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우쉽 글, 그림 페어합작
※ 본편의 열린 결말을 반 쯤 닫아주는 엔딩이 존재합니다. 단, 지금까지 읽으신 앞의 모든 내용과 이해를 통째로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니 이 글을 주피터와 새턴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정도로 남기고 싶은 분들은 히든 엔딩을 읽지 않으시길 권장합니다.
※ 본편의 해석이 있습니다. 글에 장난질 많이 쳐서 죄송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하시면 보시면 될 듯 합니다. 해석은 히든 엔딩을 읽지 않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이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합작 주제에 더럽게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세상에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가득하다.” -Hellen Keller- 인용 및 변형
*** “인간은 모든 복수, 공격, 보복에 대한 저항으로 인간적 모순을 통해 진화한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사랑이다.” -Martin Luther King, Jr- 인용 및 변형

“주피터.”
새턴이 해사하게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에서 막 깬 눈은 그 모습을 정확히 담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눈동자의 하늘색만 볼 수 있을 뿐, 그 주변을 둘러싼 색을 구별할 수 없었다. 주피터는 붉은 눈동자를 구겼다. 새턴? 그 물음에 새턴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주피터.
“네가 어떻게.”
“설명하라고 해도…… 나는 말할 수 없는 걸. 저번에도 말했었잖아. 그거 내 몸을 어떻게 움직이냐는 질문이랑 같은 거라니까.”
조곤조곤 말소리를 따라 새근거리는 새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과 달리 새턴은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있다. 살아서, 자신을 바라보며 움직이고 이야기 한다. 오랜만의 감각이 전하는 그 사실 하나가 벅찼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며 등 뒤에 흘렀던 식은땀이 어쩐지 그의 직감을 자꾸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사령 두 마리를 빼냈으니까, 저번처럼 이제 악령 하나만 남아 있을 거야.”
“그만큼 됐었어?”
“너는 그 이후로 깨어난 적이 없었고.”
“많이 잠들어 있었나 보네.”
“이제 와서, 아니 오히려 왜 이제야, 어떻게 깨어나는지, ─솔직히 나는 이해가 안 간다.”
주피터의 붉은 눈이 새턴을 바로 보았다. 새턴은 주피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지럽다. 주피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 위에 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아내야 하는데 머리는 회로를 차단시킨 듯 했다. 새턴의 눈썹 끝이 아래를 향했다.
“글쎄,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항상 앞으로 나오려고 노력했거든.”
“…….”
“항상 커다란 거 세 개가 나를 막았었어. 그랬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널 본 이후로 하나로 줄었었고.”
“…….”
“그래서 조금 쉽게 나올 수 있었는데, 그게 악령 하나만 남은 거였네.”
“……하나만 남아서 나올 수 있었다?”
“기쁘지 않아?”
“뭐가 말이냐.”
“어쩌면 내가 죽어야 할 필요 없이 살 수도 있다는 게.”
새턴의 질문에 주피터는 안 그래도 답답하던 머릿속이며 목구멍이 턱 막힌 기분이었다. 기시감의 정체는 이것이었을까. 과연 그는 자신이 가장 원망願望하던 상황을 주저하고 있었다. 새턴이 다시 자신을 바라봐주고 그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오늘 낮만 해도 그가 바라던 것이었음에도 그랬다. 주피터 네 표정을 보면, 내가 악령을 이기고 나온 걸 기뻐한다기 보다는 부정하려 하는 걸. 새턴이 다시 한 번 정곡을 찔렀다. 주피터는 두어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제야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
“─기쁘다. 네가 다시 깨어난 건.”
“그러면 그런 표정 하지 마.”
“다만, 다만 너무 오랜만에 봐서 믿기지가 않는 것 같─,”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던 수갑이 들렸다. 순간이었다. 입술이 닿았다. 익숙하고도 먼 감촉이 그를 덮쳤다. 말을 막아 침묵으로 삼켰다. 따듯한 온기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온기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처럼 퍼졌다. 그 지독하던 악취조차 없어서, 주피터는 정말 빨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곧 주피터는 새턴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고 새턴이 했던 것보다 더욱 깊숙이 그를 파고들었다. 몸이 침대 쪽으로 기울었다. 새턴이 침대 위로 엎어지고, 주피터가 다시 그 위를 점했다. 한참 뒤에야 두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어둠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으나, 새턴의 입술이 그린 호선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다 끝난 셈이야. 이제까지 너 정말 잘 해왔어. 아마 마지막 남은 이것도 빼낼 수 있을 거야.”
“……그래, 꼭 빼내주마.”
“응.”
“…….”
“주피터.”
“어.”
“우리 내일 해가 뜨면, 교회에 가자. 기간 같은 거 이제 필요 없다고. 나 이제 괜찮다고.”
“….”
“같이 기도하고, 같이 지내고,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우리가 이겨냈단 걸 기뻐해줘. 이렇게 깨어났으니까 악령을 쫓아내는 건, 소회를 풀고도 늦지 않아.”
주피터와 수갑으로 연결된 손으로, 새턴이 주피터의 수단 윗 단추부터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툭, 툭, 정성스럽게 채웠던 단추가 풀어질 때마다 주피터는 마치 신의 시선에서 벗어난 영역에 발을 들이는 듯 했다. 서늘했으나 편안했다. 새턴이 깨어나며 몸에 들었던 스산한 감각은 해 뜬 후의 물안개보다도 덧없게 흩어졌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었잖아. 새턴은 웃었다. 웃으며, 주피터를 더욱 가까이 잡아당겼다. 이 어두운 방에서 나가서, 다시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자, 주피터.”
“……새턴.”
“아프지도 말고, 아픈 것도 하지 말자.”
새턴이 주피터에게 입술을 가까이 하며 낮게 속삭였다. 나의 신이여, 경배 받으소서──. 그 어느 날 자신의 또다른 신으로 주피터를 모시고 있었음을 고백했던 입술과 입술이 맞닿자, 새턴은 주피터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가슴께에 두었다. 아직 따뜻한 심장이 뛰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잠겼다. 상처투성이의 손이 급하게 새턴의 옷 아래를 더듬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새턴의 손이 주피터의 등을 껴안았다. 언제나처럼 돌아갈 수 없는 밤이 지나고 있었다.
6.
「과거에 대한 회상은, 모두 망상과 거짓된 기억,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거짓된 명명으로 점철되어 있다. -Adrienne Rich」
8.
성급했다. 마치 처음 서로를 안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린 애가 달려드는 것 마냥 그랬다. 눈에 다 담기에도 벅찼다. 손으로 다 느끼기에도 부족했다. 감각에 의존하는 시간은 그랬다. 채 다 삼키지도 못하는 숨을 내뱉으며 달뜨게 신음했다. 아, 주피터, 읏,! 새턴이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꿈의 경계를 오갔다. 어쩌면 이미 오래 전 사라져 버렸다던, 성경으로만 존재하던 낙원의 경계일까. 주피터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미 어둠 속 새턴의 눈을 마주쳤을 때부터 그의 사고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후였다. 수갑에 살이 쓸려 붉어짐에도 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팠다. 주피터, 아팠어. 너무 아팠어……. 그건 분명 지금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새턴은 주피터의 품에서 기쁘게 울었다. 주피터는 새턴의 눈물을 닦아주며 제 울음을 삼켰다. 살아있는 자가 느끼는 아픔이었다.
시계바늘은 크게 세 칸을 지나갔다. 새턴은 주피터의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아직도 수갑이 채워져 있는 두 손이 서로를 맞잡았다. 숨소리가 울렸다. 창밖에 푸른빛이 커튼에 부딪혀 퍼졌다. 아침 전의 새벽이 시작될 모양이다. 주피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은 새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실감나지 않았다.
“……아파.”
“응?”
새턴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주피터가 되물었다. 새턴은 되물음에 외려 어? 하고 되물음으로 답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수갑.”
“수갑?”
“응. 이제 풀어도 되지 않을까? 아파.”
아까 할 때도, 많이 쓸려서. 새턴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주피터와 맞잡았던 손을 풀어 가슴팍을 간질였다. 오랜만이었잖아, 좋았지? 주피터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괜한 걱정인가 싶은 마음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래, 교회 가기 전에 풀어줄게.”
“지금은 안 돼?”
“어. 아침 돼야 해.”
“흥……. 그럼 교회를 빨리 가자. 새벽 기도도 있을 테니 괜찮을걸.”
“그럴까.”
“응. 새 출발의 의미랄까.”
새턴이 웃었다. 주피터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럼 일단 먼저 씻고 나올게. 땀투성이야. 주피터는 침대에 널부러져 있던 바지에서 수갑 열쇠를 찾으려 뒤적거렸다. 작은 열쇠라 그런지, 한 쪽 손으로만 찾으려 해서 그런지 손에 잘 잡히지가 않아 눈 사이를 구겼을 때였다.
“가지… 마.”
마치 억지로 삼키려는 듯이 끊어지는 목소리에, 주피터는 고개를 휙 돌렸다. 뒤돌아 본 자리의 새턴은 아까 자세 그대로였다.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그 미소 그대로였다. 주피터는 새벽의 한기처럼 등 뒤에서 올라오는 오한을 느꼈다. 직감이 보내는 신호였다.
그래, 저 미소였다.
