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 * *
"덜스, 덜스!"
깁숙한 의식속에서 저를 부르는 익숙한 누군가에 덜스는 천천히 눈을 끔뻑거렸다. 구름에 둥실거리며 떠다니는 몽롱한 느낌에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이제 일어난거야? 대체 얼마나 잔거야. 제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제 손으로 무거운 눈가를 비비곤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눈동자를 돌렸다.
"… 먼?"
"일어났어? 계속 자고있길래… 다른애들은 바빠 보여서 깨우러왔어."
많이 피곤했어? 너 정말 오랫동안 자더라, 나 진짜 열심히 깨웠는데. 느릿이, 그러면서 또박한 발음으로 제 말을 이어가는 먼을 덜스는 동그래진 눈동자를 들여냈다 감추기를 반복하였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여행은요?
"무슨 소리하는거야, 올해는 여행 없었잖아. 꿈 꾼거야?"

고개를 갸웃이며 묻는 먼에 덜스의 얼굴 위론 당혹감이 서렸다. 꿈? 그 모든게 다 꿈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가 꿈이였던거지?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진정시키려했다마는, 진정은 커녕. 오히려 숨까지 더 쉬기 힘들어졌다. 제 옆에서 왜 그러냐며 묻는 먼의 말에 채 답을 달기도 전에, 어느새 몸은 바닥을 향해 기울어져 맥없이 추락했다. 당황하며 저를 흔들며 소리치는 먼의 목소리 조차도 멀어져갔고. 그는 그대로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 * *
다시끔 정신을 차렸을 즈음엔 제 친구들의 엄청난 질책이 저를 반겨주었다. 허나 그것은 저를 걱정하는 것임을 잘 알기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눈가에 물기를 품고 제 품에 안겨오는 웬즈를 토닥이며, 후끈거리는 제 머리에 정신을 다잡으며, 저에게 향해오는 걱정의 말들을 다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들려오는 말로는 감기와 함께 찾아온 피로로인해 쓰러진것 이라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아팠는데, 여기서도 아프다니. 그로써는 웃기면서도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어찌돼었건, 땍땍, 소리를 지르며 휴식을 권하는 제 친구들의 권유에 그는 침대에 꼼짝도 못하는 신세다. 뭐, 그로써는 좋은 기분이었다. 마치 꿈 속에서의 일이, 아니, 저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그에게 온 것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 *
움직이지도 못했던 제 몸은 친구들의 정성스런 간호에 꽤나 빠르게 회복되었고, 새벽녘 즈음에서야 몸이 나아졌다. 덜스는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전했다. 원채 약했던 저였는데 이리도 빨리 회복된 것은 제 친구들의 몫이기 때문이였으니까. 문득 덜스는 고개를 돌렸다. 바깥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며칠 내리지않았던 눈을 다 채우려는듯,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리는 양은 더욱 많아져갔다. 덜스는 침대 난간에 제 팔을 둘러 그 위에 얼굴을 올린채 잠에 빠진 웬즈의 어깨 위로 담요를 둘러주곤 조심스레 세웠던 상체를 뉘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꿈 속에서, 제 귓가에 들어온 조금 거슬리는 목소리에서 나온 그 말은 너무나도 생생히 들려왔다. 꿈이라도 그리 생생하지는 않았을텐데. 아니, 정말 꿈? 의문은 조금씩 커지고 커져갔다만 이렇다할 해답은 나오지 않았는지 덜스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뭐, 꿈이겠지. 다들 기억도 못하던데…. 라 중얼거리면서 몸을 뉘였다. 덜스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눈은 아직도 내리고있었다. 덜스는 눈을 감았다. 더이상 생각해봤자 얻을 정보는 없어보였다. 그냥 이대로 잠들어 시간이 지나면 좋은 꿈이였구나 라고 생각하리라. 그리 다짐을 하며 조심스레 잠에 들었다.
* * *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또다른 덜스는 덜스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자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역시 꿈 속이라 생각하게 두는게 맞으려나. 쿡쿡 웃음소리를 죽이고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않으며. 그리 하는 또다른 덜스의 손이 유난히 투명했다. 마치, 존재가 사라지는 것 마냥. 제 손을 좀시 쳐다보던 또다른 덜스는 덜스의 머리에서 손을 때어냈다.
