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소녀는 죽어 버렸습니다. 항상 조용하지만 아름다웠던 물빛의 눈을 반짝이던 소녀는, 죽어 버렸습니다. 그 반짝임을 질투하던 한 존재에 의해 스러져 버렸어요.
처음에는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죠. 소녀의 곁에는 거의 언제나 붉은 아가씨가 있었고, 알게 모르게 수성의 여인의 보호도 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녀의 곁에는 나, 목요일 역시 항상 같이 있었어요.
그녀가 죽은 뒤로 우리의 일주일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어요. 가운데 자리 잡았던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의 죽음은 우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죠. 모두 그 소행성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어요. 머큐리 님마저 다시는 그녀를 만들 수 없도록 잔인한 저주를 남긴 그 소행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가장 잔인하고, 더없이 이기적으로 우리를 조롱하고 죽어 버렸어요. 정말 나빴죠···. 정말···.
우리는 장례식? 장례식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어쨌든 보내 줄 수조차 없었어요. 그녀는 우리가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곳에 가 버렸고, 사람들은 하루 한 시라도 우리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일주일에서 지웠어요. 하루가 지워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슬프게도 그녀를 지웠어요. 일주일 만의 기억에서 살아가도록, 지구 상에 아무도 기억할 수 없도록.
“여어- 덜스. 오늘은 좀 어떠냐.”
“항상 그랬듯이, 오늘도 해야죠.”
“그럴 줄 알았다. 오늘은 세럴 씨도 간대. 준비 빡세게 해라.”
요즘 우리는 수성에 매주 가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떠나간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서. 수요일이 사라져 버린 이상 아쉽지만 나의 날인 목요일에 그녀를 찾아가고 있어요. 오늘도 머큐리 님은 울고 계실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녀와 친밀했다고는 해도, 어머니셨던 머큐리 님의 슬픔을 저희가 어찌 짐작할까요.
“세럴~. 빨리 안 나오면 우리만 갑니다~?!”
“세럴 씨?! 제가 들어가기를 바라는 거죠?! 그러면 사양 않고···!”
“시끄럽습니다. 프라이. 제가 한 번 들어가 보죠.”
이런, 세럴이 오늘 늦네요. 약속을 잊어버린 걸까요? 세럴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제가 한 번 들어가 봐야 겠네요. 토성은 언제 봐도 참 신비롭습니다. 이 신비로움을 그녀도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세럴? 여기 있습니까?”
“아, 새턴 님! 제발 이것 좀 놔 주세요!”
음,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럼 세럴은 두고 우리끼리 가야 할까요. 그래도 미안하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불러보죠.
“세럴~ 안 나올 겁니까?”
“새턴 님! 먹은 도넛은 새턴 님 능력으로 되돌리던지 하라고요! 왜 자꾸 제게···!”
되돌린다라··· 아닐 겁니다. 아닐 거라고요. 일단은 세럴을 데리고 나오는 게 급선무입니다. 무례한 것은 알지만 방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새턴 님은 세럴을 끌어안고 도넛 박스를 들이밀고 있었어요. 돈도 안 주는 거 다 아는데.
“세럴! 늦었습니다! 프라이가 기다리고 있다고요!”
제가 들어온 것을 본 세럴의 얼굴이 잠깐 환해졌다 이내 어두워졌습니다. 아니, 프라이가 그렇게 싫은 걸까요? 하긴, 저라도 싫을 만은 합니다.
“얼른 나오세요.”
“덜스?★ 올 때 도넛 좀 부탁할게!★"
“본인이 되돌려서 먹으라니까···”
“대가 치루기 싫다니까~★"
우는 소리를 내는 새턴 님을 내버려 두고 우리는 토성의 밖으로 나왔습니다. 프라이가 기다리고 있네요. 좀 많이 기다렸나 봅니다. 얼굴에 바람이 빵빵한 게 조금 귀엽군요. 아니, 귀엽다는 말 취소. 세럴한테 바로 달려드는 저게 귀엽다니, 제가 잠시 머리가 돌았나 봅니다.
“둘 다 그만하고 얼른 갑시다! 늦었다고요!”
“아, 그렇지. 사금치, 얼른 안내해!”
“사금치 아닙니다!
능글거리는 프라이를 뒤로 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나를 닮은 푸른 빛이 새어나오고 그 사이로 수성이 보였습니다.