“…방금 뭐랬어.”
“뭐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잘못 들었겠지.”
“새턴!”
눈앞의 새턴을 안아도 사라지지 않던 기시감의 정체에 손 끝이 닿자 주피터는 노도와 같은 고함을 쳤다. 자유로운 손과 묶인 손 모두가, 새턴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억세게 눌렀다. 침대가 크게 한 번 출렁였다. 손이 떨렸다. 새턴은 웃었다. 주피터는 울컥 눈을 구겼다.
“Domine, qui amas homines, dominus es salvator mei et non timebo quid homus facial mihi─!(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은 나의 목자, 내 그분과 함께 하니, 그 누가 나를 해치리오!)”
“──응, 나 여기 있어. 연약한 새끼 인간.”
새턴이, 새턴의 얼굴을 한 것이 키득키득 웃었다. 너 진짜 눈치 없구나, 원숭이 새끼답다. 그는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같은 목소리였으나 기괴한 그 분위기에 주피터가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눈끝도 찌푸리지 않았다. 여유를 가진 쪽은 주피터가 아닌 그쪽이었다.
“끝까지 모르지 그랬어. 끝까지 모른 척 하지 그랬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멍청한 인간.”
“─지금까지 날 갖고 놀았다 이거군.”
“그랬으면 이 인간도 살아날 수 있었을 거 아니야.”
살아날 수 있었다, 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새턴은 이미 죽은 몸이었다는 소리였다. 주피터의 진붉은 눈이 순간 일렁였다. 인간의 신앙 중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기생하고 번영하는 악령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불쌍한 새끼 인간. 믿던 신에게서도 버림받아 이런 비참한 운명이지. 아니, 너희가 모시는 신이 있기는 한 것 같아?”
“─닥쳐라.”
“차라리 나를 믿는 편이 낫지 않아? 너도 봤잖아. 그렇게 썩어가던 신부 놈. 마르스였지. 온몸이 곪아서 고통 속에서 죽었어.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지!”
“입 안 닥치지!”
“어때. 그 힘으로 이 인간을 살려줄게─.”

주피터는 다리의 고통도 잊은 듯 일어나 새턴에게 다가갔다. 새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카락 안쪽으로 보이는 얼굴은 일그러져 눈물과 피가 범벅이었다. 새턴은 스스로 몸을 지탱할 수 없자 주피터의 팔소매를 부여잡았다.
「주, 피터.」
「새턴, 너 괜찮냐? 아니, 일단 악령, 아니 치료를─ 젠장, 내가…!」
「붙들, 고, 있을──.」
말을 다 맺지 못한 채, 새턴의 몸이 쓰러졌다. 그리고 마르스의 몸에서 나온 것과 같은 색의 것이 새어 나왔다. 그 후 주피터는 상황이 어떻게 되었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본 정황상 신부의 핸드폰으로 구급차를 불렀었으려니 추측했다. 마르스와 새턴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동되고, 곧 입원 수속을 밟았다.
주피터는 다리의 치료가 끝나고 교회로 돌아갔다. 교회는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고, 주피터는 교회로부터 받고 싶은 대답이 있었다.
악령에 관련된 큰 사건이 있었다기엔 너무나도 평화로운 오후였다. 주피터와 주교의 앞에 둔 홍차에서 따뜻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그것을 가로질러 부딪히는 시선은 그게 뭐 어쨌냐는 양 냉랭했다.
「말이 됩니까? 아무리 악령이 들어가 있던 상태라고 짐작되어도 사람을 칼로 찌르는게?」
「내가 보기엔 굉장히 합당했네만.」
「대체 어떤 관점에서 말입니까.」
「아킬레오 건은 우리도 안타깝지만─ 그 말고도 다른 신부 한 명도 잃을 상황이네.」
「지금 그 얘기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의 선택은 악령을 없애려는 사제의 뜻에 합당한 것이었어. 그러나 아직 악령은 아킬레오 신부의 몸 안에 있지. 어쩌면 그나마도 배를 찔려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라 부마에서 그친 걸지도 모르고.」
「하시려는 말씀이 뭡니까.」
「그가 활동하면 세상에 재앙이 올 거야. 우리는 다시 아킬레오를 죽일 걸세.」
「이런 미친새끼가!」
「앉게, 헤르메스!」
홍차가 쏟아진 찻잔이 파편이 되었다. 주피터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다 뒤집어엎고 싶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에, 소에 얽힌 그 모든 것은 ‘따위’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 그가 지금껏 몸담았던 곳의 선택이었다. 분노에 찬 숨을 몰아쉬며 주피터가 주저앉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우리’ 같은 저급한 단어로 묶지 마십쇼. 그런 집단에 들어갈 마음 없으니까.」
「자네는 그저 오랜 친구를 위해 기도라도 올리게.」
「그런 무기력한─, ─친구 될 마음 없습니다.」
순간 차오르는 연인이란 말을 주피터는 간신히 뒤로 삼켰다.
「그래도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구마를 다시 해서 살려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의료진 말 못 들었나? 이미 출혈이 커서 죽은 몸일세. 다만 악령의 힘으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야. 새턴으로서 그가 살아날 가능성은 신의 기적이 필요하다 이 말일세!」
「신, 신, 씨발…. 야, 주님의 은총 제창하던 태도는 어디 가고 이제 와서 가능성 운운이야.」
「말을 조심하게, 헤르메스.」
「…….」
「구마를 하려 해도 그 신부가 유일하게 장엄 구마 예식에 능통한 자였어. 이제 할 사람이 없단 말일세. 무엇보다 그 악령이 사령을 다시 불러 모으지 않으란 법도 없어. 방법이 없단─,」
「그럼 제가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
「이번에 저희가 한 것도 공식적으로는 허가한 게 아니었다면서. 쌩판 다른 신부가 들어오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비공식적으로.」
「보조사제도 들일 수 없어.」
「상관없습니다. 그거 원래 하기 개 같지만 혼자 할 수도 있는 거라면서.」
「교회에서는 큰 지원을 해줄 수 없네.」
「됐습니다. 이번에 썼던 구마 물품이나 넘겨주시죠.」
「─한 달. 퇴원 후 한 달일세. 그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오히려 악령이 아킬레오 신부의 몸을 낫게 해 활동할 가능성이 더 커. 그때는 교회에서 나설 걸세.」
주피터는 주교의 방에서 나와 벽에 기댔다.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긴 길을 걸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이번 구마 예식 때 주피터와 새턴은 듣지 못했어도 마르스 신부는 악령의 이름을 알아냈었다. 그러니 그로부터 이름만 전해 듣는다면 바로 소환 축출로 넘어가면 될 터였다. 구마를 해도 살아날 가능성이 적다하더라도, 새턴을 그렇게 세상의 이기심에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조금의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늘의 구름보다 덧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
썩어 문드러져 가는 피부. 의식조차 차리지 못한다. 이게 무덤에서 꺼낸 시체인지 산 사람인지조차 의문이 가는 상태로, 마르스 신부는 그렇게 주피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저주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음에도 알 수 없는 환자의 상태에 의료진들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저주였다. 주피터는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환자복 상의를 걷자, 새턴의 손에 뚫렸던 복부는 당장이라도 벌레가 기어 나올 것 같은 형상을 드러냈다.
「─신부님.」
「…….」
「제발, 한 마디만 해 주시죠.」
「…….」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해달라고, 씨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주피터는 절망했다. 이 상황에 절망했고, 이전의 상황에 절망했다. 왜 자신은 그 때 다쳤던 것일까. 그 자재를 스스로 피하기만 했어도 새턴이 돼지를 안고 가 늦게 빠뜨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부마자가 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지금 저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부의 병실에 나와 새턴의 병실에 온 주피터는 죽은 듯 숨 쉬는 새턴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새턴의 옆에 앉아 새턴의 손을 잡았다. 어째서인지 새턴에게서는 부마의 증상 중 하나인 악취조차 나지 않았다. 주피터는 허하게 웃듯 숨을 토했다. 어쩌면 그렇게 울부짖던 신의 은총이 고작 이딴 걸로 나온 건 아닐까. 아니, 은총일 리 없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은 단지 저주든 벌이든 부정적 단어로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새턴의 몸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한 것은 해가 저물고 부터였다. 며칠을 꼬박 그 병실에 있던 주피터는 그 악취가 일몰 후부터 일출 전까지만 이어진단 것을 알았지만 그리 소용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일주일 후, 주피터는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새턴의 퇴원 수속을 밟았다. 병원측은 말렸으나 주피터는 생명 연장에 필요한 기기를 가져가는 한이 있더라도 퇴원을 하겠다 고집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저것 기계들과 함께 주피터와 새턴은 집에 돌아왔다. 그 결정에는, 병실에 두 사람만이 있을 때 새턴이 깨어났던 일의 영향이 컸다.
「나는 괜찮아, 주피터.」
눈이 번쩍 뜨였다. 창밖은 해가 지기 전, 노을빛이 가득했다. 새턴의 눈은 악령이 의식을 지배하는 상태의 특징인 역안이 아닌 맑은 눈동자 그대로였다. 주피터는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자 새턴이 입모양으로 쉿, 이라고 하며 주피터의 입을 막았다.