"이 이상은 위험하겠네."
손가락 끝부터 투명해지는 제 손을 바라보던 또다른 덜스는 제 열 손가락들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였다.
째깍. 째깍.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12시를 지나감에 맞추어 눈은 더없이 많이 내렸다. 그걸 바라보는 또다른 덜스의 눈동자 안에 드리워져있는 숲으로도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

덜스의 귓가에 덜스가 깨지않도록 조용히 속삭여준 그의 표정은 여간 편안해보였다. 이제 그가 후에 깨어난다면 자신의 존재는 사라질것이니.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드는 또다른 덜스였으나, 언젠가 또다시 만나리라. 그리 생각하며 또다른 덜스는 방을 나섰다.
덜컥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또다른 덜스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덜스의 방문에 들어온 하얀 달빛만이 또다시 이별의 밤임을 알려주었다.
바깥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다.
어젯밤 한바탕 눈이 내려 바깥의 모든 것들의 색을 잃어버리게 한 것을 수습하려는듯 지금의 계절 답지않게 따스한 열기를 품어서, 어제의 눈바람은 꿈이였나- 라는 착각을 줄 정도였다. 푸릇한 나뭇잎을 머금은, 부스스한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강 정리하는 덜스 역시 제 얼굴을 때리는 겨울빛에, 꿀같은 잠을 벅차고 일어난 것이기에 이미 말을 다한 것이니라.
새하얗게 변한 창밖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덜스는 제 옆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돌리고. 그대로 제 입꼬리 한쪽을 올려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 꿈에 젖은 옆 사람이 몸을 움직임에 제 하반신을 덮고있던 이불은 사내의 곁으로 밀려난지 오래였고, 그로인해 옅은 냉기가 그의 몸을 뒤덮었으나. 지금의 그로썬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제 옆의 사내였지.
"이봐요, 나. 이제 그만자고 일어나세요."
벌써 해가 중천으로 떴단 말입니다. 어서 일어나서 씻으세요. 사내의 몸을 조심히 흔들며 질책하는 소리를 내뱉는 덜스에 사내는 이적이적 잠에 푹 절인 제 몸뚱이를 겨우 일으켰다. 아직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내의 등을 때리며 갈아입을 옷과 여분의 수건을 두 손 위에 으득히 쥐어주곤 샤워실로 밀어넣은 덜스는, 후에 제 귓가에 들려오는 물소리에 깔끔하게 정리 된 제 머리카락을 질끈 묶으며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한. 샤워실 앞에 "깨끗하게 안 씻고 나오시면 제가 씻길겁니다!" 따위의 말을 뱉는 것 을 잊지않고 말이다.
부엌으로 들어선 덜스는 제 허리춤에 한가운데 삐뚤빼뚤 , 어린아이가 투박한 손으로 그린 듯, 어릴 적 유치원에서 자주 그려보았을 그런 모양새의 꽃이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는 허리위로 리본을 만들어 그것을 고정시키곤 흥얼거리며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손에 도구를 들며 재료를 손질하면서 제 입에서 흐르는 소리는 가사없는 노래였지만, 상쾌한 아침바람에 따듯한 온기를 품은, 제 주위에 퍽이나 어울리는 음악이다.
W. 이소향 - 덜스
D. 하늘색다람쥐 - 덜스

흥얼거리는 사이, 요리는 금새 완성되었다. 비록, 보기에는 볼품없어도 요리의 '요' 자도 모르는 초짜가 만든것 치고는 꽤나 성공적인 첫 요리인것이다. 나름 만족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인 초록빛 소년은 두사람이 족히 먹을 반찬들과 국을 만들어내곤 하얀 장소위로 수수한 색들을 띄운 꽃들이 구석자리에 밀려나있는 접시들을 집어들곤 모락모락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음식들을 조심히 옮겨 담았다. 시간을 들인 만큼 꽤나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하나 둘 제 자리를 찾아감에 하얀것을 뿜어대며 제 모습을 뽐낸다.
꽤나 많은 음식들을 만들었기에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체력역시 만만치 않게 들어갔기에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식탁의자 위로 쓰러지듯 앉았다. 기댄 등과 뺨 위로 닿은 뒷받침의 끝머리는 힌없이 차가우면서도, 저 위로 뻗어오르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귓가를 때리는 물소리에 문득 덜스는 생각했다. 자신과 그. 나와, 나 자신. 어이없게도 저를 덜스, 그 자신이라고 떳떳하게 밝힌 사내와의 특이한 만남을.