“얼른 들어갑시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 * *
수성은 커다란 기둥부터 자그마한 물품 하나까지 전부 하얗고 푸른 빛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해파리들. 오늘따라 유난히 그 움직임이 슬퍼 보입니다. 머큐리 님은 어디 계실까요. 정신없는 수성을 돌아다니다 보니 작고 여린 그림자 하나가 보였습니다. 아마도 머큐리 님일 겁니다. 푸르고 옅은 그 그림자는 들썩이며 울고 있었습니다. 감히 내가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몰라 그저 가져간 흰 꽃다발을 수성에 올려놓고 나왔습니다.
“사금치, 겨우 이거 하나 두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시끄럽습니다.”
“아니~. 꽃 하나는 어디서든 얻을 수 있잖아. 머큐리 님도 만드실 수 있을걸?”
이 꽃은 달라요. 다릅니다. 웬즈가 직접 물을 주고, 직접 키워 왔던 예쁜 꽃입니다. 땅에서 떨어져도 시들지 않게, 오래도록 그 푸르고 흰 빛을 자랑할 수 있게 제가 마술을 걸고, 머큐리 님께서 축복을 건 아주 슬픈 꽃이란 말입니다. 화원에 단 하나뿐이었던, 가장 소중한 꽃입니다.
“소중한 꽃입니다. 웬즈. 아니, 그녀가 직접 기르고 사랑을 주었던 마지막 꽃이에요.”
언제서부턴가 주일들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녀와 끔찍하게 친했던 불의 아가씨나, 수성의 어머니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에요. 그 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들은 프라이가 조용하네요. 나름대로 반성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자, 그럼 돌아갑시다. 저는 지구로 갈 생각인데, 둘은 어떻게 하시려나요?”
“아, 나는 금성으로. 비너스 님께 가져다 드릴 게 있어서 말이야.”
“그렇군요. 그럼 세럴, 세럴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 나도 지구. 도넛 사가야 해.”
쉬는 날까지도 도넛 셔틀이라니. 가끔은 똥진흙보다 새턴 님이 더 악랄하신 것 같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이요.
“그럼, 세럴. 갑시다. 프라이는 따로 가야겠네요?”
“사금치! 나 없는 동안에 세럴 씨한테 집적거리면 죽는다!”
“네~ 네. 제가 당신입니까?”
“시끄럽고 빨랑 꺼져.”
세럴이 말을 끝내자마자 프라이는 황금색 문 뒤로 스르륵 사라졌습니다. 슬슬 갈 준비를 하며 소지품들을 챙겼습니다.
‘새턴 님! 먹은 도넛은 새턴 님 능력으로 되돌리던지 하라고요! 왜 자꾸 제게···!’
아까 들은 그 말,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넌지시 지나가는 말로 세럴을 떠 보았습니다.
“세럴, 근데 아까 한 말 있잖아요.”
“응? 무슨 말?”
“그 왜, 새턴 님께 되돌려서 먹으라고 한 거···.”
“아, 그거? 새턴 님한테는 되돌리는 능력이 있거든.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르지만 말이야. 꽤 강한 걸로 아는데?”
꽤 강하다···. 혹시 그녀를 되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헛된 희망은 잊어버리기로 하죠. 그동안 여러 행성 분들이 그녀를 살리려 노력했습니다. 새턴 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을 리 없어요. 없습니다···.
“세럴, 도넛 가게. 저도 같이 가요.”
“그럴래? 마침 혼자 심심했는데. 나쁘지 않지.”
“대신 프라이에게는 비밀입니다~.”
“엑, 당연하지.”
그럼, 이리로. 가볍게 손을 휘둘러 문을 만들었습니다. 언뜻 봐도 푸른 물과 파릇한 초록색이 섞인 구체가 눈 앞에 보였습니다. 잠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누구보다 잘 아는 곳을 들어가는데도 이 버릇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 * *
오랜만에 온 지구는 언제나같이 푸른 색만은 아니었습니다. 강렬한 붉은 색, 산뜻한 노란 색, 그리고 조금은 우중충한 보라색 등등의 색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는 오랜만에 나오다 보니 조금 무서운 감도 적잖아 있는 것 같네요.
“세럴. 그래서 어딥니까?”
“저기. 저기 가장 화려한 거.”
그가 차분하게 들어올린 손가락 끝에는 한 가게가 서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색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색깔에 커다란 음악이 둥둥 울리는 가게였습니다.
“뭐 해? 들어가자.”