「주피터, 조용히 들어줘. 언제 또 깰 수 있을지 모르고, 아마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악마가 말하는 거라고 하면서 떼어낼 테니까. 부탁 하나를 해야 해.」
「…….」
「사실 다리 위에서 이후로는 기억도 없고, 어떻게 깨어있는지 잘 모르겠어. 몸도 안 움직이고. 그냥 내 몸에 무언가 있다는 것만 알았어. 그리고 저 너머에서만 아, 악령이겠구나. 나 실패했구나. 그렇게 생각했고.」
「…….」
「이거, 성격이 더럽더라고. 안에 있으면 아파. 지금 깨어있긴 해도 몸도 움직이지 못해. 점점 버티기 힘들어질지도 모르려나.」
「야, 새턴…….」
「그러니까 마음 편히 죽여줘.」
「뭐?」
「교회의 뜻이지?」
「……아니다. 그래도 악령 혼자면 어떻게든─」
「구마 예식으로 빼내면 난 아마 죽을 거야.」
「새턴.」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주피터, 나 또 언제 정신 차릴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들어줘.」
「…….」
「네 잘못 아니야.」
「……….」
「네가 해줘.」
아마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라던 의료진들의 말과 달리, 새턴은 병원에서처럼, 저의 웃음처럼 환한 낮에 이따금씩 정신을 차렸다. 물론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새턴 본래의 의식을 말하는 거였다. 구마 예식을 시도하는 중에 눈 뜨는 새턴은 새턴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살아날 가능성도 높은 것 아닐까. 새턴의 의식이 악령과 싸움을 하는 잠에 잠겨있을 때, 그런 생각으로 희망을 품고 구마를 시도하자면 항상 악령은 거세게 몸부림쳤다. 설상가상으로 언젠가의 구마 예식부터 알게 된 것은, 악령 혼자만 새턴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몸 담았던 부마자의 몸에서 부렸었던, 예식에 쫓겨났었던 두 마리의 사령을 다시 불러 모은 모양이었다. 혼자서 버티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뭐라도 한 번 물을 쏘면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었다. 집안의 전기는 구마하려 할 때마다 터지고 벽지는 악령의 부름에 몰려온 벌레들에 의해 물어 뜯겨 흉측한 꼴이 된 지 오래였다. 사령 한 마리를 간신히 토해내게 했을 즈음에는 그것들을 고쳐보려는 시도도 그만두었다.
「이건, 진짜─.」
보조사제 없이 할 짓이 아니다. 구마 예식이 길어져 일출까지 계속되는 때도 있었고, 계속해서 예식에 대한 공부도 병행하고 있었기에 체력도 지쳐가고 있었다. 혼자 감당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당해보는 것은 또 달랐다. 욕지거리 튀어나오는 것 정도야 일상이었다. 악령한테 하는 거니 좀 봐주십… 아니, 용서하시옵소서. 양심에 찔릴 땐 신에게 그렇게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사실 당장 모든 사령과 악마를 새턴의 몸에서 끌어내고 싶었으나 그럴 때마다 새턴은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상당한 양의 피를 죄 토해야 했다. 또한 새턴의 팔다리는 침대에 타이로 세게 묶어졌던 탓에 검붉은 딱지와 시퍼런 멍이 가시지 않았다. 무리해서 예식을 반복하다 새턴이 살아날 가능성을 직접 죽이게 될까봐 주피터는 다음 예식을 시도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교회에서 제시한 시간을 조금만 남긴 상황에서, 비로소 새턴의 몸에서 뱀과 거미 사령이 빠져나갔다.
그 이후로는 새턴의 본래 의식과 마주한 일이 없었다. 끝이 다가온다. 나는 할 수 있을까. 너는 살아날 수 있을까. 원래는 다른 이들이 새턴의 몸에 저런 상처를 낼 수 없게 자신이 새턴을 지켰던 역할이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바라보는 이가 더 괴로워지는 상처였다. 피얼룩이었다. 바라보는 이는 자신 하나였다. 이것은 죗값일 터이다.
“──아.”
잠이 들었었다 깨어나며 신음 같은 소리가 흘렀다. 긴 꿈에서 빠져나와 멍한 표정으로 주피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는 쪽잠을 자든 편한 자세로 자든 구마 예식 때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항상 같은 내용의 꿈이었다. 설치다 잠에 들어도 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항상, 새턴이 겪고 있을 고통에 비하며 고개를 저었다.
침대 맞은편의 벽을 바라보았다. 새턴이 피와 함께 사령을 토해냈을 때 얼룩진 벽지는 노을빛에 더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들린 묵주를 굴렸다. 지난 과정들을 상기하는 것은 퍽 고통스러운 일이다. 기억하는 일도, 기억도 그랬기에.
누워있던 새턴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봐줬으면 했다. 피 맺힌 눈동자가 아닌 맑은 눈동자로, 건강한 색의 피부로, 그렇게 안겨오는 예전과 같은 새턴을 상상해도 현실은 숨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을 뿐이었다. 희망은 얼마나 나쁜 높이까지 올라가는지.* 또다시 울컥 치솟는 무언가에 주피터가 잠들어 옅은 숨을 내뱉는 새턴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너 강하다며 매일 나한테 우겼던 주제에─.”
지금까지 이겨온 것에 고맙다 하지 못할망정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괜한 화살 돌리기다. 주피터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했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다시 새턴의 고개를 바로 해주고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라는 짧은 사과를 담았다. 노을이 가장 붉게 타오르며 어둠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달력을 보았다. 남은 날은 이틀도 채 없었다. 촉박한 시간과는 달리 마음을 다잡기는 신기루를 잡는 것처럼 어려워졌다.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새턴을 위한 것이었기에, 주피터는 흔들리는 결심을 세우며 목에 걸린 십자가를 꾹 부여잡았다.
7.
주피터가 창문의 커튼을 걷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나무에 매달린 푸른 잎이 습한 여름 바람에 흔들렸다. 여기저기서 검은 사람들이 저마다 책 두어 권씩을 들고 허둥지둥 달려가고 있었다.
“쟤네는 뭐 하러 점심시간에 빠듯하게 수업을 신청해서 저렇게 뛰어갈까?”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뒤를 돌아보니, 구겨진 이불을 개고 있는 새턴이 보였다. 주피터의 대답이 저도 모르게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너처럼 땡땡이 안치는 훌륭한 학생들이지.”
“네가 할 말은 아니거든?”
“나는 이 양심 없는 애한테 붙잡힌 가련한 양이고.”
“하? 방금 전까지 나한테 좀만 더 안고 있으면 안 되냐 한 주피터는 어디 갔나 몰라.”
“여기 있는데.”
아, 잠깐! 주피터가 새턴의 허리춤을 뒤에서 껴안아 새턴의 목덜미에 주피터의 머리카락이 닿아 간질거렸다. 새턴이 벗어나려 버둥대자 주피터는 놓치지 않은 채 침대에 그대로 주저앉았고 새턴은 와르르 웃었다. 방금 이불 다 갰는데─. 알게 뭐야. 한 판 더 할래? 됐어. 이미 땀나서 씻어야 시간 맞춰. 주피터가 아쉬운 듯 새턴의 목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떨어졌다.
“불량 학생 되면 안 되지. 같은 교구 지원하기로 했잖아.”
“어─ 그렇긴 하지.”
“빨리 준비해. 같이 나가자고.”
나 먼저 씻을게. 새턴이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행복한데, 평화로운데, 이게 일상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고개가 번쩍 들렸다. 팅, 하고 맑은 금속이 뭔가에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가 들렸다. 식은땀이 차갑게 흘렀다. 평소와는 완전히 반대의 꿈은 마치 가위에 눌렸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이 다급하게 목에 걸려 있을 십자가를 더듬었다. 어째서인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 반대편 손에 걸린 수갑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금속만큼이나 차가운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천천히, 시선이 아래에서부터 위를 향했다. 꼭 그날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다만 창문을 가린 커튼이 달빛도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는 밤이었다. 그 작은 빛을 반사해 빛나는 하늘색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싱긋 웃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듯 입술 근육을 몇 번 씰룩거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그는 달려갔다. 새턴! 주피터의 외침은 다리 위에 밤바람으로 흩어졌다. 둥근 다리 위를 달려간 새턴의 모습은 어느덧 다리의 절반을 건너 시야에서 사라졌다. 상체를 최대한 일으킨 주피터가 먼 곳을 보려 눈가를 구겼다. 그러나 곧 믿기지 않는 것을 본 붉은 눈이 일순 크게 열렸다.
난간 아래로 새턴이 떨어졌다.
