삐가 풀어졌다. 겨우 가둬 둔 보람도 없이 의문은 위장을 찢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세 치 혀는 붙잡을 새도 없이 날 것의 생각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뱉어내었다.
왜 제게 꽃을 주시는 겁니까.
꼭 저가 아니어도 아낀다 생각하는 그 누구라도 꽃다발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로 저를 확실하게 꺾어 주었으면. 그렇게 저가 목메는 꽃다발의 의미는 모두에게 행하는 친절과 평등의 상징이라는 말로 저를 푹 찔러 터트려 주었으면. 저는 기대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 한마디면 더는 식은 차에 속을 데여 앓을 일은 없다. 여기에 돌탑의 무덤을 세우고 작은 기념비를 올릴 것이다. W.H는 그 기념비에 똑바로 새길 대답을 기다렸다. 오갈 때마다 쓸어보며 다시는 탑을 쌓거나 무너트리지 않도록.
열병이 제 숨을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차라리 여기에서 답을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도 괜찮았다. 그럴 수 없어 눈을 가렸다. 눈에도 화상이 번졌다. 진물이 흐를까 눈가가 벌게지도록 비볐다. 데인 자국이 볼을 타고 번졌다. 왜 그는 저가 깨어나면 가까이 있는 걸까. 왜 그는 저와 눈을 섞었을까. 왜 모두에게 친절했을까. 왜 저가 기대할 만큼 친절했을까. 기대하게 할 마음이 없었다면 왜 지금 저를 욕해주지 않는 걸까. 이 한 마디가 흘러나오기까지 행동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혼자 져버렸던 제 밤을 알고 있을까. 짧은 이름을 되뇔 때 마다 화상이 맺혀버린 혀를 알고 있을까. 전부 묻기에는 목이 멨다.
한동안 말이 없던 시리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네.
뼈마디 굳게 선 손이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 내렸다. 느리게. 숨이 모자를 정도로 느리게 열로 범벅된 볼에 입을 맞췄다.
다음에, 자네가 입을 맞춰오는 날에 알려주겠네.

W. 빰 - 시리우스A
D. 캄 - 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