멍하게 서 있는 저를 세럴이 잡아끌었습니다. 거의 반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한 가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 혼자 창밖을 보며 먹는 사람도 있었고, 서로 부끄러워하며 대화하는 여자와 남자도 있었습니다. 음식은 같이 먹어야 할 텐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벌써 우리의 차례가 돌아왔나 봅니다.
“음··· 그러니까 선물용으로 가장 큰 거 하나 주세요. 포장은 그렇게 공들여서 하실 필요 없어요.”
“네~ 네. 저희도 다 알아요. 옆의 분은 뭘로 해드릴까요?‘
익숙하게 세럴이 도넛을 주문하니 여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싹싹하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내게 물어보는 여직원에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 옆 사람이랑 같은 거 하나 주세요!”
망했습니다. 완전히 망했다고요. 저 얼빵한 모습이라니. 첫인상은 물론이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괜찮아, 덜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어.”
가게를 나오고 도넛 상자를 든 채로 침울한 제게 세럴이 말을 건넸습니다. 아무리 바보같지 않았다고는 해도···. 다시 저곳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난 그럼 토성으로 가 볼게. 너는 여기 있을 거지?”
“아닙니다! 기다려 주세요! 같이 가요!”
“뭐야, 평소와는 다르게. 그럼 문이나 열어.”
“네~.”
혼자 가려는 세럴을 급하게 붙잡고 문을 열었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나만의 문이라, 왠지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딱 그녀가 좋아했던 나의 문입니다···. 푸른 그녀가 좋아했던 문이라 차마 나쁘게 생각할 수가 없네요. 이런, 잡생각 그만하고, 토성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대만의 광대가 되어
* * *
“새턴 님~? 계세요?”
세럴과 같이 도착한 토성은 아까와 같은 푸른 고리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저 빛, 언제나 생각하지만 푸른 그녀를 담은 것만 같습니다.
“아, 여기 계시네. 덜스, 여기야.”
세럴이 나를 부르는 곳 앞에는 열심히 텔레비전 체조를 따라하고 있는 새턴 님이 계셨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흥겨운 소리와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나왔고, 새턴 님은 그걸 보고 또 보며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새턴 님~. 도넛 사왔어요.”
“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덜스도 왔어?★"
"하하. 어쩌다 보니 오게 됐네요."
저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습니다.
“아, 그럼 전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막막한 정적을 깬 것은 의외로 세럴이었습니다. ‘아직 다 못 읽은 책이 있어서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안경테를 위로 살짝 올리며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는 곧바로 문을 열었습니다.
“덜스, 안 가?”
“호의는 감사하지만, 아직 볼일이 조금 남아 있어서 말이죠. 하하.”
“그래? 알았어.”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세럴은 문 뒤의 지구로 돌아갔습니다. 잠시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새턴 님은 제 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웃으셨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용건이라뇨. 그냥 토성에 조금 있어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되뇌이고 말았습니다. 왜 거짓말이 나왔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남은 한 조각 본능이 아마 나를 움직인 거겠지요.
“그래?★ 그럼 네 뒤에 도넛은 뭐야?★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 아냐?★”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행성주는 행성주. 한 별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이 답게 새턴 님은 예리하셨습니다. 저는 결국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의도치 않게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기기도 어려울 것 같네요,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능력’이란 게 무엇입니까?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그거?★ 그건 일단 도넛부터 먹고★”
제가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빠르게 새턴 님은 머리카락으로 도넛을 상자째 가져가셨습니다. 곧바로 뚜껑을 열어 하나를 집어 드신 새턴 님은 열심히 입을 오물대며 말을 시작하셨습니다.
“네가 들은 그대로야★ 말 그대로, 시간을 열어 차원을 되돌리는 힘★”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어보니 그 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굉장하고 위대한 힘이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저는 다시 되물었습니다.
“시간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가 아는 그 시간★”
확답을 듣고 나니 더욱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힘을 가졌으면서, 왜···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스러지는 것을 보고만 있으셨던 건가요. 머큐리 님이 눈물을 보이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 보아 놓고는, 모두가 슬퍼하는 것을 누구보다 자세히 보아 놓고는··· 제 감정이 얼굴로 그대로 드러난 모양입니다.
“워, 워★ 너 지금, 웬즈 생각하고 있었지?”
“···!”