「저게, 무슨─.」
돼지만 빠뜨리면 될 터였다. 새턴이 떨어질 이유가 없었다. 주피터는 더 다급하게 다리를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혼자 한 시도는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고, 얼마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응급대원들이 간신히 그의 다리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했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뿌리치고 주피터는 난간에 몸을 기대다시피 한 채 다리를 건너갔다. 아마도 새턴이 몸을 던졌을 자리에 도착했으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반사되는 빛만이 영롱할 뿐 그 아래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정신이 하얗게 침잠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때 반대편에서 인영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챈 주피터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터벅터벅, 익숙한 걸음소리로 물에 젖은 새턴이 걸어오고 있었다. 땅을 보며 걸어오던 새턴이 순간 고개를 살짝 들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빛이 새턴을 피해가는 양, 주피터는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찡그리고서도 새턴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새턴이 그런 어둠 속에서 웃었다. 웃으며 올라간 입꼬리만이 도시의 다리를 가로질러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을 희미하게 받았다. 주피터는 비틀거리며 더 가까이 새턴에게 다가갔다. 몸을 지탱하는 한 손은 필요했기에 양손 대신 오른손으로 새턴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너 괜찮은 거야? 어디 다친 덴.」
「멀쩡해─ 걱정 마.」
「대체 왜 뛰어내린 거냐!」
「팔을 움직여서 돼지를 떨어뜨리려는데 팔이 도저히 움직이지가 않아서. 시간이 급하니 몸이라도 날려야지 어쩌겠어.」
새턴은 뒷목을 숙여 풀어주고 주피터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닿은 주피터의 손을 떼어냈다. 걱정했어? 그 질문에 주피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이라고 하냐, 이 사고뭉치 녀석아. 흐응─, 걱정했나 보네.
「하아… 멀쩡하니 봐준다. 이제 돌아가자고.」
「─어디로?」
「당연히 마르스 신부한테 가야지. 일 잘 끝냈다고 얘기는 해야 집에 가든 말든,」
「안 가면 안 돼?」
「뭐?」
「일단 주피터 너 병원부터 가자. 그 신부도 중요하지만 네 상처가 먼저지.」
「어차피 얼마 안 걸려. 이 정도야… 걷기 좀 불편할 뿐이지 참는 건 문제가 아니고.」
「……응.」
그렇게 말한 새턴은 평소에 비하면 다소 무정한 태도로 주피터를 앞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새턴이 부축해주지 않는 것에 주피터는 무어라 말하려다가도, 곧 새턴도 지친 상태임을 깨닫고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새턴은 구마 예식이 이뤄졌던 집까지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갔다. 건물 입구를 앞에 두고 새턴은 주피터를 기다려 주었다. 새턴은 자신이 있는 곳에 도착한 주피터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는 주피터가 앞서서 계단을 올랐다. 새턴이 그 뒤를 따랐다. 복도는 정적에 차 있었다. 저쪽에 벽에 기대 서 있는 마르스가 보였다. 곧 마르스도 두 사람을 보았다.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악령에 의해 전기가 나가버린 복도에는 달빛도 옅게 들어올 뿐이었다. 서로는 서로를 검은 형체로만 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의 숨소리가 귀에 닿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잘 끝냈습니까?」
「예.」
「마르스 신부님.」
「음? 뭡니까, 아킬레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드릴테니 지금은 우선 저희가 가 보면 안 될까요?」
「새턴?」
「주피터가 다쳤어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마르스가 주피터를 벽 쪽에 앉혀 다리를 살폈다. 아, 과연. 악령이 몸부림치긴 거하게 쳤나 보네. 주피터는 쓰라린 감촉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르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킬레오, 치료만큼이나 구마 예식 후 정화 작업이 중요해요. 혹시 모를 저주의 악영향이 남아있을 수 있거든.」
「그건 나중에 해도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살점이 썩는 저주라도 남아있으면 어쩌려고요?」
「지금 치료 안 받아서 썩을 수도 있죠.」
주변의 분위기가 싸하게 흘렀다. 주피터는 알 수 없는 새턴의 고집에 미간을 좁힌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새턴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마르스를 노려보았다. 마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새턴 또한 침묵 속에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면 아킬레오, 당신 먼저 정화 의식에 들어가겠습니다. 헤르메스의 치료는 지금 구급차를 불러 하도록 하죠.」
「뭐?」
「헤르메스의 치료를 먼저 하면 불만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뭔데 자꾸 날 방해하는 거야──!」
순식간에, 마르스가 들고 있던, 구마 예식에 썼었던 시퍼런 날붙이가 새턴의 몸을 반쯤 꿰뚫었다. 정확히는 꿰뚫다가, 새턴의 손에 붙잡혀 저지당했다. 사람의 것이 아닌 악력이 마르스의 손을 뒤틀었다. 마르스의 복부께가 주먹에 뚫렸다. 마르스의 몸이 주피터 앞에 무너졌다. 어두운 액체가 악惡의 형상마냥 스멀스멀 그의 몸 밖으로 기어 나왔다. 주피터가 놀라 바라본 곳에는 새턴이 있었다. 새턴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있었다. 새턴은 예에 없던 눈으로 주피터를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며, 웃었다. 상황을 정리하기도 힘든 머리에 새턴의 모습은 주피터에게 한참을 낯설게 다가왔다. 새턴이 물러날 곳 없어 다급히 무기가 될 것을 찾는 주피터에게 손을 뻗었다. 주피터의 얼굴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새턴의 눈썹 사이가 울컥 일그러졌다. 인간의 몸이 우악스럽게 피를 토했다.
그들의 사랑은 비밀로 계속되었다. 비밀이었기에 숙소에서도 방의 문을 다 잠그고 커튼을 꼼꼼히 친 후에야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고, 서로의 귀에만 들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십자가가 빤히 바라보는 공간에서 그러고 나면, 고해성사 때 마음속으로나마 이 감정을 죄로서 고백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순 고민이 드는 날도 있었다. 주여, 당신의 아들들끼리 사랑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들키지 않고 사제로 인정받아 학교를 졸업했다. 서품을 받고 같은 교구에 지원해, 같은 본당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학교 안에 있었을 때보다 신에게 더 가까워진 장소에서 더 대범해졌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입모양으로 벙긋대며 사랑한다 말하는 것을 넘어서 조용한 방에서는 이따금씩 찔꺽이는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입술 뒤로 힘겹게 넘기는 소리는 성가마냥 울려 퍼졌다. 서로를 탐하고 나서야 그것이 죄임을 알았다. 행위 자체가 아니고, 단지 장소가 잘못되었음에, 주여, 당신의 아들들이 사랑을 했습니다. 당신의 성소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욕구의 자제도 사제에게 요구되는 사항 중 하나였음에도 그들의 고해성사는 거기에서 그쳤다.
「우리, 벌 받으려나.」
「주님이 남자끼리 사랑하지 말라 한 적은 없었는데.」
「알아. 그냥 인식의 문제긴 하지만….」
「근데 왜. 학교도 졸업한 마당에 불안해?」
「아니야. 우리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나름의 노력을 했다고 믿었다. 일반 신도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기 위해 먼저 행해지는 사제들의 고해성사에서 마음속으로는 모든 진실을 낱낱이 고하며, 그들의 신이 그것까지 들어주길 바랐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오만했다. 그러나 주관적 해석을 긍정하고 객관적 사실을 애써 부정할 따름이었다.
신은 전 우주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앞길을 신경 써서 조형한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신의 말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나 한 사람을 체크메이트 직전의 위기감으로 몰아넣을지는 그 외에 아무도 알 수 없다. 신의 뜻을 받들어 배운 사제든 신부든 그건 마찬가지였다.
「구마─ 요?」
「그래요. 비공식적으로 하는 거긴 한데 여기 교구에 제대로 구마 자격에 맞는 사람이 없어요. 그나마 헤르메스랑 아킬레오 둘이 학교에서 관련 과목 배웠다며.」
「저희 잘 아는 거 없는데.」
「어쩔 수 없어요. 상황이 급해서. 수컷 악령이 여자 부마자 몸에 무슨 연고인지 들어가서 묶여있는 모양이거든.」
별 거 없어요. 예식은 대부분 주사제가 진행하니까 그냥 나 도와서 하라는 거 하면 돼. 내가 거의 다 하는 거니 떨지만 마요. 주님 제대로 믿고. 마르스 신부가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문제없을 거라던 그의 말과 달리, 어쩌면 지난 날 주피터와 새턴의 보이지 않는 죄에 비추어 보면 거기서부터 이미 틀렸던 걸지도 몰랐다.
구마라는 막연한 행위를 처음 접한 그들에게 그 모든 과정은 공포였다. 기괴하게 비틀어지는 부마자의 목소리와, 자신을 여러 명인 척 속이려는 방법으로 오가는 몇 개의 언어는 가뜩이나 어수룩한 그들을 더 정신없게 했다. 그런 그들도 그들이었으나, 구마 예식을 주도하던 마르스 신부는 예식 중에 심장을 몇 개는 갖다 판 기분이었다. 그래도 사령 두 마리를 쫓아내고, 끝이 보였다.
「말하라, 네가 불리우는 이름이 무엇이냐!」
「Dica nomen tuum quod vocatiris tu!」
신부의 말을 바꾸어 주피터가 외친 순간 주피터와 새턴은 동시에 귀가 저 어둠에 처박히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머리를 때리는 이명에 움츠리기를 잠시, 고개를 들자 신부는 이미 악령을 부마자의 몸에서 불러낸 뒤였다. 소금 밖에 있던 두 사람은 악령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주피터가 서둘러 검게 변한 돼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명심해, 15분이야! 주피터의 뒤를 쫓아 달려나가는 새턴만이 그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악령이었고 악마였다. 악마와 함께 지옥길을 걷는 셈이었다. 달려오던 차들은 몇 번이고 새턴과 주피터를 덮치려 했다.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자욱한 연기가 밤하늘을 뒤덮고 까마귀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달빛에 일렁이는 강물을 보기 위해 지옥을 견뎌야 했다. 목에서 칼칼한 맛이 올라왔다. 다잡을 새도 없이 주피터는 다리 위로 무겁게 발을 내딛었다.