* * *
시작은 이러하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의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던 중 급작스럽게 쳐들어온 주일즈들에 무어냐고 채 묻기도 전에 고개를 들이밀며 여행을 떠나자며. 그리 떠벌리며 덜스를 설득하는 프라이였다.
여행. 여행이라. 자신과 다른 사람, 그들만의 추억을 만나고. 추억의 늪에 빠져 헤엄치는 그 곳에 자신도 있으리라. 둥실거리며 펼쳐지는 상상은 달콤한 솜사탕만 같아서,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으나 그의 대답은 생각과는 반대인, 거절을 표하였다.
후에 제 기대에 배신하지않는 행동을 보이며 땍땍 소리를 지르는 프라이였고, 덜스는 그런 그의 행동에도 고개를 갸웃였다.
전 이 화단을 돌보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한마디에 주변은 조용해졌다만 그것은 덜스의 말에 이해를 한다는 무언의 긍정이었던 것이었다. 워낙에 식물들에게는 애정을 다하는 그였기에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않겠다는 것을 표한것을 알아챈 것 이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덜스를 설득하지 못한 그들은 제 부모들까지 대리고 단체 여행을 떠났고 (후일담이다만,이 중엔 덜스의 보호자역인 주피터 역시 있었다. 물론 덜스에게 이 사실은 더 없이 기쁜 소식이지만 말이다.), 덜스 혼자 유유히 저들의 집에 남게 되었건 것이었다. 여행을 떠난 직 후의 이틀동안은 덜스에겐 꿀 같은 휴식기였다. 그 누가 저를 괴롭히지 않고, 놀리지도 않고. 휴식과 티타임을 즐겼으니 더 할말이 있겠는가.
허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인간은 정이 고픈 동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곁 사람을 그리워 하듯, 덜스 역시 제 동료들이 없는 사실이 서럽고, 쓸쓸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긍정적인 생각을 좀 먹어갔다. 적적해진 마음은 조금씩 쓸쓸해져만 간다. 버림받은 연인마냥 이 길고 긴 시간이 지나, 얼른 제 사람들이 돌아오기만을. 그리 빌고, 빌고, 또 빌며 시간이 지나가길 바랬다.
후일담이다만, 이 이후 잠에 뒤척이다 새벽바람에 일어났을때, 그때가 오늘 아침처럼 또다른 사람이 자고 있었고.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간신히 다잡으며 누구냐고 물었을 때 제 허연 솜바닥 위로 '난 덜스입니다' 라며. 삐뚤빼뚤 쓴 글씨를 저에게 보여준 그와의 첫 만남을 가졌던것은 비밀이랄까.

그와의 만남이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진 현실로 생각을 돌린 덜스의 입가엔 웃음이 매달렸다. 신이라는 사내가 저에게 주는 선물이려나. 크리스마스 선물? 그렇다면 너무 이른거 아닌가, 아직 이틀은 더 남았는데. 괜스레 자신을 저에게 보낸 누군가를 향한 장난어린 비판을 보내면서도 그의 얼굴의 미소는 사라지지않았다.
의자 끝자락에 갈터앉은채 제 특유의 긴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자신만의 리듬을 흥얼거리던 덜스는 문득 제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긴 머리카락 끝 매무리에 맽힌 물방울은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하고있었으나, 사내는 그저 제 손위에 쥐어진 수건만을 물끄러이 바라볼 뿐이었다. 또 바닥청소 해야하는겁니까.. 라고 중얼거리면서 제 자리에 조심히 일어나 행주를 손에 쥔채 그에게로 다가가는 덜스의 표정은 꽤나 평온했다.
"어떻게 남자가 머리말릴 줄도 모르십니까? 대체 그동안의 생활은 어떻게 하신건가요…."
둥그러이 모여든 물 웅덩이 위로 행주를 던져두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수건을 빼내곤 제 발꿈치를 들며 마르지않은 물기를 털어주며 투덜이는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투정어린 덜스의 말에 긍정의 뜻을 표하였다.
"앞으로는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그런 의미로 바닥은 알아서 닦으세요."