“웬즈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있지만, 그 대가가 너무 막중했어★”
대가라니, 감히 그녀를 살리는 데 대가라는 말을 쓰다니. 신이 원망스러워졌습니다. 만약 제게 그런 힘을 주셨다면, 제 손 안에 그런 힘이 있었다면···.
“얼굴 보니 대가가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새턴 님의 얼굴이 구겨졌습니다. 드시던 도넛까지도 한쪽에 내팽겨치신 새턴 님이 제게로 천천히 다가와 눈을 마주하였습니다.
“각오는 제대로 되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놀라 굳어버린 저를 두고 새턴 님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여유롭게 날아 다니셨습니다. 마치 방금 모습은 모두 거짓인 것처럼. 제가 잘못 허상을 본 것만 같아,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할 지경이어 잠시 오한이 들었습니다.
“그, 대홀즈 영감탱이보다 위인 할아범 알지?★”
“우주의··· 그 분 말입니까···?”
“그래★ 그 할아범이 정한 규칙이야★ 시간을 건너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지금 일주일 모두 몇 명이야?★”
“일··· 아니, 여섯··· 여섯 명입니다.”
“그 때로 돌아가 그 아이를 다시 구한다면?★”
“일곱 명···. 다시 일곱 명이 되겠지요···.”
“그래★ 그게 문제야★ 그런 거,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너무 어려워 이해를 제대로 못한 제게 새턴 님은 다시 얼굴을 들이미셨습니다.
“아직 이해를 못한 거 같은데★ 다시 말해줄게★ 간단하게 말해서, 너네 중 한 명이 사라져야 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장난인 줄, 사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얘기였기 때문에.
“일주일은 여섯 명. 그런데 웬즈가 살아난다면 다시 일곱 명. 할아범이 정한 규칙은 여섯 명. 어떡하려고?★”
새턴 님은 갑자기 무서운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오셨다. 민트 눈이 가로로 반짝 빛났고, 그 안에 담긴 동공이 무섭게 빛났다.
“주제 제대로 파악해★ 그 아이 때문에 세럴이 위험해진다면··· 가만있지는 않을거야★”
역시 그랬습니다. 아마도 이곳에 그녀의 편은 없겠지요. 하다못해 머큐리 님이라도 우리들 중 누군가가 사라지게 된다면 이를 반대하실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는 차마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럼··· 한 명만 사라진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어떡할 생각인데?★”
마음속으로 잠시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지요. 비단 주피터 님 말고도. 먼, 투스, 프라이, 세럴, 선 등등···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들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전 그녀를 좋아했나 봅니다.
“제가 사라지면 되겠네요.”
새턴 님은 잠시 멍하셨다가 이내 저를 보고 손가락으로 귀 옆을 두어 번 헤집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미쳤냐는 뜻인 것을 여실히 잘 알고 있지만 왠지 모른 척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반응이 없자 새턴 님은 이윽고 입을 여셨습니다.
“미친 거야?★”
미쳤다. 어떻게 보면 미쳤다고도 볼 수 있겠죠. 아니, 미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진다니.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결정이겠죠.
“괜찮아요.”
그럼에도 어째서일까요?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린 이유는.
“하아···★ 하루만 더 생각해보지 그래?★ 나도 주피터 보기 껄끄럽단 말이야★”
“아니요. 생각하기 싫어요.”
어느덧 눈물이 차올랐다. 생각하기 싫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습니다. 가장 작은 아이. 가장 작았던 물빛의 소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쎄. 아마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보라 한다면 당신은 말할 수 있을까요? 하여튼, 제 안에서의 호기심이었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커버려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나는 뭔가 자신이 없었나 봅니다. 요일 중 가장 아름다웠던 그 아이 대신 내가 사라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랬나 봅니다. 지금까지 계속 받아온 기대와 응원에 무색하게도,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정도로 그녀를 좋아했나 봅니다.
“도와주세요. 제가 그녀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준비는 다 된거야?★”
“아마도 그렇겠죠?”
저는 쓰게 웃었습니다. 지금껏 만나온 모든 사람들의 무게보다 그녀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좋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서웠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그녀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또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원망해도 모르는 거야★ 주피터한테 혼나겠네★”
아마도 새턴 님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다시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요.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죠.
“준비는 다 됐어?★ 또 뭐 챙길 것 있나?★”
챙길 것. 하나 떠올랐습니다.