「──몇 분 남았냐!」
「2분─ 어쩌면 그 아래로!」
「젠장!」
「주피터 너 다쳤어. 차라리 나한테 넘겨!」
「이 새끼 성깔을 잘도 네 힘으로 버텨……!」
돼지를 빠뜨려 악마를 수장할 수심이 되려면 강 한가운데로 가야 했다. 다리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쓰게 입을 다셨다. 젠장, 빌어먹을, 개새끼!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면서 주피터가 바둥대는 돼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 순간 커다란 화물 트럭 한 대가 그들이 있는 난간 쪽을 향해 돌진했다. 주피터를 부축하던 새턴이 순간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동시에 트럭이 운반하던 화물칸의 문이 열리고 그 안의 자재들이 아래로 우르르 쏟아졌다. 낮은 비명이 샜다. 트럭이 돌진해 부딪혀 온 것을 피한 충격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엎어졌던 새턴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재에 깔린 주피터가 신음하고 있었다. 주피터! 놀라 달려간 새턴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한 쪽 다리만 깔려 있었다. 그러나 빼내기에는 두 사람의 힘으로도 무리였다. 새턴은 주피터를 구하려다 힘이 부족함을 깨닫기 동시에, 곧 도망가려고 몸을 일으키는 검은 돼지를 시야에 담았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다시피 해 돼지를 품에 안았다. 그와 동시에 몸에 마비가 온 것 같은 무게를 받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악령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주피터는 이 무게를 달고 대체 어떻게 움직인 거야. 새턴은 하, 하고 짧게 내뱉었다. 네가 가면 위험해, 새턴! 제 다리를 어거지로 잡아 끌어내려 하며 주피터가 외치는 소리에, 새턴은 고개를 저었다.
「금방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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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악한 것들은 순수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Ernest Hemingway」
1.
우리는 함께이다.
2.
창밖으로 날이 밝아왔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루 안식일로 정하고 쉬셨다는 날인데…… 씨발. 주피터는 떠지지 않는 눈에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이번 밤도 악몽한테 시달렸다. 어떻게 안식일도 넘어가지를 않아…. 세 시간은 제대로 잤으려나. 고개를 먼저 들었다가 상체를 세웠다. 의자에 앉아 엎드려 잤던 탓에 척추께와 어깨가 뻐근했다. 습관처럼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코로 느껴지는 방의 악취야 이제 익숙해서 원래 공기가 이런 냄새였거니 싶었다. 시야가 흐려 눈을 비비려 왼쪽 손을 들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손이 눈에 닿는 것보다 먼저 귀에 닿았다. 맞다, 수갑… 잠긴 목소리로 탄식처럼 내뱉었다. 자면서 수갑이 살에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수갑의 사슬을 타고 시선이 올라갔다. 익숙한, 창백해진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새턴.”
“…….”
당연하게도 답은 없었다. 기대하고 부른 건 아니었기에, 별 동요 없이 주피터는 시선을 그대로 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침 햇빛에 금발이 어여쁘게도 반짝인다. 부마자가 되기 전에는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던 머리카락은 어느덧 날개뼈까지 자라있었다. 이제 정말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 해도 믿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자 마치 이제 알았느냐는 양 새턴의 푸른 속눈썹이 색이 바랜 듯 하얗게 빛났다. 악령 하나 씌었다고 미모가 어디 가는 건 아닌가 보네. 주피터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 안에 있는 게 자신이 알던 사람보다 악령의 비중이 더 높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참 악령한테 빌려주기도 아까울 사람이었다.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수갑 구멍에 넣고 돌렸다. 자신의 손에 채웠던 수갑을 침대 사이드에 걸어두었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옅은 숨소리 하나와 제법 깊은 한숨 소리가 섞였다.
3.
방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혹시나 싶어 두어 번 당겨 확인한 후 주피터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입고 있던 얇은 옷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밤새 악취에 절은 옷은 입으려야 두 번 다시 입을 수가 없었다. 부마자의 몸에서 나오는 악취를 견딘다는 건 신앙심으로 어떻게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 악령 새끼, 들어올 거면 좀 깨끗하게라도 들어오든가─. 짜증을 내는 그의 말은 단순히 부마자의 특징인 악취를 향했다기보단, 그로 인해 계속해서 부마자 곁에 있기 힘들게 하는 상황을 향한 것에 가까웠다.
갈아입을 사제복을 가지런히 욕실 앞에 놓아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샤워기에서 온수 대신 냉수가 쏟아졌다. 정신을 들게 하기에는 딱 좋았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어찔어찔하던 머리는 몸을 씻고 사제복을 몸에 걸치자마자 완벽하게 균형을 잡았다.
묵직한 발걸음이 방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집 안은 적막했다. 집 안 가장 깊은 곳에서 생명체 둘이─ 아, 한 놈은 생명체로 쳐도 되는 건가, 이거. 어쨌든 둘이 한 몸으로 숨 쉬고 있긴 했으나 돌아다니는 사람은 결론적으로 저 혼자였다. 식사도 한 사람분이면 그만이었다. 봉지 입구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던 건지 표면이 까끌해진 빵 세 조각과 물 한 잔이 오늘의 아침 식사였다. 뭔가 다른 걸 먹고 싶어도 집안을 비울 수 없었기에 사러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려 해도 대단하신 악마님 한 번 튀어나오실 때마다 집안 전기란 전기는 다 끊어 놓으시니 컴퓨터를 일회용으로 쓸 각오는 차마 하지 못했다.
“저 거지 같은 새끼 때문에 냉장고고 뭐고, 내가 진짜──.”
기어코 마음속 깊은 울분은 말로 튀어나왔다. 악령에 쓰인 사람은 아무 죄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안의 악령까지 좋아질 수는 없는 거란 말이지. 개만도 못한 새끼, 진짜. 지구에 인간만 70억이고 그중에 절반이 남자인데 왜 하필 새턴인가. 왜 하필 저가 사랑하던 사람의 몸인가. 다 집어치워도 멋대로 들어왔으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물론 들어와서 가만히 있을 거였다면 애초에 들어오지를 않았겠지만─ 애가 깨어날 때마다 아프단 소리를 지껄이게 하는 게 대체 안에서 뭔 짓을 하는 건지 악령 놈 시꺼먼 속을 뜯어볼 수도 없고. 저게 만질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 양잿물에 머리 처박게 했을 거다. 주여, 제가 정의로운 구마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도라도 올려야 할 판이었다.
그때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뚝 끊겼다. 주피터는 식탁에 놓여 있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침이 가리키는 시간은 세 시였다. ─설마하니 내가 아무리 딴생각을 했다고 식사하다 네 시간이 지나진 않았겠지. 누구 짓인지 너무 뻔해서 속에서 또 울컥했다. 초인종이 또 한 번 울렸다. 물고 있던 빵을 목 뒤로 욱여넣은 채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좀 늦게 여셨네요. 열 시에 온다고 했는데, 혹시 잊으셨던 겁니까? ─헤르메스Hermes 신부님.”
“──시계가 고장 났더군요. 니체타Nicetas 사제.”
교회에서 온 사람이었다.
4.
“차린 게 없으니까 주실 거 주고 빨리 가시죠.”
“형제님의 정성 어린 환영 감사합니다.”
“뭘요. 저희 사이에.”
빈말로라도 집에 변변찮은 건 없지만 차라도 한잔 하시겠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서로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부딪혔다. 먼저 한숨을 내쉰 쪽은 니체타, 어스였다.
“솔직히 매번 똑같은 말 전하러 오는 것도 죄송하군요.”
“그거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로군요. 알면 이제 그만 좀 오셨으면 합니다. 물건은 택배로 보내시고. 요즘 택배들이 악령 튀어나오는 새벽 세 시에 올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 않거든요.”
“그건 안 됩니다. 어쨌든 일반인의 연루 가능성을 막는 것이 저희의 일이니까요.”
“거 그놈의 일반인 진짜─ 제가 지키고 있는 건 헛짓이랍디까.”
“만약의 가능성을 말하는 겁니다. 헤르메스.”
“…….”
“아킬레오Achileus가 마지막으로 깨어났던 게 언제죠?”
주피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으로 새턴을 본 게 언제였더라. 매일 집 안에서만 생활하고 해 뜨고 지는 것만이 변화가 생기는 생활에서 시간 감각은 무뎌진 지 오래였다. 날짜 감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다만 이렇게 떠올리기 힘든 건 최소한 근래에는 본 적이 없었단 소리겠지…. 아마도 사령 두 마리를 토해내게 한 뒤였던가. 악령 하나만 남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며, 얼마 안 남았기에 그런 것이라 위안 삼는 날도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좀 깨어나지 않을까 싶어 기대를 거는 것도 점점 기대하지 않는 기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답답해진 마음에 주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주방을 향했다. 물이 조금 남아있던 컵에 물을 가득 채워 입에 털듯이 부었다. 한 숨을 내보내고 한숨을 쉬었다. 물을 한 번 더 부은 컵을 가지고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킬레오의 본 의식이 드러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건 그만큼 침식이 많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건 나도 잘 압니다.”