할수 있으시죠? 다정한 목소리로, 사내의 머리에서 눈동자로 시선을 내린 덜스는 빙그르르, 웃음 지었다. 숲을 머금은 제 눈동자에 덜스를 담아낸 또다른 덜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덜스는 제 앞 사람의 머리 위로 수건을 걸어두곤 부엌으로 다시끔 걸음을 옮겼다. 얼른 닦고 오세요, 밥 다 차려놨거든요. 홀연히 제 자리로 걸어나가는 덜스를 바라보던 그는. 바닥에서 물기 먹은 행주를 화장실 안으로 휙 내던져버리곤 그의 뒤를 따랐다.
"잘 먹겠습니다~"
해맑게 웃은 후 오물거리는 입. 어린 아이를 보는 듯한 모습은 여간 어린아이 같았다. 후에 수저에 그릇이 부딛히는 소리,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계소리 따위가 섞여 귀를 후벼팠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변공기는 포근하였다.
"…안드십니까?"
저를 물끄러이 바라보는 덜스에 고개를 저어내버리곤 다시끔 하얀 손가락을 움직여 무엇인가 많이 합쳐진 반찬을 집어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물컹하게 잡히는 물체에서 느껴지는 맛은 생각보다 좋았다. 우물거리며 입 안에서 움직이다 목 으로 넘어가는 그 식감은 그리 좋지않지만 말이다. "맛이…어떻습니까?" 하고 묻는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먹으면서 표정 위로 감정이 들어나서 그런것일까, 황급히 고개를 저으면서 덜스를 마주하는 그의 얼굴 위론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빙그르르, 하얀 뺨 위로 웃음이 걸렸다. 남자인데도 허연 피부에 선한 눈매의 덜스는 어느 여자 뺨칠 정도로 어엿뻤다. 그랬기에 눈가를 접으며 웃음 짓는 덜스의 모습에 다른 덜스는 저도모르게 시선이 가버렸으나, 고개를 살짝이 숙이곤 먹는것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키는 그였다. 어찌되었든, 그는 남자이기에, 덜스를 보고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낀 적은 없지만 말이다.
* * *
"…피크닉…말입니까?"
제 앞에 내밀어진 메모지를 보며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또다른 덜스에 찻잔 안의 홍차를 홀짝이곤 쩝하고 입맛을 다시는 덜스였다. 지금 날씨는 피크닉을 즐기기엔 차딘 공기가 제 뺨을 후려칠 것일 뿐더러 추운 날은 저에게서 독과도 같은 것. 그렇기에 추운 날 만큼은 제 집에서만 활동을 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피크닉이라. 이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가 나온것은 왠 것일까.
"아, 설마 피크닉…, 한번도 해본 적 없으십니까?"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에 덜스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와 닮으면서 말도 못하고, 행동도 둔하고, '즐긴다' 라는 개념을 모르는 사람. 추억 하나 없는 이 사람은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함으로 저에게 온 것은 무엇일까. 한번 피어난 의구심은 끝없이 머릿속을 좀 먹어갔다. 허나 이내 덜스는 머리를 새차게 흔들었다. 의심하면 뭐하겠나, 이미 저가 그를 거두었는걸.
근심 가득한 한숨을 뱉어낸 덜스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갸웃이며 저를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 위로 둥그런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있다. 먼지하나없는 깨끗한 눈동자는 수상한 사람치고는 티없이 맑고, 깨끗했다. 이런 사람이 수상한 사람이라니, 말도 안돼는 소리다. 덜스는 조심스레 손가락에 걸린 찻잔을 내려놓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준비하도록 하죠. 지금 준비하면 점심즈음에 나갈 수 있을겁니다."

그의 말에 함박웃음을 짓는 또다른 덜스는 총총 걸음으로 제 방으로 향하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덜스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비싯, 웃음을 터뜨렸다. 어른의 탈을 쓴 아이 인겁니까. 라고 키득거리면서 말이다. 한참을 웃어넘기던 그는 식어버린 찻잔을 집어 싱크대에 조심히 내려놓곤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앞치마를 다시끔 허리에 동여맸다.