“챙길 게 남았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맘대로 하라고★”
저는 그 길로 문을 열어 수성으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습니다. 챙기고 싶은 것. 챙겨야 하는 것.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그녀에게 꼭 전해 주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찾았다···.“
제가 찾은 것은 하얀 꽃다발. 누구보다 하얗고 푸른 빛이었던 그녀에게 어울렸던 최상의 꽃다발이었습니다. 머큐리 님의 은총으로 영생을 살게 된 아름다운 꽃. 과거의 그녀에게 꼭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여기··· 찾아왔습니다.“
“고작 그거야?★”
“그러게요. 챙길 게 이것밖에 없나 봅니다. 전해주고 싶은 물건이라서요.”
“그거야 네 자유지★ 그럼 이제 문 연다?★”
“네. 부탁드립니다.”
새턴 님은 머리의 고리를 빼 공중에 던지셨습니다. 공중에 던져진 고리는 푸른 빛을 내며 투명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반짝거리는 가루들은 마치 이전에 시간을 건넜다 사라진 이들의 영혼 같았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한 다섯 달 전일 겁니다. 아니, 맞아요.”
"그러면, 다섯 달 전으로 가면 되는 거지?★"
"아니요. 여섯 달 전으로 가 주세요."
"그거야 뭐★ 못 해줄 것도 없지★ 근데 그러면 겨울인데, 괜찮아?★"
"네. 겨울로 보내주십시오."
겨울의 그녀를 다시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습니다. 흰 눈과 잘 어울렸던 나의 그녀. 그 겨울의 웬즈를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습니다.
“아, 됐다★ 이제 들어가면 돼★”
잠시 심호흡을 하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일렁이는 별가루들 사이로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해맑게 투스와 놀고 있는 그녀를 보니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차올라 무작정 눈물부터져나왔습니다.
“왜 울어?★ 이제 곧 만날 텐데★”
그래요. 이제 만나러 가지. 만나러 갑니다. 부푼 마음을 가지고 저는 망설임 없이 고리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 * *
“여기는 어딘가요?”
제가 여기에 처음 오고 뱉은 말입니다. 주위는 온통 흰 빛깔이었고, 그대는 넘어져 있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두 갈래로 정갈하게 땋은 검은 머리칼은 살랑거렸고, 언제나 쓰고 있는 푸른 모자는 눈에 젖어 더욱 푸른 빛을 뽐냈습니다. 단아하고도 아름다운 그 모습에 나는 또 눈물을 흘려버렸습니다.
“왜··· 왜 울어요?”
당황한 그녀는 유리처럼 맑은 눈을 흐릿하게 빛내며 저를 더욱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순수해 보여서, 너무나 아름다워서, 미안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했고, 끝끝내 잊게 된 내가 너무 싫었습니다.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라. 괜찮다라. 당신은 항상 너무 착했습니다. 너무 착해서. 그렇게 되어버릴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당신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련하게 꺾여버릴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으면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걱정한 당신이었습니다.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웬즈!"
"나는··· 나는 괜찮아···. 그러니 다른 사람부터···."
그 때 그 말을 믿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는 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뇨, 괜찮지 않아요."
"네···?"
"믿기지는 않겠지만, 저는 미래에서 온 덜스입니다."
드디어 말했다. 떨리는 맘으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하고 있다. 나는 덜스입니다. 당신만을 위한 목요일. 사라져 버릴 목요일. 전날을 사랑해 버린 목요일입니다.
"덜스···?"
"네. 덜스입니다."
제 그녀는 울던 얼굴을 멈추고 저를 찬찬히 살펴 보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덜스와 같은 큰 키. 온통 초록색으로 덮여 있는 몸. 그리고 심장의 옆에 달려 있는 녹색 T 펜던트. 누가 봐도 그것들은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미래에서 온, 덜스입니다.”
“미··· 래···?”
그녀는 더더욱 저를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저를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밖에 할 수 없다. 찢기고 밟혀 억제되어 온 본능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지금밖에 말 할 수 없어.
“웬즈.”
정말 이기적이고, 정말 나만을 생각한 고백입니다. 아주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고백입니다. 아니, 저것을 감히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나, 아주 오래 참았습니다. 그런 마음인지도 모르고, 인정하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습니다. 미안해요, 웬즈. 이번 한 번만 제 뜻에 따라주십시오. 마지막인 만큼. 나의 공주님.
“웬즈.”