“남자 부마자예요.”
“안 믿길 정도로.”
“안에 들어간 건 72악마 중 하나고요.”
“그래서 성깔이 더 더럽더군요.”
“솔직히 지금까지 붙잡아 두는 것 만으로도, 아니, 부마자가 악령에게 바로 먹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신의 은총이에─”
“야. 이 개새끼가 지금,”
떨어뜨리듯 놓아버린 컵이 탁자 위에 왈칵 쏟아졌다. 네가 지금 네 일 아니라고 입을 텁니까. 씨발 진짜. 주님의 이름을 걸면 만사 오케이로 다 되는 줄 아나. 주님의 뜻을 전하는 그의 자식들이죠. 형제끼리 위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주시면. 아 그렇습니까. 어디서 종교가 만능 면죄부냐며 주장하는 것들한테 잘 어그로 끌릴 주장이군요, 그거.
“들어보세요, 헤르메스. 아니, 주피터.”
“듣고 있습니다. 어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조금만 더 기간을 늘려 달라고 요청을,”
“악령에 아킬레오의 의식과 의지가 모두 침식되면 막을 수 없습니다.”
“….”
“72악마 중 하나인데, 구마를 한다고 해도 그가 그 과정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 무엇보다 아킬레오는 이미.”
“좀 닥치시죠.”
“현실을 직시해 주십사 합니다.”
“지금 보는 현실도 충분히 벅찹니다.”
“교회의 뜻에 따라 구마를 거치지 않고 그를 악령과 함께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 덜 고통 받는 방법일 수 있어요.”
“…….”
“지금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저도, 당신도. 그러니 최대한 빨리 놓아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교회의 의견이죠.”
그렇죠. 돌아온 대답에 주피터는 비릿하게 웃었다. 교회의 의견이다.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는 고통을 이겨내는 너를 위해, 교회는, 우리가 믿었던 신은 이른 죽음을 선사한다. 그것이 나를 제외한 세상 모두의 암묵적 의견이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식료품과 생필품은 저 가방에 있습니다. 어스가 가방 두어 개를 탁자 아래에 두고 일어섰다. 집의 문이 열리며 이방인의 앞길을 터주었다. 예, 수고하십쇼. 돌아가는 길에 주님의 축복이 있으시길. 이 집에 주님의 축복이 있으시길.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말이 오간 후, 집의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5.
한참을 오도카니 서 있던 주피터는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와 털썩 앉았다. 고개를 가누지 않고 뒤로 기댔다. 손을 위로 올려 눈을 덮었다. 어둠이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실 같은 빛이 들어오지만 어둠이다. 허하게 웃었다.
과연 신의 자식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
아니, 나의 잘못이다.
과연. 아주 간단한 결론이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단박에 풀어내는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암묵적인 정답이다. 오로지 너만이 그걸 인정하지 말라 했을 뿐이다.
정확한 날짜야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네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던 때를 잊을쏘냐. 잊을래야 잊을 수 있을쏘냐. 그 한가득 절망에 담가졌다 나온 눈동자로 애써 희망을 겉칠한 시선이 있었다.
「나는 괜찮아, 주피터.」
차라리 심연과 싸우는 게 낫다 싶을 상황을 불평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담아낼 말은 그게 아닐텐데 하고 생각하게 하는 너의 단어들이었다. 듣고 있는 나를 한층 더 무력한 멍청이로 만드는 것 같은, 그래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게 하는 언어의 조합이었다.
「점점 버티기 힘들어질지도 모르려나.」
「야, 새턴…….」
「그러니까 마음 편히 죽여줘.」
「뭐?」
「교회의 뜻이지?」
그냥, 몸에 악령이 있어서 그런가, 감이란게 좋아 졌나봐. 왜 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내가 봐도 희망은 없어 보여. 하하…… 이 아이, 성격이 제법 독하거든. 당장 사령의 피를 토할 것 같은 목으로 어떻게 웃음을 짜내었다.
「아니다. 그래도 악령 혼자면─」
「구마 예식으로 빼내면 난 아마 죽을 거야.」
「새턴.」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주피터, 나 또 언제 정신 차릴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들어줘.」
「…….」
「네 잘못 아니야.」
「……….」
「네가 해줘.」
저를 향한 온전한 믿음이 그리 무서운 것이었다. 그 뒤로 바로 의식은 잠식되어 버렸었지. 탁자 위에 놓여있던 달력을 바라보았다. 줄이 직직 그어진 날짜는 한 달을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달이 한 번 더 차오르면 돌이킬 수 없다….
자신이 이 구마를 함으로써 새턴이 돌아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다못해 보조사제 없이 악령이라도 제대로 꺼낼 가능성은 얼마인가.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의 죄다. 저의 죄가 크나이다. 복잡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뒤섞여 의식의 심연을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끌어 당겨지는 느낌에 주피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주의 십자가가 그를 정면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의 구원이신 분이여, 당신께 청하오니.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성호를 긋고 손을 모아 그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충만한 선과 힘으로 질투와 저주를 없이 하시고…….
10.
“Vim, successum et caritatem사랑과 승리로 변화 시키소서.”
1.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6.
지나고 보면 그 동안의 시간은 모두 꿈 같았다. 떠올려보면 몽롱한 파노라마 필름처럼 머릿속을 흘러갈 뿐이었다. 같은 나이, 그러나 완벽히 반대인 성향인 새턴과 함께한 시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되짚어보려 하면 새턴이 어렸을 적 괴롭힘을 당할 때 주피터가 구해줬던 거라든가, 아니면 중학교 때 잠깐 방황하던 주피터를 새턴이 붙잡아 줬던 거라든가 같은─ 단편적인 기억이 조각조각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어릴 적 새턴에게 주피터는 구원자요 신의 현신이었고, 학생 주피터에게 새턴은 또 다른 부모였다. 새턴에게 주피터가 조금 더 광범위한 존재로 다가왔단 것은 사소했다. 서로를 빼놓고 인생을 얘기하려면 공백이 넘쳐 논의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로, 서로는 서로의 삶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기억이 흐려진다고 쌓아온 감정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다. 쌓아온 감정을 드러냈을 때는 마치 일상처럼, 아주 덤덤한 순간이었다.
열여덟 살이었다. 새턴은 주피터에게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마치 같이 간 교회에서 올리던 기도처럼 차분했고, 고해성사처럼 조금은 떨리던 목소리였다. 자신이 가진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던 주피터가 그것을 인정하고 새턴의 고백을 받아들인 것은 고백 후 잠적 이틀 만이었다. 시작을 머뭇거렸을 뿐, 그 뒤로 그들은 지금까지처럼, 그러나 다른 의미로 언제나 함께였다. 다른 아이들이 진로를 고민할 시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 신학교에 가려고.」
「네가? 흐음.」
「뭐.」
「주님이 너같이 덩치 큰 자식 만든 적 없다 하실─ 컥!」
「죽고 싶다고?」
「아니, 나도 신학교 간다고….」
「따라오지 마라, 멍청아.」
「싫어. 너 감시해야 해.」
감시는 얼어 죽을.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은 계획대로 같은 가톨릭 대학교에 진학했다. 순조로웠다. 꽃 피는 캠퍼스를 둘이 같이 거니는 것도, 적당하게 유지하는 성적도.
그러나 신은 유柔한 단조로운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역경이란 말을 꺼내들곤 했다.
사랑에 국경은 없어도 종교는 있는 거였다. 일반화가 아니라 적어도 주피터와 새턴이 속한 이 작은 공간에서는 그랬다. 연예인의 호모 스캔들이라도 한 번 터졌다 하면 학교 안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수근수근 올라왔다. 주피터와 새턴은 손을 맞잡았다. 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만이 그 사실을 이해했다. 그들이 믿는 신은 그들의 감정을 옳지 않다 부정한 한 마디조차 없었음에도, 그의 신자들은 존재를 만들어내거나 의미를 왜곡하여 혼란을 야기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주피터와 새턴은 다만 유일한 이해자와 입술을 맞대어 서로에게만 전할 뿐이었다.
우리는 신을 제대로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신은 없었던 건 아닐까. 믿음은 흔들렸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기대왔던 신이 불안하다면 다른 방도를 찾으면 된다, 는 것은 새턴의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사실 너도 내 신이야, 주피터.」
「어디 가서 불경죄로 잡힐 소리 한다.」
「진짠데. 신전이라도 세워줄까? 내가 교주 해야지. 이름은 주피터교 어때?」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라. 안아줬는데 왜 안 자.」
「네가 너무 잘생겨서.」
「뒹굴자고?」
「잘못했어여.」




Malesuádus
;악을 권유하는, 악한 의견을 주는
이 소설은 영화 <검은 사제들(The Priests, 2015)>의 설정을 일부 차용, 각색했음을 밝힙니다.
붉은 눈이 크게 열렸다. 하늘색 눈이 웃었다. 언제부터 악령의 말을 이렇게 들으려 했었던가. 그러나 이미 말려든 뒤였다.