역시 요리는 참 귀찮은데 말이죠.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제 말에 맞장구 쳐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급한 계획을 준비하느라 덜스의 손은 분주해졌다. 몇번 요리를 해보았다지만, 역시 초보인지라, 투박한 손으로 돌돌 말아가는 김밥은 울퉁불퉁이라서 그리 잘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허나 제 옆에서 저가 주는 김밥 꼬투리를 받아먹는 또다른 저의 표정은 온화했기에 나름 만족했느리라. 낮은 음으로 흥얼거리며 다시끔 요리에 집중하는 그에 또다른 덜스는 그의 옆을 기웃거리며 요리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덜스가 제 옆 사람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더이상 안됍니다. 피크닉 안갈겁니까?" 라며 으름장을 놓기에 또다른 덜스는 조용히 식탁 가까이 있던 의자에 자리잡고 앉았지만 말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두사람은 덜스의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울이지만, 유일하게 봄을 유지하는 곳이었고. 그렇기에 향긋한 꽃내음과 포근한 온기가 주변을 품어주었기에 피크닉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며 덜스가 추천한 것이었다. 확실히 제 얼굴을 품는 따듯한 온기는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하고, 기분이 좋은 것이다. 양 옆으로 펼쳐진 나무들과 꽃들은 향을 내품고, 그 사이로 여러 생명체들이 날아들고, 살아 숨쉬었다. 확실히 봄을 연상케하는 주변 환경에 동그래진 눈망울을 빛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제 앞 사내에 덜스는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도시락 꺼낼까요? 딱 좋은 타이밍인것 같습니다만."
평평한 곳 위로 돗자리를 펼치곤 제 옆의 바구니를 앞으로 끌고 뚜껑을 열어재끼며 묻는 덜스의 말에 또다른 덜스는 새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강한 긍정을 들어내었다. 다시끔 웃음을 터뜨리며 준비한 음식을 꺼냄에 또다른 덜스는 혀를 낼름였다. 영락없는, 간식기다리는 개를 연상케하는 모습에 또다시 터져나오려는 웃음보를 부여잡고 마지막 음식을 꺼냄과 동시에, 제 앞으로 나온 허연 손은. 굶주린 것인지 순식간에 많은 음식을 집어 입으로 털어넣음에 그 모습은 먹이를 먹는 햄스터를 연상케하였다. 입안 가득히 먹을 것을 물고 우물거리는 저를 닮은 사내에 덜스는 턱을 괴며 저도 모르게 지어진 미소로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면볼수록 참 귀여운 사내다.
"저기 말입니다, …덜,스."
문득, 덜스는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니, 어색한 맛이 입 안 가득히 맴돌았다. 저를 부르는 것임을 안 것인지 제 왼쪽 엄지와 검지로 들어올려진 김밥을 든 채로 무어냐고 묻는 듯, 고개를 갸웃이는 그에 덜스는 우물거리던 입을 벙끗였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리곤 쓰게 웃어버림에 또다른 덜스는 고개를 갸웃이곤 다시끔 음식에 온 정신을 퍼부었다. 햄스터 마냥 빵빵해진 볼을 물끄러이 바라본 덜스는 그의 볼을 누르고 싶다는 충동을 이겨내려 돌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이 닿은 곳은 깔끔해진 화단이었으니. 어여쁜 나비들이 모여있는 것은 절로 향긋하단 느낌을 주었다. 그러다 덜스는 제 어깨를 두드리는 손짓에 다시끔 덜스에게 고개를 돌렸고.
"…다 드셨습니까?"
곧 제 앞에 펼쳐진 어이없는 관경에 입을 떡, 벌렸다. 전 아직 안먹었습니다만. 불만어린 불평을 웅얼거림에도 또다른 덜스는 제 눈망울을 덮었다 다시 펼칠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않았다. 그랬기에 그러려니, 하고 덜스는 헛웃음을 밷으며 그저 웃었다. 그에 제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던 또다른 덜스는 음식통의 잔해들로 시선이 가있는 덜스에 그제서야 제 잘못을 알아챈듯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되려 저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덜스에 또다른 덜스는 더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난것인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덜스의 손을 잡았고. 어느샌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는 쪽지를 쥐어주곤 숲 쪽으로 뛰어갔다. 어쩌다보니 혼자 남겨진 덜스는 주변을 돌아보다 주변에 있던 꽃에게 말을 붙였다. 좋은 날씨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식물이기에, 말을 할리는 없었고, 그렇기에 그의 말에 맞장구 쳐주지도 않지만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입고리를 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 꽤나 이쁘시네요. 무례한 말이었나요? 그렇담 죄송합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끔 저 아래에서 저를 행해 올리오는 덜스에 그는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겨주었다. 꽤나 험난하게 온것인지 몸 구석구석 붙어있는 나뭇잎과 흙덩이가 그 증거이니라. 덜스는 저에게 다가온 그의 몸을 손으로 탈탈 털어주었다.