한 번 더 불린 자신의 이름에 웬즈는 뺨이 붉어졌습니다. 저는 반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눈에 젖은 상의가 서로 비벼대며 맑은 소리를 내었고, 그녀의 고개는 점점 올라가 어느새 그녀가 나의 눈을 살짝 내려다 보았을 때, 나는 멈추었습니다.
“좋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뱉은 한 마디. 나지막한 그 말. 하지 못했던 말. 당신의 마지막 미소를 보고 싶었던 한 광대의 고백.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그녀는 어느새 울고 있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 큰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물빛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고, 그 눈물은 이내 풀빛 눈에 부딫혀 맑은 결정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눈물은 떨어지자마자 얼어붙었고, 나는 고백하고 녹아버려야 했습니다.
“좋아합니다. 웬즈.”
말을 하는데 눈물이 흘러내리는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요. 나, 이제야 하고 싶었던 말을 했는데.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말을 해주었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대로 당신의 손을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증표를 가지고, 내가 사라지더라도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나의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가져갔던 꽃다발을 내밀었습니다. 꽃다발에서 풍기는 익숙한 향기에 그녀는 잠시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머큐리 님....”
“맞습니다. 머큐리 님이 키우신, 아니, 만들어 주신 꽃다발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니 차마 당신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뒷말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듯한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내 얼굴에는 씁슬한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나, 덜스를 좋아해. 하지만··· 네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어.”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저 따위를 좋아해 줄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이 시대의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을 테고, 그 사이에 끼어든 나는 그저 어릿광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괜찮습니다. 생각하고 있었던 결말입니다. 광대는 여기서 물러나···.”
“하지만···.”
체념한 나의 말을 막은 사람은 놀랍게도 공주님이었습니다. 공주님. 무슨 연유이실까요.
“고마워.”
공주는 아름다운 얼굴을 눈물로 더럽히며 쓰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마저 미친듯이 아름다워, 아름다웠습니다.
아, 어째서일까요.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곧 사라져야 하는데. 생에 욕심이 나기 시작해 버렸습니다.
“고마워. 고맙고··· 또 고마워.”
공주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찡그리는 얼굴에서 한 번, 가슴을 부여잡은 손에서 한 번, 떨어지는 눈물에서 세 번. 내 가슴은 그렇게 아파왔습니다.
“공주님.”
나는 그 자세에서 그대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습니다. 감히 광대 따위가, 고귀한 공주님을 쓰다듬었습니다. 마지막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합리화하며 마무리 지은 나의 욕심입니다.
“울지 마세요.”
내가 목숨을 바쳐 지킬 아름다운 미소인데, 입가에서 지우지 말아 주세요. 사랑하는 공주님. 광대는 이곳에서 사라지겠습니다.
“웬즈! 어디 있는 겁니까!”
왕자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진짜 이 세계의 목요일. 나를 대신해 그녀를 지켜줄 아주 고마운 사람. 광대는 사라지기 전 왕자님께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왕자님은 공주님을 보호했습니다. 팔 뒤로 그녀를 보호한 모습이 굳세 보였고, 안정적이어 안심이 들었습니다. 아, 몸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는 소문이 영 헛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지 마. 덜스.”
“웬즈?! 하지만···!”
“고마운··· 아주··· 아주 고마운 사람이야.”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공주님. 광대에게 이름이 생겼습니다. 고마운 사람. 듣고 들어도 좋은 이름이네요. 감사합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한 마디만 해도 괜찮을까요?”
사라지기 전에 그녀를 부탁해야 합니다.
“여섯 달 후에, 그녀는 죽을 거예요. 그걸 막기 위해 내가 이곳에 왔어요. 절대로... 절대로 괜찮다는 말을 믿지 말고, 소행성을 경계해 주세요. 그러면, 그녀는 살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머지는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제가 할 말은 이게 다입니다. 괜찮다면, 잠시 웬즈에게 말을 해도 될까요?”
멍하니 서 있는 과거의 나 대신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허락을 대신하였습니다.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몸은 점점 더 흐려져 이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흩어져 버릴 것임을 선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웬즈.”
“응.”
“사랑합니다. 사랑했습니다. 살아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같은 입장이었지만 나는 웃었고, 당신은 울었습니다.
“좋아해, 덜스.”
공주님, 아니, 웬즈는 울고 있었지만 웃었습니다. 마지막을 웃는 모습으로 보내주는 그녀의 배려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주님. 광대는 이제 퇴장할 시간. 감사했습니다. 사명을 다한 그대만의 광대는, 이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