“내가 지금 널 죽여 봐야 의미도 없거든. 이 빌어먹을 새끼가 날 막고 있어서. 새로운 몸이 필요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옮겨가는 방법 기억하지? 내가 이 아이한테 했던 것처럼 그렇게 옮겨가는 거야. 아무나 한 명 데려오든, 아니면 널 희생하든. 새로운 수컷을 데려와. 그럼 얜 살려 준다니까? 너 봤잖아. 저 방에서, 372시간 48분 전에 읽은 책에서 봤잖아. ‘악령은 필요에 따라 몸을 옮겨 다닐 수 있다.’ 라고 되어있는 거. 기억나잖아─.”
“…….”
주피터는 말라가는 입술만 달싹였다. 개소리 말라고 지껄여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인 탓이었다. 만일, 만일 저 말을 따르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새턴은 구마가 성공한들 죽음을 면하기 힘든 상황을 벗어나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는 자로서 악과 손을 잡을 수는 없다. 하와가 받은 뱀의 유혹이었고 악의 권유다. 알면서도 그는 신의 전도사로서 악에게 호통 칠 수 없었다.
“왜, 이제 와서 찔려?”
“……넌,”
“웃기지 마. 사내 놈 둘이서 붙어먹던 주제에. 고해성사 하던 곳에서 배도 맞췄지. 거기다가 다른 신까지 모셨잖아? 사실 너도 내 신이야, 주피터.”
악령은 그 날 그때의 새턴의 목소리와 말투, 어쩌면 감정까지 그대로 그 말을 재현했다. 고개 돌리지 마. 너도 기억하잖아. 너도 알잖아. 너희가 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어? 오만한 인간 같으니. 그러니까 너희가 그따구인 거야.
“이런 상황에서만 독실한 사제인 척 하지 마. 역겹거든.”
“…….”
“이기적으로 굴어.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원래 인간 원숭이들은 그렇게 태어났거든. 그렇게 만들어진 게 너희 인간이야! 어디서 신에게 사랑 받는 척 고고하게 굴어?”
“……그만 해라.”
“설마 아직도 신을 믿어? 너희를 구원해 줄 거라고? 신의 기적 좋아하네. 그렇게 죽고 못 살던 네놈들이 이런 꼴이 되었는데! 차라리 전의 그 신부 나부랭이에게 가시적인 저주를 내린 날 믿는 게 더 합리적이지.”
“그만 하라 했지───!”
결국 잇새로 참아내던 고함이 터졌다. 커튼 너머로 들어오던 푸른 빛이 산등성이를 넘어선 듯 더 밝아졌다. 똑똑히, 새턴의 푸른 눈동자를 감싼 어둠을 보았다. 아아, 신의 눈길. 주피터는, 웃었다. 허하게 웃으며, 탄식했다. 탄식 같은 분노였다.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분노였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머리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처량한 새벽 빛이 방 안을 조금씩 삼켜온다. 빛을 받은 무언가가 침대 구석에서 빛났다. 다만 그것을 잡았다. 청명한 빛의 십자가가 손에 들려 있었다. 늘 목에 걸고 다니던, 약식 구마에 사용하는 십자가였다. 끊어진 줄은 굳이 그렇게 한 범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툭, 떨어뜨리듯 십자가를 새턴의 이마에 댔다. 십자가를 누르는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Dio. Abbi piet di noi.(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새턴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푸른 속눈썹이 여명처럼 내려앉았다. 곧 새턴은 미소를 감추고 평온해졌다. 주피터는 새턴을 한참이나 놓지 못했다. 기어이 아침 해가 떠오른 후에야, 그는 새턴을 안고 신음을 삼킬 수 있었다. 악령이 의식 너머로 물려지기 직전 했던, 잘 생각해 보라는 그 입모양을 주피터는 잊을 수 없었다.
9.
잠도 자지 못한 채 기도를 계속해서 올렸다. 당신을 찾는 이들의 구원이신 분이시여, 당신께 청하오니, 모든 악마의 힘과 사탄의 모든 작용과 활동을 쫓아주시고 없이하시며.
「응, 나 여기 있어. 연약한 새끼 인간.」
악의 영향과 저주, 혹은 악의를 가진 이들의 시선을 통한 저주,
「그렇게 썩어가던 신부 놈. 마르스였지. 온몸이 곪아서 고통 속에서 죽었어.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지!」
「우리는 다시 아킬레오를 죽일 걸세.」
당신 종을 향해 저지르는 악행들로부터 보호하소서.
「이기적으로 굴어.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보호하소서……. 기도문을 외워도 소란스러운 머릿속은 치워지지 않았다. 결국 자리를 박찼다. 머리를 헝클이며 낮게 신음했다. 창문 밖을 보았다. 주어진 기한을 하루 남긴, 마지막 태양이 떠있었다. 개개인의 불행에 상관 없이 태양은 뜨고 세상은 돌아간다. 나뭇가지가 선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가는 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달려가던 아이가 엎어지기도 한다. 아이를 부르는 제법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자신의 손에 선명하게 찍힌 목걸이의 십자가 자국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오래 전의 풍경을 보고 있다고 착각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 과연 교회의 말대로 정말 이러다가는 악령이 새턴을 먹을 것 같았다. 그렇게 먹혀버리면, 어쩌면 영영 새턴은 새턴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교회의 손에 죽겠지. 차악 같은 선택지 따위는 처음부터 어젯밤까지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에 있었다. 기적같이 생겨났다. 그러나 마냥 달가워 할 수도 없는 기적이다. 주피터는 주먹을 쥐어보았다.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을테다. 눈앞에 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뒤섞이던 그 밤이 환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 서로의 숨소리가 찬 밤을 지샐 수 있다.
악의 권유는 달콤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 구마 예식을 한 들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구마 예식은 신에게 가장 온전히 의지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새턴을 살릴 수 있다는 높은 가능성을 제시 받은 상황에서 과연 자신이 절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주피터는 자신할 수 없었다. 구마 예식이 실패하면 새턴도, 자신도 신의 구원 따위 끝자락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할 것이다. 그렇다고 악을 믿을 것인가. 그는 악의 공포에 굴복해 죽어갔던 마르스 신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지… 마.」
그렇게 밤새 새턴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아마 진짜 새턴의 목소리는 그거 하나였지 않았을까 하고, 주피터는 생각했다. 다른 목소리들은 생각할 수록 점점 고장난 테이프 마냥 비틀어져 귓속을 울렸다. 새턴의 진짜 의지. 주피터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준이며, 존재이고, 그랬기에 가장 취약한 약점이었다. 악령에게 흔들리고 있던 그에게 가지 말라고 했던 건 교회를 가지 말라고 했던 의미였을 터다. 악령을 밖으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잠식되어가는 의식 너머로 처절하게 외쳤을 새턴의 그 의사를 주피터는 이제야 온전히 받아들였다. 새턴을 걸고 악을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빛이 들었다. 고개를 떨궜다. 해답이 나왔음에도 웃을 수 없었다.
“새턴. 나는.”
너를 보내고 싶지 않다. 허한 목소리로 주피터는 진심을 고백했다. 어쩌면, 아니 아주 높은 확률로, 더 이상 네 웃음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같은 신을 향해 네 목소리가 올리는 기도를 들을 수 없다면. 잔잔하게 울리던 네 목소리가 부르던 성가를 들을 수 없다면. 네 손을 잡을 수 없다면. 네 체온을 느낄 수 없다면. 그 많은 시간과 고비를 함께 지나온 네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다면.
그렇기에 나는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한다. 할 수밖에 없다.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지난 밤 풀어졌던 단추를 다시 하나하나 단정히 잠가 올라갔다. 답답하지 않았다. 제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주피터는 곧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구마 도구를 챙기며 하나 둘 자신의 짐 또한 정리하기 시작했다.
끝이 보인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이다. 너를 믿는다. 사랑하는 너를 위하여. 그리고 아마도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사랑할 너를 위하여. 신보다 더 깊고 짙게 나를 채우고 있었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기에, 이제는 내 곁의 너를 포기한다. 새턴. 나의 주主, 나의 피, 나의 살, 나의 태양.
나는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한다.

10.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은 밤공기가 달빛처럼 흩어져 있었다. 숨을 깊게 쉬었다. 악취에 욕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향로의 초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터벅터벅 새턴이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가서 섰다. 처음 이 짓을 시작할 때는 다 외우기도 벅찼던, 이제는 손에 익어버린 구마 도구들을 담은 주머니를 툭 떨궜다. 한 손으로 새턴의 이마를 쓸었다. 부드러운 살결, 너머로 체온이 있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사령이 다 빠져나갔기에 남은 것은 소환 축출뿐이었다. 뒤를 돌아 오디오의 전원 콘센트를 꽂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잔잔한 선율이 퍼졌다.
흰 천으로 새턴의 손목과 발목을 침대 사이드에 묶어 고정시켰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참아 달라는 미안함을 담은 사과를 말하며, 주피터는 있는 힘껏 매듭을 지었다. 여전히 새턴은 미동도 없었다. 아프다는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아플 것이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며, 주피터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넘기 전에 끝내지 않으면 위험할 것이란 교회의 말을 되새겼다. 최적의 시간은 아니었으나 음기가 가장 짙은 시간대를 골랐기에 자정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새턴의 이마에 십자가를 대고, 성호를 그으며 기도가 시작되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피터… 왜 또 이런 걸 하는 거야?”
“주 하느님,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세기의 주인이신 당신께서는….”