"대체 어딜 같다 이제오시는겁니까? 이 꼴은 대체 뭐고…."
채 말을 이어가기 전에 제 몸을 털어주는 덜스의 손을 잡고, 손바닥 위로 후두둑 쏟아내는 그에 무엇일까 바라보니 붉은색을 띄운, 앵두를 닮은 작은 과일이었다. 그것도 한가득이나. 어디서 난것이냐 물었더니 숲 구석에 있던 나무에서 따온것이랜다. 저도 모르는 과일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이며 생각해보니 과일 나무들 사이에 작게 생긴 어느 나무가 떠오름에 덜스는 작게 아. 하고 탄성을 뱉곤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제가 못먹었다고 챙겨온 것입니까? 전 괜찮은데…."
그리 말하면서도 덜스의 입고리가 위로 올라감에 그는 괜스레 뿌듯한 빛을 띄우며 제 손가락으로 코 끝을 문질렀다. 그걸 물끄러이 바라본 덜스는 조심스레 열매하나를 집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제 입안에서 퍼지는 새콤한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저에게 어떠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또다른 덜스에 그는 제 혓바닥을 내밀었다.
"셔요. 그래도 맛있습니다."
시무룩해져있다가 금방 방긋 웃는 그의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이 여간 어린 소년을 보는 듯한 것이어서, 저도모르게 볼을 꼬집을 뻔한 출동을 흔들어버린 후에 열매를 음미하였다. 확실히 신 맛이 있긴하지만 끝 맛은 달콤하기에 꽤나 맛있었다. 계속해서 먹다보니 더 그런것 같고. 제 혓바닥으로 씨앗을 골라내어 뱉어내는 것도 꽤나 익숙해졌는지 한결 편해진 모양새다. 그러다 문득 제 얼굴을 비쳐오는 노을빛에 덜스는 빨리 지나난 시간에 조금 놀라며. 제 손을 움직여 몇개 남은 과일을 후드주머니에 탈탈 털어넣곤, 어느새 다가온 토끼와 놀고있던 또다른 덜스를 타이르며, 덜스는 돗자리를 접고 음식통들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몸을 움직이며 왠지 모르게 속이 좋지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배고파서 그런거라,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머릿속을 흔들며, 그리 결단내곤 덜스의 손을 잡고 정원을 나섰다.
* * *
눈이 내리는 바깥은 추웠지만, 덜스는 불구덩이에 나뒹구는 기분이었다. 후끈거리는 머릿속과 쓰린 위액이 휘몰아치는 뱃 속에 덜스는 몸을 웅크리곤 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열매를 먹은 직후, 열매가 저와는 맞지않았던 것인지 급체를 해버렸고, 무리하게 강행한 외출에 감기까지 걸려버린 것이다. 게다가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때뭄에 머릿속은 더 어지러웠다. 물론 바깥의 사내는 그걸 노린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덜스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와는 달리 많은 눈들이 소복히 내리고 있었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건가요…."
하얗게 서리가 낀 창가를 바라보던 덜스는 손을 올려 창가 위로 올렸다. 찬 기운이 손바락으로 스며들었고 그걸 볼에 가져가자 화끈거리는 느낌이 사그라들었다.
허나 금새 더워지는 얼굴에 그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다 벌컥하고 열리는 소리에 다시끔 고개를 돌렸다. 큰 쟁판 위에 얼음이 담긴 주머니와 죽을 담아온 또다른 덜스에 어안이 벙벙한 듯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제 이마위로 느껴지는 찬기운에 절로 몸을 움칠하였고. 그것에 저가 놀라면서도, 투박한 손으로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또다른 덜스였다.
"괜찮습니다."
제 이마를 닦아주는 또다른 덜스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는데도. 또다른 덜스는 조심스레 제 손을 잡은 그의 손을 이불 위로 올려놔주곤 저가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받는 입장이 되어버린 덜스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만, 그저 저가 쌓아온 덕이라. 그리 생각해버리곤 조심스레 눈을 덮었다.