“주피터, 나 이제 괜찮다고 했잖아. 응? 이거 아파, 아프단 말이야….”
새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러나 주피터는 보호 기도를 중얼거리는 데에 집중하려 할 뿐이었다. 아파. 하지 말아줘. 제발. 애타게 매달려오는 새턴의 목소리에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눈을 더 질끈 감으며 십자가를 잡은 손으로 힘을 더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의 구원이신 분이여, 당신께 청하오니.”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래!”
“모든 악마의 힘과 사탄의 모든 작용과 활동을 쫓아주시고 없이하시며….”
“지켜준다며! 어릴 적에… 그랬잖아, 응? 기억 안 나?”
순간 눈을 감은 어둠 속으로 시야가 트였다. 아니, 환상이었다. 어릴 적의 새턴과 자신이었다. 그때는 새턴이 안 보일 때 찾아다니면, 보통은 구석진 골목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흙바닥에 쓸린 듯 지저분한 옷과 얼굴은 그리 많은 해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은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혼자 다니지 마라. 지켜줄게. 그렇게 말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랬었다. 단지 지금은 아이러니 하게도 새턴을 괴롭게 하는 것이 새턴을 지키는 방법일 뿐이었다. 흔들리지 않는다. 기도문이 끝났다. 눈을 떴다. 손을 들어 성호를 그으며 언명했다.
“눈 뜨라. 주님이 부르는 소리 있도다!”
“──빌어먹을 짐승 새끼!”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소리치자마자 날카로운 스파크 터지는 소리를 내며 오디오의 전원이 나가버렸다. 매캐한 냄새와 악령의 냄새가 뒤섞였다. 방 안에 짧은 정적이 내려앉다가, 새턴의 입에서 나오는 낮고 어두운 소리에 먹혀 사라졌다. 달빛조차 먹을 것 같이 어둡고, 짐승의 것과도 같은 소리에 주피터는 눈 사이를 구겼다. 옆의 도구들 중에서 영대를 들어 새턴의 두 눈을 가렸다.
“거짓말의 아버지이자, 태초의 살인자여.”
“아니야, 주피터! 나야. 저거 아파. 나중에 하자.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지금 말고.”
“입 안 다물지! 어디서 개수작이야!”
“행복해 져야지. 우리 학교도 같이 다녔고, 교회도 같이 다녔고, 앞으로도 같이 다녀야지.”
“왜 이 곳에 온 것이냐!”
“멍청하게 굴지 말라고. 그냥 모른 척 해! 주피터, 우리 행복해지자, 응? 거지같은 원숭이들. 개미 새끼들!”
영대가 가린 부분 아래로 새턴의 피부가 아래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꼭 개미 떼가 몰려오는 모양새였다. 살점이 썩어 들어가는 과정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입 가로, 귓구멍으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미 이전에 얼룩져있던 침대 시트가 더욱 붉게 물들어간다. 비린내가 끼쳤다. 살려줘, 주피터. 살려줘. 새턴의 목소리가 애원했다. 팔다리가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치자 침대 사이드도 같이 흔들렸다. 덜컹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주피터가 쩌렁쩌렁 언명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묻는다. 왜 이 곳에 온 것이냐!”
“꺼져, 닥쳐, 뒤져버려! 너 같은 새끼가 신의 사랑을 받을 리 없다고 알려주러 왔지! 멍청한 새끼. 아냐, 아냐! 도와줘, 주피터… 너무 아파……. 지금은 나란 말이야….”
영대 밑부분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새턴은 아이처럼 울었다. 수도 없이 주피터의 이름을 불렀다. 그 울음소리가 도저히 악령이 낸다기에는 너무 순수한 소리라서, 하마터면 손에 힘을 풀 뻔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언제까지 이 곳에 있을 것이냐!”
“안아줘, 응? 너무 추워. 무서워. 기억하잖아. 내가 네 등을 끌어안고 예배실 바닥을 뒹굴었지. 그렇게 다시 안아줘. 주피터. 나 너무 무서워. 아파.”
마치 그 날 했던 것처럼, 새턴은 얼굴 표정을 바꾸어 헐떡이며 신음을 흘렸다. 그를 끌어들이려는 것 마냥, 그러다 곧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상태로 다시 돌아오고 짐승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올곧은 눈동자가 그것을 지켜보다가, 틈이 생기자 주피터는 아래에서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어 새턴의 몸 아래에 재빨리 넣었다. 순간 새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악을 쫓는 신성한 기운이 만드는 길과 기회에서, 주피터는 놓치지 않고 그 틈을 파고들었다.
“네가 그 몸의 주인이 아님을 알고 있다. 더 있어봐야 고통만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이 곳에 있을 것이냐 물었다!”
“흐…… 해가 떨어지고 바닷물이 넘쳐나서 하늘에 닿고 구름이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볼 수 없고 강물이 다 말라붙고 땅바닥이 우르르르 무너지고 건물이란 건물은 다아 무너져서 네놈 원숭이들이 다 깔려 죽을 것이다! 개미들이 만든 문명에 니들이 죽을 것이야! 볼 때까지 있어야지. 그렇게 뒤져가는 걸!”
악마가 악의를 가득 담아 빠르게 내뱉는 저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시관이 꽉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주피터는 아래에 두었던 프란체스코의 종을 들어 한 번 흔들었다. 청명한 하늘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끊어낸 듯 두통이 사라졌다. 아직도 새턴의 몸은 분노와 고통의 중간에서 떨리고 있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새턴의 입으로 피가 지옥도처럼 터졌다. 악령이 몸부림치며 새턴의 몸이 서서히 끝을 맞고 있는 의미였다. 곧 죽을 사람처럼 내뱉는 호흡 소리를 들으며 주피터는 외면할 수조차 없었다. 고문과도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해방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우리 인간은 신의 가호 아래 살아간다! 이제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새턴이잖아, 주피터. 죽는다? 응? 죽어? 이놈이나 네놈이나 무덤을 파헤쳐서 불을 질러 버릴 테다. 뼈를 빻고 오대양에 흩어서 물고기 밥이 되게 할 테다. 안식도 없는 죽음을 맞이해! 그렇게 하려고 지금까지 버텨왔어?”
“더 이상…!”
“아파하는 게 내가 아픈 줄 알아! 내가 아니거든. 아프단 건 네가 그렇게 안아대던 이놈 몫이거든! 정신 차려. 살려야지! 밖의 인간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야지!”
순간 목구멍이 턱 차올랐다. 고함을 칠 수가 없었다. 아파, 라고 말했던 어제의 동떨어졌던 새턴의 목소리가 귓가를 다시 맴돌았다.
고통 받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작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모든 구마 예식을 겪는 것은 새턴의 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새턴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악령의 말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쓸려 나가는 듯 했다. 눈 주변이 당겼다. 울컥거리는 감각에, 주피터는 입 안을 깨물었다. 비린 맛이 퍼졌다.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그는 서로가 고통스러움에도 이것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언명했다. 신의 장소에 닿을 높이로.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극복하는 방법 또한 가득하다.**”
“흐, 아아아────!”
“그리고 인간은 모든 저항을 통해 진화한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사랑이다.*** 말하라. 네가 불리는 이름이 무엇이냐!”
동시에 영대를 떼어내고 반원 모양의 갈고리로 새턴의 목을 눌렀다. 숨넘어가는 소리로 새턴의 목소리가 신음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새턴의 얼굴 근육이 끓는 듯 울렁거렸다. 그러자 그 아래로 검은 형체가 일그러지듯 드러났다. 하늘색 맑았던 눈동자 대신 악을 가득 담은 색의 무언가를, 주피터는 똑바로 노려보았다. 어둠이었고, 악이었고, 암흑이었다.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촛불이 꺼지듯 훅 사라졌다. 이명조차 존재하지 않는 곳에 짐승이 신음하는 소리만이 그곳에 있었다. 이전의 구마 예식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주피터는 이제 직접적인 구원자로서 그 안에 있었다. 늦지도 않았고, 비틀려 어긋나지도 않았다. 긴장감이 흘렀다. 악마가 입을 열었다.
마침내 연기처럼,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름을 듣고, 주피터는 어둠에서 벗어났다. 정체가 드러난 악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방에는 바깥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의 살아있는 소리만이 작게 들려왔다.
끝이었다. 이제 악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두 생명이 끝날 터였다. 그토록 바라던 끝이 다가온다. 그러나 주피터는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새턴. 속으로만 불렀다. 이름을 부르면, 흘러가던 피가 멈춘다. 심장이 멎고, 피부는 혈색을 잊을 것이다. 햇빛을 담은 눈동자를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더 이상 같이 살아갈 수 없다. 너는 영영 사라지겠지. 각오했었음에도 주피터는 차라리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시계바늘은 미련 없이 움직인다. 오늘이 물러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침묵 속, 열리지 못하던 주피터의 입술 대신 새턴의 것이 달싹였다. 그 의미를 읽은 주피터의 붉은 눈이 커졌다. 여전히 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어둠이 눈에 있었지만, 서로 눈을 마주치며 보았던 푸른색의 눈동자 그대로, 새턴은 주피터를 바라보며 푸르게 웃었다. 주피터는 울음 대신 마주 미소지었다. 서로의 마지막이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명한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Malesuádus, 完>