제 얼굴을 만지는 손이 닿는 부분은 여간 시원하였다. 얼음장 마냥 차갑지만, 나름 기분 좋은 온도였다.
오늘은 꽤 춥네요. 안그래요? 조용해진 주변 속, 조심스레 제 입을 트는 덜스에 또다른 덜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의 말을 이어주는 사람은 없지만서도 공기는 더 없이 포근했다.
바깥서 내리는 눈은 하렴없이 보송거리며 내렸다. 찬 기운이 뿜어지는 제 창문깨 곁에 있던 옷자락은 시원하였으나, 따슨 온도에 금새 제 온도를 뺏기었 더랜다. 후끈후끈 열기가 올라옴에 붉은기가 도는 제 얼굴을 매만지던 덜스는. 문득 제 앞으로 내밀어진 죽에 무어냐며 물었고, 후에 제 손가락으로 쪽지를 톡톡 두들이는 또다른 덜스에 젓가락 밑에 깔린 쪽지를 제 손가락으로 집어올렸다. 쪽지에는 「뜨거워요. 식혀서 드시길.」라 적혀있었으며. 저가 쪽지를 읽는 사이에 방문을 나서는 또다른 덜스에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에게로서 지금 상황은 꽤나 당황스러웠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랬기에 호의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기에. 그랬기에 어벙한 표정으로 제 친구가 열고 닫았던 문을 바라만 볼뿐이었다. 허나 그것도 그뿐, 금새 배시시 입꼬리를 올리며 기뻐하는 눈치를 띄우곤 따듯하다못해 뜨거운 죽을 제 입속으로 넣었다. 황급히 집어넣은 음식에 입천장을 살딱 데이긴 하였다만, 입 안 가득히 풍겨오는 다정한 온기에 입꼬리는 저 얼굴 끝까지 닿고있었다. 맛있다. 요리 잘하시네요, 덜스.
* * *
겨울은 금새 어두워져간다. 어둑히 검은 물감을 마신 하늘은 밝은 돌맹이를 그득하게 담아 올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연신 깜빡거리는 전등빛이 방 안으로 스물스물 드리우자 제 얼굴을 찡그리곤 몸을 뒤척이는 덜스에 또다른 덜스는 조심히 커튼을 쳐주었다. 아침때보다 한결 편해보이는 표정의 덜스를 바라보던 또다른 덜스는 덥수룩해진 앞머리를 제 기다란 손가락으로 조심히 거두어주었다. 짧은 시간이었다만은, 그 이상만큼 덜스를 잘 알수있었다. 동갑에게도 사용하는 존댓말. 요리는 그닥. 식물을 아끼며, 보기보다 강인하면서, 여린 사람. 또다른 덜스가 알아챈 사실은 이정도였지만, 짦은 시간내에 알아낸 것 치고는 꽤나 많은 양인것은 사실이다. 물론, 덜스. 그는 단순해서 금방 알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또다른 덜스는 흘끔, 제 옆의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간 편안한 표정위로 달린 어여삐 휜 눈매와 입꼬리. 참, 보면 볼수록 예쁘장한 얼굴이다. 또다른 덜스는 덜스의 등을 토닥였다. 단 한번도, 그 누구와 스킨쉽을 가진적이 없던 그였기에 그 모습은 여간 어정쩡한 포즈였다만, 더없이 다정함이 담긴 손길이었다. 그걸 아는 것인지, 잠에 젖은 덜스의 표정은 방금 전 보다 여간 편안해 보였고. 또다른 덜스 역시 더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째깍. 째깍.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12시를 지나감에 맞추어 눈은 더없이 많이 내렸다. 그걸 바라보는 또다른 덜스의 눈동자 안에 드리워져있는 숲으로도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처음으로 꺼낸 목소리는 매마른 땅 마냥 쩍쩍 갈라졌다. 얼굴을 찡그리곤 제 목을 손으로 조심히 누르던 또다른 덜스는 조용히 창문깨서 덜스로 시선을 돌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덜스가 깨지않게, 작게 귓가에 중얼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방문을 나섰다. 덜컥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또다른 덜스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덜스의 방문에 들어온 하얀 달빛만이 이별의 밤임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